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60주년 특별기획’
불교신문은 나의 도반 - 김윤희 맑은소리맑은나라 대표


부산불교신문 기자시절
선승초청 법회 잦았는데
서울서 취재진들 올때마다
행사 마치면 부산 앞바다서
함께 노래하며 친목 다지고…

맑은소리맑은나라 20돌 때
‘자매 언론’으로 우정 나누며
아낌없는 찬사 응원 보내줘
불교신문은 최상의 도반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이하 중략)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다. 불쑥, 그리고 뜬금없이 시어를 옮겼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내 서른의 삶은 무언가 통째로 날아든 느낌이었다. 그것은 사람보다 더 커다란 ‘부처’였다. 외우지 않아도 사흘 만에 딱 읊조리게 된 반야심경이 그랬고, 정구업진언으로 시작된 천수경의 첫 구절이 허밍처럼 입가를 떠나지 않던 그날들은 마치 무엇인가에 홀려버린 것만 같은 빠른 크로키 화면의 움직임 같은 거였다. 
 

누구보다 불교를 사랑하면서 쉬지 않고 수행정진하는 김윤희 대표는 30여년 긴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초심을 지키는 언론인의 향기를 지녔다. 언제나 큼직한 카메라 렌즈를 어깨에 메고 ‘불교의 오늘’을 담는다.
누구보다 불교를 사랑하면서 쉬지 않고 수행정진하는 김윤희 대표는 30여년 긴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초심을 지키는 언론인의 향기를 지녔다. 언제나 큼직한 카메라 렌즈를 어깨에 메고 ‘불교의 오늘’을 담는다.

 

어디서부터 기인했을까. 모태신앙으로부터 출발한 불교 언론으로의 이적은 감사한 출발이었다. 그즈음, 신문사 발행인 스님의 안내로 만나게 된 불교신문 선배는 또래였음에도 한참의 선배였고, 불교 언론에서 만난 첫 인연이었다. 

선배의 마중을 받으며 보무도 당당히 종로에 입성한 때는 1996년 여름이었다. 키 큰 회화나무를 끼고 선 4층짜리 총무원 청사의 계단은 단단한 철옹성 같았고, 그 철옹성으로의 진입은 선배가 있어 거리낄 것이 없었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마주치던 얼굴들에게 나를 소개시키는가 하면, 그런 인사들에 대한 설명을 새내기 입학생에게 학교생활을 주지시키듯 하나하나 일러준 선배의 모습은 내가 오롯이 잡고 매달려야 할 동아줄에 다름 아니었다. 더욱이 신문사 안으로 들어서서는 씨줄날줄의 교차처럼 통성명이 바쁘게 오갔으니, 그 당시 소개받은 얼굴들은 지금은 퇴사를 한, 두 세 명의 선배들이었으며 현재도 주필 등 요직에서 불교신문을 이끌고 있다. 

그렇듯 총무원 청사에 자리 잡은 불교신문 편집국은 부산에 적을 둔 기자에게 둥지 같은 연대감 비슷한 무엇인가를 암시하고 있었다. 첫정이라고 했다. 모르긴 해도 그 첫 인연이, 첫 걸음이 내겐 장기전을 예고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990년대 후반, 그 때도 대한민국은 지금 겪는 코로나 사태에 흡사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IMF금융위기는 온 나라 안팎을 뒤흔들고 있었다. 도산하거나 무너지는 회사가 속출했고 개개인의 어려움도 감당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그러나 모 선승의 말씀처럼, 세상사 일방적으로 좋기만 한 것도 없으며 일방적으로 나쁘기만 한 것도 없으니 시절의 어려움을 저마다의 종교를 붙들고 매달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사찰에서는 ‘IMF극복을 위한 기도’를 봉행하는가 하면, 선방의 스님들도 수좌로서의 가행정진에 실로 진력하던 시절이 또 그때였다. 그랬으니 기도 동참을 위해 사찰을 찾는 불교인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던 것도 그 시절을 대변하는 진풍경이었다. 

그 시절 신문사의 기사작성은 육필 원고에서 컴퓨터 자판으로 차츰 옮겨가던 시절이었는데, 고정 필진들에게서 받는 원고 역시 육필 원고지를 수령해오는 일이 다반사였으며 학승이라고 불리어지던 스님들의 육필 원고를 받으러 오가며 지어놓은 스님들과의 묵은 연(緣)도 그 시절 다져진 인연들이 수북했다. 

그런 내용과 맥락을 같이 했을 터다. 부산불교신문사 기자로 활동 폭을 넓혀가던 내게 불교신문 본사에서 종종 요청해오던 부산경남 지역의 불교소식과 사진원고 전송은 부산지사에서 스트레이트기사로 전해주던 기사와는 다소 다른 부분이었다. 

데스크에서나 사수들의 눈으로 본 취재 성격의 상이점을 일정 부분 충족시켜 줬다는 판단일수도 있겠으며, 그게 아니었다면 다른 관점에서의 사진원고, 기사의 입수가 주효하던 차, 부산에 적을 둔 내 몫이 우선시 되었고 그것은 상호간의 품앗이와도 같은 성격이었다. 물론 지금처럼 SNS를 통해, 손쉬운 E-메일을 이용, 순식간에 자료를 보낼 수 없었으니 주로 이용한 전달수단이 우편이었고 어쩌다는 팩스전송이 빈번하던 자료 교환이었다. 

그런가 하면, 그 시절에는 각 신문사가 주최, 주관하는 선승초청 법회나 법문이 아주 잦았던 때였다. 규모 있는 호텔을 주로 법회 장소로 택해 봉행되던 법회에는 수 천 명의 신도들이 줄을 섰고, 특히 불도(佛都) 부산에서 빈번하게 봉행되곤 하던 선승대법회에는 반드시 서울에서 취재진들이 내려와 함께 취재경쟁을 벌이곤 했는데, 그 때마다 법회 취재가 끝나고 나면 선후배 기자들은 마치 정해진 수순인양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함께 식사를 했고, 술잔을 기울였다. 

공동의 주제 하에, 공통분모를 띤 불교계 선후배들은 그렇게 한솥밥을 실감하는 우의를 다져나갔다. 또한 스님들이 쥐어준 인정어린 ‘부처님장학금’은 부산에서만 대접할 수 있는 특화된 공양금으로 쓰이기도 했고, 이판승과 사판승을 알아가며 앉고 서고, 들고 나는 이치도 기실은 그때 모두 습득한 셈이었다. 더불어, 불교용어에서 나온 ‘야단법석’을 우리야말로 제대로, 그리고 적제적소 활용하곤 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불교신문의 선·후배들은 내게 있어 법향을 함께 나눈 식구(食口)이자 도반(道伴)이 분명했다. 

시간은 보내고자 하지 않아도 절로 흐른다. 서른의 나이는 마흔의 나이를 기필코 불러오고 마는데 그 일련의 과정에서 나 또한 신문사의 기자직을 그만두고 서른 중반의 나이로 불교월간지를 창간하기에 이른다. 월간 <맑은소리맑은나라> 창간은 겁 없던 서른 중반, 내가 저지른 일 가운데 가장 우매하면서도 빛나는 불사였다. 

<맑은소리맑은나라>는 지난해 11월 20주년을 맞아 통권 240호를 발간했다. 그간 결간을 한 차례도 하지 않고 발간한 문서포교의 내 원력이 스무 살 나이를 먹은 것이었다. 몇 해 전, 그 지령 200호에는 종정예하, 전 총무원장 스님을 위시해, 불교신문 사장 스님 등 교계 안팎 어른들의 축하메시지를 게재한 적이 있었으며 여러 다양한 독자층의 응원을 듬뿍 받아 싣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유독 아낌없는 찬사와 응원을 보내주며 문서포교의 원력을 지면으로 할애, ‘자매 언론사’로서의 우정을 과시해준 불교신문은 시대를 함께 한 형제애가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그러나 스무 살의 나이를 먹도록 해내지 못한 일이 있다. 월간 <맑은소리맑은나라>와 동명의 출판사를 운영함에도 우리의 이름을 내건 불교를 위한 실속 있는 세미나 한 번 마련하지 못한 일이 그러하며 수승한 승가를 모셔 진정한 야단법석 한 번 마련하지 못한 일이 그러하다. 

하여, 이 세계적 재앙인 코로나 사태가 잦아들고 나면, 난 당당한 법석을 마련하여 만인이 이로울 법의 마당을 펼치려 한다. 그 길에 불교신문이 든든하게 함께 해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또한 나의 그 첫 선배를 모셔, 최상의 향훈을 선배로부터 알게 되었음을 감사히 알리려 한다. 나의 길에 첫 번째 안내자가 되어준 선배는 얼마 전까지 신문사의 주간을 지내고 지금은 종립대학 요직에 있다. 

오래 전, 내 서른의 삶을 통째로 바꿔준 ‘부처’를 모시고 마중 왔던 사람들, 친정식구와도 같은 불교신문이며 오랜 도반이자 신의를 나눈 선후배 기자들이다. 이순(耳順)의 나이를 먹은 불교신문이 종단 안팎의 쓴소리까지도 순일하게 소화해내는 진정한 목탁의 불교 언론이 되기를 소원한다. 

■ 김윤희 대표는…
1994년 부산불교신문사를 시작으로 불교계에 몸담았으며 1999년 월간 맑은소리맑은나라와 동명의 출판사를 설립, 불법홍포와 문서포교에 진력했다. 2000년부터 영축총림 통도사 사보 제작을 중심으로 봉화 축서사 사보, 무비스님의 염화실지 등 사찰사보를 제작하는 일과 다양한 불서보급으로 문서포교에 앞장서고 있다. 2007년 108여성불자 선정, 2018년 영축문화대상을 수상했다.

[불교신문3582호/2020년5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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