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세속을 여의지 않으나 세속이 산을 여의니 법이 이곳에 머물다
산은 세속을 여의지 않으나 세속이 산을 여의니 법이 이곳에 머물다
  • 박부영 주필
  • 승인 2020.05.08 16:02
  • 호수 3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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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창간 60주년 특별기획’
[伽藍과 뫼] ⑧ 속리산과 암자들

법주사를 중심으로 문장대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중심에 
탈골암 복천암 상환암 상고암 관음암 중사자암이 있고 
그 반대편 북가치에서 여적암 법기암 봉곡암이 
법주사 큰 절에 동암과 수정암이 있다. 
법주사를 지나 복천암으로 향하는 길은 별천지다. 
끝없이 우거진 숲과 그 옆을 흐르는 계곡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과 끝을 알 수 없는 기나긴 산길 만으로도 
마냥 행복하고 세상사를 잊게 한다. 
부스럼 병으로 고통 받던 세조도 신미대사를 찾아 
복천암 가는 이 길에서 가려움을 잠시 잊지 않았을까? 
일요일 늦은 오후인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바이러스로 인해 두 달여 동안 갇혔다가 해방된 사람들이 무리 지어 
행복한 얼굴로 석양을 뒤로 하고 법주사 쪽으로 사라졌다. 

속리산 아래를 바라보며 가부좌한 스님의 머리 위에 새가 앉아 덩달아 화두 삼매에 들었다. 세속을 여읜 세상에서나 가능한 모습이다.
속리산 아래를 바라보며 가부좌한 스님의 머리 위에 새가 앉아 덩달아 화두 삼매에 들었다. 세속을 여읜 세상에서나 가능한 모습이다.

 

◇ 불교색 뚜렷한 속리산

세속을 여읜(俗離) 산이다. 신라 후기 대 문장가 최치원이 이렇게 읊었다. ‘도불원인(道不遠人) 인원도(人遠道), 산비속리(山非俗離) 속리산(俗離山)’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으나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은 세속을 여의지 않으나 세속이 산을 여읜다.’ 

헌강왕 12년(886) 법주사와 속리산 암자를 둘러보고 읊었다는 시다. 속리산처럼 불교색채를 분명하게 드러낸 산이 흔치 않다. 무등(無等), 지리(智異), 오대(五大)도 불교에서 가져온 이름이지만 설명이 필요한 반면 세속을 여의는 것은 두 번 설명이 필요 없다. 불교가 속세와 멀리 떨어져 고독과 고행을 자처하는 수행자의 종교임을 세상이 다 안다. 

속리산을 가면 왜 그 이름을 붙였는지 저절로 고개 끄덕인다. 속리 외에도 구봉, 광명, 지명, 미지, 형제, 소금강, 자하 등 여덟 개의 이름을 가졌지만 아는 사람도 없고 관심도 없다. 높은 봉우리가 9개 있다 하여 구봉산이라는 정도만 등산객 사이에 오르내린다. 속리산이라는 이름이 주는 강렬한 어감과 산세와 그 주변 지형을 정확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리라.

산은 아주 깊은 곳에 숨었다. 산 정상은 온통 우람한 바위 일색이고 골도 깊다. 그러나 어디 속리산만 험하랴. 험하기로 치면 설악산이 제일이며 크고 장엄하기로는 지리산이 으뜸이다. 찾아가는 길도 어렵다. 지금은 터널이 뚫려 어렵지 않게 속리산으로 들어가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창자 마냥 꼬불꼬불 얽힌 말티재를 타고 올라야 했다. 수백 마리 말이 이끄는 것보다 더 힘 좋은 차도 말티재에서는 숨을 헐떡였다. 화양계곡에서 찾아가는 길은 좁아서 힘들다. 어느 곳에서 가든 찾아가기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 보람이 크다. 말티재를 어렵게 오르면 넓은 평원이 펼쳐지고 그 끝에 속리산이 장엄하게 맞이한다. 어렵게 올라온 끝에 찾아오는 환희에 눈물이 절로 나고 탄성이 솟는다. 번뇌 가득한 세속을 떠난 안양이 바로 이와 같을 것이다. 번잡한 차안(此岸)을 떠난 피안(彼岸)이 바로 여기다. 그래서 속리(俗離)는 유토피아이며 샹그릴라다. 

백두정맥의 중앙 태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은 강원도에서 남서로 뻗어 흐르며 충북과 경북 전북과 경남의 경계를 이룬다. 소백산맥 줄기 가운데에 속리산이 솟았다. 충북 보은과 경북 상주에 걸쳐 있다. 속리산에서 가장 높은 산은 1058m의 천왕봉이다. 그 다음이 문장대다.

탐방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코스는 법주사에서 문장대로 오르는 8km가량 거리다. 어디로 오르든 출발은 법주사 아래 세심정이다. 세심정에서 복천암을 거쳐 문장대로 가거나 상환암을 거쳐 천왕봉으로 오른다. 혹은 세심정에서 상고암으로 직진해서 비로봉으로 갈 수도 있다. 

속리산 이름이 불교에서 나왔듯 산에서 가장 높이 솟은 봉우리 이름도 불교에서 나왔다. 천왕봉 비로봉 길상봉 문수봉 보현봉 관음봉 묘봉 수정봉이 그렇다. 봉우리보다 낮은 넓적한 바위로 이뤄진 대(臺)는 봉우리와 달리 도교나 유교에서 따왔으니 아마 후대에 지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법을 청하는 청법대 외에 글을 읽는다는 뜻의 문장대를 비롯 신선대 학소대 봉황대 등이다. 식물이 자라기 어려운 바위와 바위가 오랜 세월 깎이고 부서져 생긴 마사토(磨砂土)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흙이 흘러내리지 못하게 온 산을 대나무가 휘감은 척박한 땅이지만 물이 많으니 곳곳에 암자다. 
 

상환암 전경.
상환암 전경.

◇ 세조가 기도 후 환희심 냈다는 상환암

세심정 휴게소에서 오른편으로 가면 상고암과 상환암 가는 길이다. 맑은 물이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른다. 나무 다리를 건너는데 해는 벌써 뉘엿 넘어간다. 부처님오신날을 며칠 앞둔 4월26일 일요일 상환암에서 하루 밤 지내는 행운을 얻었다. 세심정 휴게소에서 1km가 안되는 짧은 거리이지만 경사가 가파르다. 

암벽과 암벽 사이에 상환암이 있다. 그 옆은 폭포다. 물 흐르는 소리가 요란하다. 상환암은 본전 격인 원통보전을 중심으로 그 옆에 종무소로 사용하는 관음전이 있으며 그 위에 산신각이 있다. 원통보전 현판에 월산 이름이 뚜렷하다.

세조의 맏손자이지만 당대 최고 실력자 한명회에 밀려 동생 성종에게 왕위를 빼앗긴 월산대군 글씨라고 한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이곳에 왔을까? 아니면 왕의 살아있는 형인 탓에 사람을 떠나 자연을 떠돌아야했던 월산의 발이 여기 까지 닿았던 것일까? 

원통보전 아래는 요사채다. 2층으로 된 요사채는 방사와 공양간이 있다. 환경부에서 세운 외부 화장실이 있다. 바위 틈 아래 겨우 난 공간을 밭으로 꾸며 채소를 키운다. 

바위틈에 간신히 세운 암자이지만 천년 고찰이다. <보은군지>에 따르면 신라 성덕왕 19년(720) 의신조사가 창건했다. 의신조사는 법주사를 창건한 인물이다. 처음에는 길상암(吉祥庵)으로 불렸다고 하니 법주사 창건과 연관 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 건국 전인 1391년(고려 공양왕 3년) 이곳에 와서 백일기도를 드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세조(1455~1468)가 한글창제 주역 신미대사를 만나기 위해 복천암에 들렀다가 길상암에 올라 7일 기도를 올리고 환희심이 일어나 절 이름을 상환암(上歡庵)으로 바꿨다.

이성계가 남원에서 왜구를 격퇴하고 곧바로 수도 개경으로 들어가지 않고 임실의 한 절에서 백일기도를 올리고 절 이름을 상이암(上耳庵)이라 했는데, 하늘로부터 군왕의 도리를 들었다는 뜻이다. 할아버지의 영험담을 세조도 알았나 보다. 

1960년도 초반 법성스님이 주불전과 요사채를 신축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낡고 쇠락했다. 아무도 부임하지 않으려는 아란야였다. 그러나 2014년 현 주지 도암스님이 부임하면서 중창불사가 일어났다. 선원 수좌로 좌복에 앉아 화두 참구했던 도암스님은 본 절 주지 스님의 청을 받아 상환암에 부임했다.

하루도 지내기 어려운 고행처였다. 스님은 3년여를 고군분투하여 도량을 일신했다. 사람 한명 간신히 서있을 정도의 좁은 공간에 자재를 어떻게 날랐을지, 삭도도 없는 이 곳에 부식은 어떻게 조달하는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스님의 법력 말고 설명할 길이 없다. 
 

상고암 전경.
상고암 전경.

◇ 속리산 중심 비로봉 아래 아늑한 상고암

등을 달고 기쁜 마음으로 천왕봉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다시 오르막이다. 계곡을 따라 오르락 내리락 하다 어느새 계곡이 저 멀리 사라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상고암과 천왕봉이 나뉘는 길목이 나왔다. 오는 길 내내 키 작은 대나무가 속리산을 뒤덮은 광경을 보았다.

대나무는 이 곳 뿐만 아니라 속리산 전체에 걸쳐 뿌리 내렸다. 우후죽순(雨後竹筍), 봄날 비가 온 뒤 무서운 번식력으로 대나무는 삽시간에 퍼져나간다. 튼튼한 뿌리를 땅에 박고 뻗어나가니 다른 식물이 살 수가 없다.

대나무가 주인행세 하는 산에서 푸르름과 의연함을 잃지 않는 유일한 존재는 소나무였다. 한 그루 한 그루가 모두 곧고 굵으며 싱싱했다. 군락을 지어 사는데 번식력 강한 대나무에 밀리지 않도록 서로 뭉쳐있는 듯 보였다. 

대나무 밭을 지나니 소나무가 둘러선 곳에 부도가 한 기 서있다. 조성한지 얼마 안된 듯 하다. 부도 뒤로 등이 걸려 있어 따라가니 굴법당이다. 그 앞에서 합장 반배하고 상고암으로 갔다. 길모퉁이를 돌아서는데 환한 빛이 서려있다. 서둘러 올라가니 넓은 공간이 나온다. 속리산에서 이 곳 처럼 넓고 아늑하며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쬐는 곳을 보지 못했다. 그토록 세차게 불어대던 바람 마저 비켜갔다. 

상고암(上庫庵), 이름 그대로 자재를 쌓아두던 절이다. 중하(中下) 두 곳은 폐찰되고 상고암만 남았다. 상고암 역시 상환암과 같은 성덕왕 19년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주지 스님에 따르면 이 절 역시 처음에는 길상암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상환암처럼 법주사 창건과 맞닿아 있다.

법주사 창건 당시 목재를 보관하는 창고여서 상고암이라고 했다고 한다. 절 입구에 마애불이 눈길을 끈다. 자연암벽에 상하 2단으로 6구의 불상을 새겼는데 하단 4구는 사천왕상이고 상단은 관음보살이다. 맨 오른쪽 불상은 후대에 새긴 듯 하다. 

약사전에 참배 하고 나와 콸콸 샘솟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시원하게 솟아나는 물이 피로를 싹 잊게 했다. 주지 스님이 나와 반겨 맞아주었다. 지난해 11월 부임한 주지 스님은 2000년에 이곳에서 출가했다. 연로한 은사 스님이 큰 절로 가고 포교원에서 포교국장으로 소임을 살던 스님이 대를 이었다. 서울과 산중 암자 중 어느 곳이 좋으시냐는 질문에 스님은 “서울은 서울대로 산중은 산 중대로 좋다”고 하신다. 
 

문장대에서 바라본 천왕봉 비로봉 입석대 일원.
문장대에서 바라본 천왕봉 비로봉 입석대 일원.
천년송.
천년송.

주지 스님의 안내를 따라 전망대로 갔다. 속리산이 전부 한 눈에 들어온다. 정면에 관음암이 보이고 그 옆으로 문장대 경업대 입석대 등 봉우리가 줄줄이 서있다.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새가 한 마리 날아오더니 스님 머리에도 앉고 손 위에도 앉는다. 인적이 드물고 짐승마저 살기 어려운 환경이다 보니 새도 외로운지 사람을 친구 삼는다. 누구나 가까이 가면 앉아서 재롱을 피운다. 

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속리산의 중심은 이곳 상고암이다. 스님은 “높이로 치면 천왕봉이 가장 높고 그 다음이 문장대지만 산의 중심은 높이가 아니고 산세와 형세로 정한다. 산의 기운이 한 군데로 모이는 바로 그곳이 중심인데 상고암 뒤쪽 비로봉이 속리산에서는 중심이다.”

스님은 그 근거로 비로봉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스님들은 옛날부터 산의 중심 되는 봉우리를 비로봉이라고 지었다. 모든 곳에 계신 비로자나부처님, 법신불(法身佛)을 중심되는 봉우리에 붙였다”고 말했다.

절 아래로 가니 잘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맞이한다. 천년송이다. 굵고 쭉 뻗은 몸통에서 사방으로 가지가 뻗어가 마치 공작 날개처럼 활짝 폈는데, 가지가 웬만한 소나무 몸통 보다 굵다. 더 놀라운 것은 나이가 많은데 젊은 소나무처럼 윤기가 흐르고 싱싱하다. 

상고암에는 공양주 보살도 없이 스님 혼자 수행한다. 터가 넓어 농사지을 공간도 없지만 흙이 마땅치 않다. 바위가 마모돼 흙으로 변해 물이 그래도 빠지고 찰기가 없다. 그래서 보은까지 내려가서 흙을 구해와야 한다.

흙 뿐 아니라 모든 생필품을 세심정에서부터 지게로 져 나른다. 신도들이 오면서 필요한 물품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대부분 스님 몫이다. 상고암 뿐만 아니라 상환음 관음암 등 모든 암자가 똑같다. 북한산 도봉산을 비롯한 많은 산이 삭도로 운반하는데 속리산은 그 마저도 없다. 전부 스님이 지게로 운반한다. 
 

스님이 짐을 지고 오르는 모습.
스님이 짐을 지고 오르는 모습.
상고암에서 바라본 관음사.
상고암에서 바라본 관음사.

◇ 임경업 장군 이야기 담긴 경업대

스님과 작별인사하고 다시 발길을 옮겼다. 천왕봉 쪽으로 다시 걸어간다. 가다가 비로봉에서 좌측으로 휘돌아가면 문장대로 가는 길이다. 산 능선은 경사가 심하다. 바람도 거세게 불었다. 경치는 최고였다. 상주 방향 산이 끝없이 이어졌다. 오후가 되자 문장대 방향에서 등산객이 한 두명 보인다. 

경업대 아래가 관음암이다. 스님들은 능선이 아닌 상고암에서 곧장 계곡으로 내려서서 다시 관음암으로 오르는 지름길을 만들었는데 가파르고 위험해서 인적이 끊겼다. 대신 짐승이 그 길을 오간다. 덕분에 희미한 자취가 남아있다. 

속리산 정 중앙에 위치하여 관음보살이 상주하는 도량이라 하여 관음암이다. 663년(문무왕 3)에 회월(晦月)이 창건하였다 하니 산중에서 가장 오래된 셈이다. 창건주 회월스님은 60세에 암자를 창건하여 168세에 입적하였다고 전한다. 그 비결이 아침에는 새벽공기를 마시고 낮에는 솔잎을 먹으며 저녁에는 관음암 장군수(將軍水)를 마신 때문이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임경업(林慶業)장군이 7년 동안 수도한 경업대, 용의 양쪽 눈에 해당하는 용안수(龍眼水)인 장군수와 생명수, 속리산 제1경 입석대 등이 주변에 있다. 임경업과 관련한 전설이 많다. 지금은 스님 혼자 수행 한다. 

다시 발걸음을 문장대 방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음식점이 있다. 속리산에는 술과 간식을 파는 음식점이 아직 남아있어 오가는 등산객의 발길을 잡아 이끈다. 국립공원 지정 이전부터 있어서 가능하다고 어느 산장주인이 귀띔했다. 법을 청한다는 의미의 청법대를 지나 계속해서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문장대다. 법주사에서 문장대로 이어지는 길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코스라 평일인데도 사람이 꽤 많았다. 
 

중사자암.
중사자암.

문장대에서 계단을 한 참 내려오면 문수봉 아래 작은 암자가 나온다. 중사자암이다. 문장대 아래 원래 상사자(上獅子)·중사자·하사자 등 세 암자가 있었는데, 상사자암과 하사자암은 약 90여 년 전에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이 암자 역시 상환암 상고암처럼 성덕왕 19년(720)에 창건했다고 전한다. 

조선 세조가 암자에서 기도한 이래 줄곧 왕실 원당으로 번창했으며 조선시대 몇 백 년 동안 도총섭(都摠攝)이 머물던 호국도량이기도 하다. 6·25전쟁 때 소실돼 폐허이던 것을 1957년 10월에 중건했다. 문수보살이 항상 머무는 문수도량(文殊道場)이니 사자암 이름과 맞닿는다.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바로 정(定)으로 혜(慧)를 닦는 스님이다. 그 상징이 사자이니 문수보살은 사자를 타고 호령하며 스님은 사자후(獅子吼)로 세상을 일깨운다. 
 

복천암.
복천암.

◇ 신미대사 한글 창제 내력 밝힌 복천암

음식점을 하나 더 지나면 속리산을 거의 벗어난 셈이다. 조금 더 내려가면 복천암(福泉庵)이다. 이름에서 보이듯 물이 좋은 곳이다. 세조사 속리산에 들른 이유가 복천암 물로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라는데서 보듯 최고의 물이다. 가는 길에 석축과 부재가 널려있다. 오래된 절터로 보인다. 

복천암 역시 속리산 다른 암자처럼 신라 성덕왕 19년 창건했다고 전한다. 복천암은 왕조와 인연이 많다.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속리산에 들어왔다가 복천암에서 아예 살다시피했다. 극락전에 무량수(無量壽)라는 편액을 친필로 써서 내렸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조선 세조는 이 곳에서 신미(信眉).학조(學祖).학열(學悅) 스님 등과 함께 3일 동안 기도를 드렸다. 세조는 물 좋다는 곳에는 다 들러 복천암에 온 뒤 상원사로 가다 피부병이 나았다. 복천암물이 낫는데 한 몫 했을 것이다. 

더 유명한 것은 신미대사다. 영화 ‘나랏말싸미’에서 다뤄 유명해진 신미대사가 복천암에 주석했다. 그 제자 학조대사가 스승이 만든 한글 보급에 앞장섰다. 세종과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를 이끌었다면 학조대사와 세조는 한글 보급 공신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불쾌해진 기독교인들이 나서서 영화를 막내리게 했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 어디 한글 창제 뿐인가? 임진난에 백성과 왕조를 구하기 위해 목숨 바친 수많은 의승군들도 묻혔다. 

숨은 역사를 되살려낸 분이 복천암 월성스님이다. 세종은 복천암에 있던 신미스님을 불러들여 한글 창제 중인 집현전 학자들에게 범어의 자음과 모음 체계를 설명케 했다는 내용이 복천암 사적비에 기록되어 있다. 세종은 신미대사의 공로를 인정하여 한글이 반포된 후 암자에 미타삼존상을 조성 봉안케 하였으며, 문종은 혜각존자라는 호를 내렸다.

이러한 사실을 모두 월성스님이 밝혀냈다. 스님은 신미스님의 속가 집안인 영산김씨 족보를 뒤져 신미스님이 집현전 학자로 세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는 기록을 찾아내기도 했다. 영화 ‘나랏말싸미’는 모두 월성스님의 노력과 연구에 힘입은 작품이다.
 

학조대사와 신미대사 부도.
학조대사와 신미대사 부도.

◇ 근대 선객들 역사 품은 호서제일선원과 대휴선원 

복천암 경내로 들어가면 정면에 호서제일선원(湖西第一禪院) 현판이 걸려있다. 근대 이후 복천암은 말 그대로 최고 선원이었다. 1882년 경허스님이 복천암을 다녀 간 이래 1913년 법주사 선원으로 잠시 문을 열었다가 1922년 동산스님이 복천선원에서 하안거를 나면서부터 유명해졌다.

전강스님이 조실을 맡아 납자들을 제접하고 성철 청담스님이 하안거를 났다. 그 때가 1930, 40년대다. 두 스님의 구도열이 하도 높아 당시 보은 군수가 성철스님을 친견코자 했으나 스님이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6·25 때 폐원됐던 선원을 1967년 금오스님이 전통을 이어 선원을 개설했다. 

절 입구 해우소 뒤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부도 2기가 나온다. 신미대사와 제자 학조대사 부도다. 부도를 지나 산 아래로 내려가면 상고암에서 오는 길과 만난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데 이제 알에서 깨고 나온 독사새끼가 돌 틈에 숨어 꼼짝을 않는다. 세상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인지 모른다.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애처로워 얼른 피해주었다.

세심정 휴게소를 가니 스님이 지게를 지고 산을 오를 채비를 하고 있었다. 상고암 스님이다. 복천암 위에서는 관음암에서 수행하는 스님이 짐을 지고 있었다. 해는 넘어가는데 언제 상고암에 도착할지, 암자에서는 또 저녁을 지어야한다. 상고암 스님과 두 번 째 작별을 했다. 

법주사 못 미쳐 오른 편 산으로 1km 가량 오르면 탈골암(脫骨庵)이 나온다. 차가 다니는 포장도로가 나있어 왕래는 편하다. 비구니스님이 공부하는 대휴선원(大休禪院)으로 유명하다. 사적비에 따르면 탈골암 역시 신라 성덕왕 시절에 창건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김알지가 닭의 부리를 벗지 못하다 이곳 약수를 마시고 부리를 벗고 사람 입을 얻었다는 데서 탈골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전하고 또는 진표율사가 번뇌의 골수를 벗어버리고 해탈 경지를 얻어 탈골이라 명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늘날의 암자로 다시 일으키고 선원을 연 것은 비구니 영수스님과 상좌 혜운스님의 원력 덕분이다. 약사여래상이 봉안된 작은 암자를 1967년 영수스님이 주석하며 상좌 혜운스님과 함께 1968년 선원을 개설했다. 조실 월산스님이 대휴선원이라 이름 지었다.

화재로 불탄 것을 대대적으로 불사에 착수하여 1995년 다시 낙성하여 대휴선원을 다시 열었다. 대휴(大休), 크게 쉼이니 곧 적멸(寂滅)이다. 번뇌의 불이 꺼진 니르바나, 수행자가 가고자 하는 최종 목적지다.

법주사로 내려가는데 이번 취재에 동행한 박종우 생명나눔실천본부 홍보위원장이 속리(俗離)라는 이름을 이렇게 해석한다. “속은 우리 말로 안이다. 안은 물이 모여 곡식이 자라고 사람이 사는 아늑한 공간이다. 그런데 속리산은 악산인데다 터가 좁아서 물이 모여도 들(野)을 이룰 수 없어 사람이 살기 어렵다. 그러므로 속을 떠난 산이다” 그럴싸한 해석이다. 

속을 떠난 척박한 곳이 법이 머물 곳(法住)이니 그 뜻풀이가 참으로 명쾌하다.
 

법주사 전경.
법주사 전경.

➲ 법주사는…

사적 명승지 유네스코 지정 가람
천년 역사 수많은 성보 간직

법주사는 미륵도량이다. 금산사를 중창하여 미륵이 다스리는 용화세계를 구현했던 진표율사가 중창한 곳이 법주사다. 용화세계는 미륵을 자처했던 패왕의 말처럼 천지개벽이나 후천세상이 아니라 참회하고 선을 행하는 자비와 지혜로 만드는 사람의 세상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진표율사는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에 들러 길상초가 난 곳을 표해 두고 바로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사(鉢淵藪寺)를 창건하고 7년 동안 머물렀다. 진표율사가 그 후 금산사와 부안 부사의방에 가서 머물 때 속리산에 살던 영심(永深)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이 와서 진표율사에게서 법을 전수 받았다.

진표율사가 길상초 난 곳을 찾아 절을 세우고 중생을 구제하고 후세에 유포하라는 교법을 내려 스승을 따라 절을 세웠다. 진표율사의 법을 이은 덕분에 금산사와 법주사는 닮았다. 두 곳 다 금오스님의 상좌들이 법을 잇고 있으니 천년의 역사가 오늘에 까지 이어지는 셈이다.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법주사라 이름하고 성덕왕 19년(720)에 중건했다. 속리산 암자 창건이 모두 이 때에 닿는다. 임진왜란 때에는 법주사가 충청도 지방의 승병 본거지였다. 이 때문에 법주사와 산내 암자가 모두 소실됐다. 인조 4년(1626) 벽암각성(碧岩覺性) 선사가 중창했다. 

현대에도 속리산과 법주사는 무사하지 못했다. 산이 깊고 넓은데다 산맥 가운데 있어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기에 좋아 해방 후 6·25까지 토벌대와 빨치산이 싸우는 전쟁터였다. 암자도 피해가지 못했다. 대부분 암자가 6·25 때 전소돼 오랫동안 방치됐다가 법주사 스님들의 원력에 힘입어 하나씩 복원돼 오늘에 이른다. 

법주사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명찰답게 국보와 보물이 다수다. 임진왜란 뒤 불탄 법주사를 중창하면서 사명대사가 중건한 팔상전을 비롯하여 쌍사자 석등, 석련지 등 3점의 국보에다 13점의 보물과 시도유형문화재 20건을 소장하고 있다. 법주사와 속리산 법주사 일원이 사적과 명승으로 지정돼 있으며 산지가람으로 유네스코 지정을 받았다.

보은=박부영 주필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3580호/2020년5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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