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 부처님 마음으로 첫 걸음 떼어볼까요?”

깨달음 추구 ‘칠각지’ 수행
첫걸음 ‘심신 알아차림’부터
선택 정진 기쁨 가뿐함 집중…
성불까지 열심히 닦겠다 의지

일곱걸음에 깃든 성불 약속
꾸준히 실천하면 부처님처럼…

이미령
이미령

4월 초파일은 세상 모든 생명체의 행복을 위해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어머니 마야왕비의 태를 빌려서 사바세계에 오신 이래 부처님은 일평생 길을 걸으셨습니다. 길 위에서 태어나 길을 걸어 사람들을 만나고 길 위에서 반열반하신 부처님의 삶은 정주(定住)보다는 유행(遊行)의 삶이었습니다.

이렇게 걸어가시는 부처님의 삶은 룸비니동산에서 이미 예고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부처님 탄생설화에서 한결같이 아기 부처님이 태어나자마자 바로 일곱 걸음을 걸었다고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갓 태어나서 걸은 걸음이 일곱이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왜 일곱 걸음일까요? 세 걸음도 있고, 다섯 걸음도 있고, 꽉 찬 숫자인 열 걸음도 있는데 말이지요. 부처님의 일대기를 가장 자세하고 풍성하게 그려내고 있는 <대불전경>에 따르면 아기 부처님의 일곱 걸음은 칠각지(七覺支) 수행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칠각지는 깨달음(覺)에 이르게 하는 일곱 가지(七支) 수행덕목입니다.

이 일곱 가지를 부지런히 닦아야 깨달음을 향한 궤도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지요. 룸비니 동산에서 막 금생의 삶을 시작한 아기 부처님도 오래 전부터 일곱 가지 수행덕목을 부지런히 닦아왔고, 이번 생에도 보리수 아래에서 성불할 때까지 일곱 가지 수행덕목을 열심히 닦겠다는 의지를 일곱 걸음으로 드러낸 것이라 보아도 좋습니다. 그 하나하나를 짚어볼까요?

첫 번째 걸음은 기억, 생각이라는 뜻을 가진 염(念, 알아차림)입니다. 그저 단순히 어제의 일을 기억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현재 또렷하게 나의 몸과 마음상태를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수많은 행동을 합니다. 그리고 마음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각들이 드나듭니다. 너무나 많은 생각들이 쉬지 않고 드나들어서 심지어는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더라’하며 스스로 어리둥절해질 때가 자주 있습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내 마음이 온 세상을 마구 돌아다니질 않나, 예전에 누군가와 싸워서 불쾌했던 일도 불쑥 떠오르는 바람에 다시금 상대방과의 갈등을 이어갑니다.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건만 마음속은 생각지도 못한 잡념으로 가득 차고, 그런 가운데 무심코 하는 동작이나 행위에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불러오기도 합니다. 진정 내가 지금 이 현재의 주인으로서 충실히 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맞을까요? 

부처님은 바로 이런 점을 우리에게 짚어줍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고 싶다면 지금 무슨 동작을 하고 있는지, 어떤 느낌을 느끼고 있는지, 무슨 생각이 마음에 차있는지를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타성에 젖어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팔다리, 늘 품고 지냈던 감정의 표출은 나를 예전의 그 볼품없고 어리석은 나에서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그러려면 지금 나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잘 알아차리라는 것이지요.
 

불자들은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부처님께서 사바세계에 오신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긴다. 사진은 아기 부처님을 목욕시키는 관불 의식을 갖고 있는 어린이들. 불교신문
불자들은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부처님께서 사바세계에 오신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긴다. 사진은 아기 부처님을 목욕시키는 관불 의식을 갖고 있는 어린이들. ⓒ불교신문

두 번째 걸음은 선택(擇法)입니다. 내가 조금 더 가치 있게 살 수 있도록 안내하는 진리,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법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오늘 할까, 내일 할까? 이것을 살까, 저것을 살까? 할까, 하지 말까? 먹을까, 말까? 마음의 갈등은 단 한 순간도 우리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나와 다른 이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이런 일을 할까(선업), 설령 그게 잘못됐더라도 그저 나만 챙기면 그만이니 저런 일을 할까(악업)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그것은 그의 자유입니다만, 그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에 대한 책임 역시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잊지는 말아야겠지요. 부처님은 나도 행복하고 이웃과 세상도 함께 행복해질 수 있도록 진리의 길과 바른 신앙의 길을 잘 선택하기를 권합니다. 

세 번째 걸음은 정진(精進)입니다. 바른 길을 선택했다면 묵묵히 꾸준히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오늘 선업을 지었으니 내일은 쉬자고 해서도 안 됩니다. 그건 부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뼈를 깎는 노력 끝에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단 한순간의 잘못으로 세상의 지탄을 받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소식이 뉴스에 종종 나옵니다.

“내가 이 정도 이뤘는데…” 라는 생각이 교만을 불러오고 정진하지 않고 나태한 생각이 자리 잡는 순간 패착을 두는 것이지요. 그래서 꾸준히 노력한 사람의 마음에는 ‘이만 하면 됐다’라는 제한을 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한을 두는 순간 피로감이 몰려오고, 피로감이 몰려오면 한순간에 방일로 흐르기 쉬운 것이 보통 사람입니다. 공든 탑을 무너뜨리지 않으려면 정진 또 정진 말고는 길이 없습니다.

네 번째 걸음은 기쁨(喜)입니다. 마음에 가득 차오르는 환희심이지요. 경전의 마지막에는 늘 “환희봉행하더라” 또는 “환희용약하였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바른 길을 걸어가고 가르침을 잘 실천하면서 마음에 기쁨이 차오르는 일입니다. 기쁨은 우리를 더 좋은 사람으로 거듭 나게 하고, 나와 이웃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줍니다. 

그런데 아무리 절에 다니고 불교공부하고 봉사활동을 해도 기쁘기는커녕 자꾸 우울해지고 화가 난다면 그때는 잠시 멈추고 내 마음을 돌아봐야 합니다. 막연히 “내 마음공부가 모자라서”라며 자기 탓을 하기 보다는 무엇이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그 이유를 가만히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파악했다면 잘 대처하고 해결하는 데에 에너지를 쏟아야겠지요. 기쁨으로 사는 삶이 신앙생활이고 수행이 아닐까요?

다섯 번째 걸음은 가뿐함(輕安)입니다. 이 가뿐함은 몸의 기쁨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마음이 즐거워지면 몸도 따라서 가벼워집니다. 몸이 가볍다는 것이 경거망동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몸이 축 처지는 경우를 상상해보시지요. 단순히 기운이 나지 않는 차원을 넘어 마음마저 가라앉고 또다시 불쾌감이나 분노, 원망이 비어져 나옵니다. 밝고 기운차게 행동하려던 마음이 어느 사이 사라지고 무기력과 짜증에 휩싸입니다.

따라서 수행한다는 것은 몸마저도 가뿐해지기 위해 우리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하면 몸이 가뿐해질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마음에 켜켜이 쌓여 있던 감정들을 하나씩 덜어내야 하는데, 그러려면 내가 무엇에 그토록 휘둘리며 지내는지를 잘 따져봐야 합니다. 나를 잘 살펴서 마음에는 기쁨을, 몸에는 가뿐함을 유지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바로 이런 몸과 마음의 상태가 나를 지혜 앞으로 데려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섯 번째 걸음은 집중(定)입니다. 마음이 정신없이 날뛰지 않고 한 가지 대상에 잘 집중하는 것입니다. 참선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집중을 잘 한다는 뜻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일상에서 크고 작은 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일곱 번째 걸음은 담담함(捨)입니다. 평온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삶은 바람 부는 벌판입니다. 이득과 손해, 명예와 폄훼, 칭송과 비난, 즐거움과 괴로움이라는 바람이 한순간도 쉬지 않고 사방에서 제멋대로 불어오는 벌판에서 이런 여덟 가지 바람을 맞으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런 삶에서 흔들리거나 휘말리지 않으면서 담담하고도 평화롭고 평온하게 살아간다면 바로 그 사람이 부처님입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평온함을 내 마음에 부르는 일입니다. 

부처님은 바로 이런 일곱 가지 덕목을 키운 분입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면 막연하고 심오하게만 느껴집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엄두조차 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룸비니 동산에서 아기 부처님은 일곱 걸음을 걸음으로써 우리에게 한 번 마음을 내보라고 권합니다.

알아차림-선택-정진-기쁨-가뿐함-집중-담담함. 이렇게 일곱 걸음을 걸어보는 것이지요. 일상에서 이 일곱 가지를 꾸준하게 실천하고 실현해보면 어느 사이 우리는 보리수 아래에서 진리에 눈을 뜬 부처님이 될 준비를 완벽하게 갖춘 몸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설령 지금은 너무 힘들어 불보살님 앞에 무릎 꿇고 도와달라고 빌지라도 결국 우리는 스스로를 구제하고 나아가 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열고, 세상을 향해 자비의 발걸음을 놓을 존재라는 약속이지요. 룸비니 동산에서 아기 부처님이 아장아장 걸으신 일곱 걸음에는 이와 같은 성불의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불기 2564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서 우리, 첫 번째 걸음부터 떼어보기로 할까요? 

[불교신문3580호/2020년5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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