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악의 신성하고 거대한 바위에 부처님 존상 새기다”

경주 토착신 성지 사찰로 바껴
자장스님 오방관념 적용시켜
중악인 낭산 수미산으로 설정

신불교체기 조성된 오악 불상
불교와 토속신앙 습합한 결과

굴불사지 사면석불상 비롯해
탑곡 마애존상 여러 도상 조성
당시 신라서 유행한 신앙 확인

신라의 불교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토착 신앙의 성지에 사찰을 건립하였고, 이 중 일곱 개의 사찰을 전불시대(前佛時代)의 칠처가람이라고 여겼다. 흥륜사(興輪寺, 금교 동쪽 천경림), 영흥사(永興寺, 삼천기), 황룡사(皇龍寺, 용궁의 남쪽), 분황사(芬皇寺, 용궁의 북쪽), 영묘사(靈妙寺, 사천의 끝), 천왕사(天王寺, 신유림), 담엄사(曇嚴寺, 서청전)가 그곳이다.

토착신의 성지가 사찰로 바뀌는 신불교체(혹은 신불습합)의 모습은 신라 왕경 경주의 오악(五嶽)에서도 확인된다. 오악은 혁거세(赫居世)를 왕으로 추대한 6촌장(村長)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산으로, 중악 낭산(狼山), 동악 토함산(吐含山), 남악 함월산(含月山, 남산), 서악 선도산(仙桃山), 북악 금강산(金剛山, 금산 또는 명활산)이다.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미륵불입상은 신라 7세기 중엽에 조성됐다. 불입상 8.2m. 사진=문화재청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미륵불입상은 신라 7세기 중엽에 조성됐다. 불입상 8.2m. 사진=문화재청

토착 신앙적인 성격의 오악이 불교화된 것은 선덕여왕 때 자장(慈藏)스님에 의해 불교적인 오방(五方) 관념이 적용되면서 시작되었다. 낭산을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須彌山)이자 중악(中嶽)으로 설정하기 위해 도리천에 묻어 달라는 선덕여왕의 유언에 따라 낭산(수미산) 꼭대기에 왕릉을 조성하고, 문무왕 대인 679년에 낭산 기슭(수미산 중턱)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창건하였다. 

오악에서의 신불 교체는 산신 의례를 지냈을 만한 거대한 바위에 불교 존상을 새기는 것이었는데, 7세기 중엽부터 8세기 전반에 걸쳐 이루어졌다. 남산(함월산) 탑곡의 마애존상, 선도산 정상의 마애불삼존상, 금강산의 굴불사지(掘佛寺址) 사면불상 등이 이러한 예들이다.

문무왕 대에 가장 늦게 오악으로 공인된 토함산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당례(唐禮)에 따라 신라의 강역관이 바뀌면서 다시 동악으로 부각되는 8세기 중엽이 되어서야 신불 교체의 모습이 보이는데, 불국사와 석불사의 창건이 이러한 증거이다.

한편 화랑(花郞) 시절 김유신(金庾信)이 수련했던 곳으로, 중악(中岳) 석굴로 비정되기도 하는 단석산(斷石山) 신선사(神仙寺)도 마애미륵불삼존상 등 10존의 불교 존상이 거대한 바위 면에 새겨져 있고, 사찰의 이름이 신선, 즉 산신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신불교체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서악 선도산과 북악 금강산은 신라 불교 공인 과정에서 희생된 이차돈(異次頓)의 사당과 무덤이 있던 곳으로서 중요한 신불교체의 장소이다. 선도산 마애불삼존상과 직접 관련될 가능성은 적으나 선도산에는 진평왕 때 안흥사(安興寺)의 비구니 지혜(智惠)스님이 새로 법당을 보수하려 하자 선도산의 신모(神母)가 금을 시주하면서 봄가을로 점찰(占察)법회를 열도록 권유하였다.

지혜는 법당의 주존인 삼상(三像, 불삼존상)을 화려하게 장엄하고, 벽면에 53불과 오악 신군(神君) 등을 그렸다고 한다. 안흥사 법당 속에서 신불습합의 모습이 확인되는 장면이다. 
 

신라 7세기 중엽에 조성된 선도산 마애아미타불삼존상. 불상 약 7m(복원 높이, 현존 6.85m), 좌협시보살상 4.55m, 우협시보살상 4.62m. 사진=문화재청
신라 7세기 중엽에 조성된 선도산 마애아미타불삼존상. 불상 약 7m(복원 높이, 현존 6.85m), 좌협시보살상 4.55m, 우협시보살상 4.62m. 사진=문화재청

선도산 마애불삼존상은 안산암(安山巖)의 바위 면에 돋을 새김한 불입상과 화강암으로 조성한 환조의 협시보살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상의 대좌는 따로 만들어 결합하였으며, 협시보살상들은 발목까지 하나의 돌로 만든 다음, 연화대좌와 양발이 표현된 凹 형태의 지지대 위에 끼워져 있다. 불상은 윗부분이 돋을새김, 아랫부분이 얕은새김 되었다. 불삼존상은 화불이 표현된 보관을 쓰고 왼손으로 정병을 잡고 있는 좌협시보살상이 관음보살로 추정되어 아미타불삼존상일 가능성이 높다. 

아미타불상은 통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양손을 가슴 앞까지 들어 올려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결하였는데, 여원인을 한 왼손은 약지와 소지를 손바닥 가운데로 구부린 독특한 모습이다. 불상은 방형에 가까운 둥근 얼굴에 오뚝한 코, 도드라진 코 망울, 은근한 미소를 머금은 입을 가지고 있다. 또한 둥글고 넓은 어깨를 가진 장대한 신체 조형과 간결한 법의 주름을 갖추고 있는데, 법의 주름은 가슴 앞에서부터 무릎까지 U자를 그리며 흘러내리고 있다. 

협시보살상들은 바위 면에 기대어 세울 수 있게 뒷면이 편평하게 처리되었으며, 머리 부분은 돋을새김으로, 다리 부분은 얕은 새김으로 표현되었다. 보살상들은 몸에 두른 2단의 천의와 목걸이는 같지만, 조형적으로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불상에 비해 왜소한 보살상들과 관음보살상의 보관 형식은 7세기 중엽에 조성된 장창곡 출토 석조미륵불삼존상과 닮았다. 

관음보살상은 방형에 가까운 둥근 얼굴에 부은 듯한 눈두덩, 지그시 감은 눈, 오뚝한 코, 은근한 미소를 머금은 입, 양감 있는 뺨을 가지고 있다. 보살상은 목걸이와 팔찌를 착용하였으며, 오른손은 가슴 앞에 두고, 왼손은 내려뜨려 정병을 잡고 있다. 정병은 7세기 중엽 이후에 조성된 어깨가 넓고 몸체 아랫부분에 문양이 있는 정병과 유사하다. 대세지보살상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무엇인가 들고 있다.

보살상은 관음보살상과 달리 살짝 뜬 눈, 낮은 코, 미소가 사라진 입을 가진 얼굴과 긴 목, 부드럽고 둥근 어깨, 장방형의 몸을 갖추고 있다. 또한 보관을 착용하지 않고 머리카락을 묶은 보계(寶髻)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세 가닥의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흘러내리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보살상은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보살상에서 많이 보이는 특징이다. 

선도산 아미타불삼존상과 같이 불상을 바위 면에 직접 새기고 보살상들을 따로 만들어 양옆에 세운 예는 통일신라시대 8세기 전반에 조성된 북악 금강산의 굴불사지 사면불상에서도 확인된다. 사면불상은 커다란 바위의 네 면에 다양한 기법으로 표현된 불상과 보살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면의 아미타불삼존상, 동면의 약사불좌상, 남면의 불입상과 보살입상, 북면의 불입상과 11면(面)6비(臂)-11개 얼굴과 6개 팔- 관음보살입상이 그것으로, 음각된 관음보살입상을 제외하고 모두 돋을새김 되었다. 같은 바위에 함께 있는 이들 존상은 크기, 조각 기법, 조형적인 면에서 차이를 보여 조성 배경이 달랐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굴불사지 사면불상에 대한 기록과 같이 이들 존상은 경덕왕대에 걸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면의 아미타불삼존상은 불상과 비교해 협시보살상이 커진 것을 제외하면 도상 구성과 조성 방식에서 선도산 아미타불삼존상과 많이 닮았다. 불상은 상체가 긴 장대한 모습의 입체적인 조형으로, 머리를 제외한 몸체, 광배, 대좌를 바위 면에 직접 표현하였다. 불상은 왼손을 배 앞에 두고, 오른손을 어깨까지 들어 올려 설법인을 결하였다.

통견 방식으로 착용한 법의 자락은 배 위에서부터 U자를 그리며 반복되면서 내려오는데, 선각(線刻)으로 처리되었다. 관음보살상은 보관에 입상의 화불이 표현되어 있으며, 몸에 비해 머리가, 하체에 비해 상체가 긴 편이다. 보살상은 오른손을 어깨까지 들어 올렸으며, 왼손을 내려뜨려 무엇인가를 잡고 있다.

대세지보살상은 머리 부분이 훼손되어 선도산의 대세지보살상과 같이 보계 형식을 하였는지 아니면 관음보살상처럼 보관을 착용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오른손은 내려뜨려 정병을 잡고 있다.
 

금강산 굴불사지 사면석불은 통일신라 8세기 전반에 조성됐다. 서면 불상 3.51m, 좌협시 보살상 2.92m, 우협시 보살상 2.49m.
금강산 굴불사지 사면석불은 통일신라 8세기 전반에 조성됐다. 서면 불상 3.51m, 좌협시 보살상 2.92m, 우협시 보살상 2.49m.

굴불사지 사면불상과 같이 산기슭의 큰 바위 면에 상당한 기간에 걸쳐 새겨진 다양한 불교 존상은 남악 남산(함월산)의 탑곡 마애존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거대한 바위 네 면의 불교 존상들은 7세기 중엽부터 8세기 말까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북면의 구층탑, 칠층탑, 불좌상, 동면의 불좌상, 비천상, 승려상, 남면의 불삼존상, 승려상, 서면의 불좌상 등 불탑, 불상, 승려상, 비천상 등 다양한 도상이 바위 면에 표현되어 있다.

이들 도상은 같은 배경 속에서 조성되었다는 어떤 증거도 찾을 수가 없으며, 심지어 같은 시기인 7세기 중엽에 조성된 북면과 동면의 도상마저도 연계성이 없어서 토속신앙과 관련된 바위에 당시 왕경 경주에서 유행하던 불상, 불탑, 선관 수행의 승려상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불교체기에 조성된 오악의 불상들은 특정한 경전과 관련될 가능성은 적으며, 당시 신라에서 유행하던 것을 바위 면에 새긴 것으로 보인다. 선도산 아미타불삼존상과 같이 도상적인 특징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굴불사지 사면불상과 탑곡 마애존상과 같이 다양한 도상이 어우러진 모습도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 오악의 불상은 산신 제사가 이루어지던 신성한 장소(바위)에 조성된 것으로서, 불상이 신라에서 어떻게 토속신앙과 어울리면서 자리 잡고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고 하겠다.

[불교신문3581호/2020년5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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