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마당 잉크색 하늘…바다를 부르는 풍경소리

#1
절의 입구는 안개가 가득해 습한 기운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은 시간. 나는 일주문을 지나 어두운 계단을 이유없이 서둘러 오르고 있었다. 낮에는 사람들로 북적였을 이 길이 오로지 내 발걸음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둡지만 두렵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일주문을 지나 자하루까지 그리 먼 길이 아니었는데 계단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마지막 계단을 오르는 순간 탁 트인 마당이 나타났는데 그곳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로 걸어가니 마당의 안개가 걷히고 눈앞에 빛으로 둘러싸인 대웅보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꿈이었다. 미황사에 대한 기대와 코로나19로 인한 어려운 상황이 고대하고 있었던 미황사 방문을 다시 미루게 만들지 않을까하는 걱정 때문에 꾼 꿈일까? 새벽에 서둘러 출발해 미황사 일주문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서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꿈에 본 일주문의 모습과 계단, 천왕문으로 오르는 길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2
남도의 5월 태양은 뜨거웠다. 더운 날씨에 반소매 차림의 사람들도 보였다. 절 마당이 한눈에 보이는 응진전 앞 돌계단 중간쯤에 앉아 햇볕을 쬈다. 황토색 마당과 잉크를 풀어 둔 푸른 하늘, 적당한 햇볕, 산바람에 일정하게 흔들리는 풍경소리가 음악처럼 들렸다. 멀리 남해의 바다가 보이는 미황사 마당은 내가 기억하는 절집 마당 중에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이었다.
 

#3
해가 지며 세상이 어둠으로 들어서는 자리에 서 있으니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와 세상에서 해야 할 일에 대해 평생 질문하고 찾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의 끝에서 오늘의 삶이 아쉽지 않았는지 헛된 순간은 없었는지 돌아봤다.

사는 동안 그 답을 얻지 못할 수도 있지만 순간순간 놓인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라면 생의 끝에서도 웃을 수 있지 않을까? 해가 바다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 내려와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첫걸음을 내딛는 것처럼 들뜬 기분이었다. 

배종훈 bjh4372@daum.net 

[불교신문3583호/2020년5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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