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사랑’ 동국대학교병원 투병 · 간병 수기 공모전
[참가상 수상작] 권준삼 ‘절망 속에 피우는 희망’


2016년 갑자기 쓰러진 아내
모야모야병으로 인한 뇌출혈

‘같이 죽자’ 생각한 게 수백번
매일 병원 법당 찾아 쾌유 기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간병생활
다시 걸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아내 위해 집에 재활기구 마련

언제까지 이런 삶을 계속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고 있다. 아니, 살아내고 있다. 아내는 환자다. 내가 없으면 내 아내는 죽는다. 그런 아내가 나를 살리고 있다. 참으로 모질고 잔인한 운명이다.

그 날을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아내와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2016년 7월18일을. 여느 때처럼 저녁을 먹은 후 TV를 보던 아내가 갑자기 두 팔의 마비증상을 호소하더니 급기야 얼굴이 빨갛게 변하며 말조차 하지 못하는 응급상황이 발생했다. 서둘러 119를 불러 병원으로 향했다. 진단결과는 모야모야병으로 인한 뇌출혈이었다.
 

권준삼 씨는 2016년 모야모야병으로 인한 뇌출혈로 쓰러져 투병중인 아내가 언젠가는 다시 걸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간병하고 있다.
권준삼 씨는 2016년 모야모야병으로 인한 뇌출혈로 쓰러져 투병중인 아내가 언젠가는 다시 걸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간병하고 있다.

모야모야병은 뇌혈관질환으로, 뇌의 큰 혈관이 점차 좁아져 뇌로 혈류 공급이 되지 않아 뇌 이상 증상을 유발하는 희귀질환이다. 왜 생기는지 원인도 모르고, 그래서 예방이나 치료법도 마땅치 않다. 더욱이 나이가 든 사람에게는 뇌출혈로 증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58세인 아내의 나이를 감안할 때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완치는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고, 나와 아내가 기댈 곳은 ‘기적’ 밖에 없었다.

아내의 투병과 나의 간병은 그렇게 시작됐다. 아내는 말은 전혀 하지 못했고, 자신의 이름을 쓰는 정도의 기능 밖에는 하지 못했다. 유일한 의사소통 방법은 손가락이었다. 내가 무엇인가를 묻고 아내는 손가락(한 개를 펴면 예, 두 개를 펴면 아니오)으로 답했다. 나는 아침 7시 반에 병원에 도착해 저녁 8시 반까지 아내 곁을 지켰다. ‘내가 정성을 쏟으면 더 많이 나아지겠지’하는 생각에 그해 12월에는 운영해오던 400평 규모의 가든 마저 접고 아내 간병에 매달렸다.

그렇게 2년간 동국대병원, 세브란스병원, 성모병원 등 10여 곳의 병원을 전전하며 투병과 간병 생활을 했다. 병원마다 입원할 수 있는 기간이 정해져 있어서, 부득이 일정 기간마다 병원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말도, 행동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절망적이었다. 슬픔을 넘어 모든 의욕이 사라졌고, 정신마저도 피폐해졌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희망이 없었다. 고통은 갈수록 깊어졌다. 잠이 든 아내를 바라보고 있자니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이렇게 사는 건 의미가 없었다. “같이 죽자”고 했다. 아내는 대답이 없다.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모르지만 아내도 나를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 십 번, 아니 수 백 번을 나는 아내와 함께 죽는 생각을 했다. 견뎌내야 하는 것도 힘들지만 희망이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괴로웠다.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장모님도 뇌출혈로 돌아가셨고, 아내의 외삼촌도 57세의 젊은 나이에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 때는 몰랐다, 두 분의 죽음이 모야모야병과 관련이 있는지를. 아내가 모야모야병 진단을 받고 나서 네 명의 처제들도 유전적으로 문제가 있는지를 알기 위해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충격적인 결과를 받아들었다. 4명 모두 모야모야병이었다. 처제들도 언제든 아내처럼 쓰러질 수 있는 것이었다. 병이 가혹하게도 대물림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살던 집마저 처분하고 작은 임대아파트로 이주한 것은 2019년 7월말이다. 그동안 병원비만 2억8000만원 정도 들었다. 가지고 있던 재산은 거의 다 병원비로 썼다. 이사하기 세 달 전에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받았다. 먹고 살아야 하고, 아내 간병을 위해서는 한 푼이라도 더 있어야 했다.

참으로 참담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게 더 고통스럽게 다가왔다. 그나마 아내가 들어놓았던 보험금으로 병원비를 충당해 오고는 있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은 여전히 절망적이었다.

희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병원생활 2년 뒤인 2018년 8월 요양병원에 입원하면서부터 아내는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휠체어에 탈 수 있는 정도까지 회복이 되었고, 보조기에 의지해 한쪽 발을 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나는 아내가 요양병원으로 오기 3개월 전부터 아예 아내와 ‘24시간 병원 동거’를 시작했다.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고, 2년 넘게 도움을 받아 온 간병인마저도 쓰지 않고 내 모든 것을 아내에게 쏟아보자고 작정한 것이다. 이따금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거나 먹을 것을 준비해 오는 일 외에는 24시간 아내 곁을 지켰다.

하지만 조마조마하게 보듬어오던 희망은 요양병원 생활 1년 만에 산산조각이 났다. 아내의 증세는 갑작스레 악화(재발)됐고, 세브란스병원에서 7주간 다시 입원하며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대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했다. 혼신을 다해 아내를 돌보아왔는데, 결국엔 다시 원점이었다. 

2019년 10월14일 세브란스병원에서 동국대 일산한방병원으로 옮겼다. 나는 매일매일 병원 법당에서 아내를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도대체 왜 이런 시련이 나와 아내에게 일어난 것이냐고 부처님 원망도 했다.

‘그저 열심히 살아온 것 말고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 우리에게 왜 이런 가혹한 일이 생긴 것인지 누구든 말 좀 해 보라’고 수 천 번도 더 외쳤다. 휠체어를 탄 채 잘 모아지지 않는 손으로 합장을 하며 애끓게 부처님을 찾고 있는 아내를 볼 때마다 내 가슴은 무너져 내렸다.

아내는 검소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대구에서 식당을 하던 작은 누나는 가게 손님이었던 아내를 소개해 주었고, 4개월 만에 결혼했다. 만난 순간 ‘이 여자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연이었다.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아내는 내게 헌신적이었고, 훌륭한 친구이자 동반자였다. 하지만 아내는 몸이 약해 다섯 번이나 유산하는 아픔을 겪으며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았다. 그렇게도 원하던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그래서 더 안쓰러웠던 아내가 이제는 그 기억마저도 잊은 채 더 깊은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내는 지금 콧줄로 영양공급을 받고 있다. 눈은 아주 조금 뜰 수 있지만 팔과 다리는 굳어 있어서 잘 움직이지 못한다. 그래도 이런 상태는 많이 나아진 것이다. 아내는 쉽게 잠들지 못한다. 간신히 아내를 재운 후에야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하루를 정리한다. 당장 20일 후면 입원일수가 다 차서 동국대 한방병원에서 퇴원해 다른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 또 가야 할 병원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새로 이사한 집에는 아내 재활과 편의를 위한 운동침대를 사 놓았고, 기립기와 재활에 필요한 도구들도 주문해 놓았다. 아내가 언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걸어서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도 앉아서 밥 먹고, 말하고, 웃을 수 있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것이다.

아내의 투병과 나의 간병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아내와 함께 끝까지 걸어가려고 한다. 이것이 숙명이라면 받아들일 것이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는 것도 안다. 그렇지만 그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없으면 나는 버틸 수 없을 것 같다. 강물이 흘러 바다에 이르듯이, 그렇게 가다보면 아내가 걷는 날이 올 거라고 나는 믿는다.

[불교신문3581호/2020년5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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