“스님들 불심과 정성 고스란히 벽화에 녹아들다”

흥국사, 고려 지눌스님 창건
의승수군 주둔한 호국도량
17세기 스님들 총력으로 불사
대웅전 중건, 불상, 불화 조성

후불벽 뒷벽에 한지 덧바르고
반가좌한 백의관세음보살 그려
무위사 마곡사 등 10여 사찰
후불벽에 백의관음도 봉안해

악업 참회하는 의식 봉행 추정
조선시대 관음신앙 경향 반영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영축산 자락에는 호국 도량 흥국사(興國寺)가 자리하고 있다.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스님이 창건한 사찰로, 사명(寺名)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나라의 흥성을 위한 기도처로 개창되었다. 사적기를 보면, ‘국사께서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하고 면벽관심(面壁觀心)하고 심신연마에 환경이 좋은 성지를 택하여 가람을 창설했다. 이 절이 흥하면 나라가 흥하고 나라가 흥하면 이 절도 흥할 것이다’라고 개산(開山) 이념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흥국사는 조선조에 들어와 호국사찰로서의 위상이 한층 더 높아졌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흥국사에서는 기암대사(奇巖大師)가 스님 300여 명을 이끌고 승병으로 나서 활약하게 된다. 흥국사는 남해에 바로 인접해 있으므로, 이곳의 스님들이 수군으로 투입되었고 승군들의 주둔지인 주진사(駐鎭寺) 역할을 하기도 했다.
 

조선 1690년대 여수 흥국사 대웅전 후불벽 뒷면에 그려진 백의관음보살도. 사진제공=성보문화재연구원
조선 1690년대 여수 흥국사 대웅전 후불벽 뒷면에 그려진 백의관음보살도. 사진제공=성보문화재연구원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곳의 스님들은 불제자로서의 본분 외에도 왕조 수호에 일익을 담당했다. 많을 때는 700여 명의 승군이 머물렀다고 한다. 현재 사중의 유물관 이름이 ‘의승수군유물전시관’인 것도 흥국사의 성격 및 정통성을 반영한 것이다. 

조선조 흥국사의 사세는 사찰의 규모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현재도 대웅전을 비롯해 불조전, 팔상전, 원통전, 무사전, 응진당, 첨성각, 적묵당, 심검당 등 많은 당우가 남아있다. 이중 대웅전은 흥국사의 중심 법당이다. 절이 자리한 산의 이름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 장소를 상징하는 ‘영축산(靈鷲山)’이라는 점을 통해서도 잘 이해되는 부분이다.

대웅전은 인조 2년인 1624년에 계특대사(戒特大師)가 절을 고쳐 세울 때 중건되었으며 이후 1690년에 증축, 확장되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내부 면적은 49.75평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고, 가공되지 않은 초석이 그대로 사용된 덤벙주초 위에 기둥을 놓았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둔 다포계 건물이다. 

불전의 내부로 들어오면, 정면 중앙 불단 위에 목조석가삼존상이 모셔져 있으며 그 뒤로는 석가모니 영산회상도가 봉안되어 있다. 불상은 숭정연간(1628~1644)에 조성되었으며 불화는 1693년에 그려진 것이다. 불상이 모셔진 곳의 위 천장 부분에는 부처님이 앉아 있는 자리를 더욱 엄숙하게 꾸민 닫집을 만들어 놓았으며 그 주변부에는 단청이 오색 찬연하다.

대웅전 건물을 비롯해 불상과 불화 모두 당시 흥국사의 스님들이 주축이 되어 이룬 것이다. 스님들의 불심과 정성이 고스란히 녹아있으며, 그 격조와 아름다움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대웅전, 불상, 불화 모두 국가 지정 보물로 지정된 이유이기도 하다. 
 

관음보살의 상호.
관음보살의 상호.

흥국사 대웅전에는 주요 예배 공간인 후불벽의 앞면, 그리고 장엄의 공간인 상부 천장 외에도 중요한 곳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후불벽의 뒷면이다. 쉽게 말해, 정면 중앙 석가설법도가 걸려있는 후불벽을 끼고 뒤로 돌아가면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그 뒷벽에 관음보살이 그려져 있다. 관음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위로는 깨달음을 추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대승불교의 가치를 대표하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보살이다. 

흥국사의 관음보살은 백색의 옷(白衣)으로 온몸을 감싼 채 물에서 피어난 연꽃 위에,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 위에 올린 반가좌 자세를 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보관에는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으며 가슴에는 화려한 영락 장식을 두른 채 선재동자(善財童子)를 내려다보고 있다.

관음보살이 앉은 연화좌에서 두 갈래의 연꽃이 뻗어 나와 있는데, 그 하나에는 선재동자가 보살을 향해 합장하고 서서 법을 구하고 있으며 다른 하나에는 관음보살의 지물인 정병이 놓여 있다. 정병에는 버드나무 가지가 꽂혀 있고 그 위에 파랑새(靑鳥), 때론 관음조(觀音鳥)라고도 불리는 새가 한 마리 앉아 있다. 화면의 테두리 부분에는 검은색의 방제란을 만들고 그 위에 흰 글씨로 ‘시주육순비구(施主六淳比丘)’라고 써 두었다. 육순스님은 당시 흥국사의 스님 중 한 분으로 추정된다.

이 백의관음보살도는 세로 393.5cm, 가로 289.5cm에 달하는 큰 화면에 그려져 있다. 흙벽에 한지를 덧바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린 ‘첩부(貼付)’ 벽화이다. 종이를 가로 4장, 세로 4장씩 16장을 이어 벽면 전체에 붙였고, 관음보살의 얼굴 부분에서 종이가 연결되는 것을 피하려고 상호를 중심으로 한 장을 더 붙였으니, 총 17장의 종이가 사용된 셈이다.
 

선재동자와 정병.
선재동자와 정병.

일반적으로 벽화는 흙벽이나 나무벽에 바로 그리는 방식을 사용하는데, 이 그림은 종이를 붙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이러한 방식은 주로 천장의 장엄화나 대들보의 별지화(別枝畵, 사람, 꽃, 새, 짐승 등을 그린 장식화)에 사용된다. 후불벽 전면에 적용된 사례로는 흥국사 외에 양산 신흥사 대광전 벽화와 마곡사 대광보전 내 백의관음벽화 정도가 알려져 있다. 

흥국사 백의관음보살도는 17세기 말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벽화는 일반적으로 제작 시기를 명확히 알기 어렵다. 기록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이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후불벽의 앞쪽에 봉안된 석가설법도(1693)와 비교해 보니, 관음보살의 상호와 어깨로 드리워진 보발, 옷에 표현된 문양 등이 상당히 비슷하다. 따라서 건물이 지어지고 불상이 모셔진 후, 후불화인 석가설법도가 제작되는 과정에서 동일한 화사들이 뒷벽의 관음보살벽화도 함께 그린 것일 가능성이 크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후불벽 뒷면에 백의관음을 모셨다는 점이다. 관음보살도는 수월관음도, 백의관음도, 십일면관음도, 천수천안관음도, 준제관음도 등 형식과 세부 주제가 다양하다. 또한, 관음보살도는 독존은 주로 관음전이나 원통전에서, 아미타부처님의 좌협시인 경우는 극락전에서 확인된다. 이와 더불어 한 곳이 더 있으니, 바로 극락전, 대웅전, 대광명전 등 주불전 내 후불벽 뒷면이다. 

현재 흥국사의 경우처럼, 후불벽 뒷면에서 확인되는 관음보살벽화는 강진 무위사, 마곡사, 천은사 등 10여 건에 이른다. 그리고 거의 다 ‘백의관음’을 모셨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는 후불벽 뒷면이라고 하는 공간과 백의관음이 어떤 연관성을 지니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실제로 흥국사에서도 관음전에는 수월관음도(1723)를 모신 반면, 대웅전 내 후불벽 뒷면에는 백의관음을 모셔 공간에 따른 차별성을 지닌다.

백의관음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에 언급된 ‘삼십삼응신(三十三應身)’, <수능엄경(首楞嚴經)>의 ‘삼십이응신(三十二應身)’ 중의 한 분이다. 그렇다면 시선이 잘 미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어둡고 협소한 공간에 백의관음을 예배의 대상으로 모신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비록 좁은 공간이기는 하나, 이곳에서 백의관음에게 예를 갖추고 진언을 외운 후 악업을 참회하는 예참의식이 행해졌을 가능성을 짐작케 한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백의관음보살도.
아래에서 올려다본 백의관음보살도.

고려 말부터 진응국사 혜영(眞應國師 惠永, 1228~1294)스님이 백의관음에 대한 예참문인 백의해(白衣解)를 저술하는 등 백의관음 예참이 성행했으며 이러한 흐름이 조선으로 이어진다. 대표적으로 무위사 극락보전의 백의관음보살도가 있는데, 이 그림의 하단에는 노비구의 예참 모습이 그려져 있다. 흥국사 대웅전 후불벽 뒷면의 백의관음보살도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도 정면에 선 것보다 바닥에 앉아 올려보았을 때 관음보살의 원만하면서도 자비로운 형상이 훨씬 더 잘 보인다.

이렇듯 흥국사는 호국도량으로서의 명성과 더불어 조선 후기 관음신앙의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백의관음보살도는 ‘첩부’ 벽화라는 점에서 제작 방식이 특이할 뿐 아니라 조선후기 백의관음신앙을 구체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또한 주불전 내 후불벽 뒤쪽 또 다른 신앙 공간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큰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이 불화는 현재 보물 제1862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교신문3583호/2020년5월20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