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 중엽 신라 스님들은 경주 남산서 참선수행”

남산, 신라 불교성지로 신성시
선관수행처 상징 존상 전해져
불곡 감실 고부조 승려상 비롯
탑곡 마애존상서도 조각 확인

장창곡 석조미륵불삼존상서
미륵상 선관수행 연관 짐작

중국 장안으로 떠난 구법승
북주 수나라 때 조성된 불상
이운해오거나 그려왔을 것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장창곡 출토 석조미륵불의좌상과 협시보살상이다. 신라 7세기 중엽에 조성됐으며 불상 높이 167cm, 보살상 높이 99~100cm이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장창곡 출토 석조미륵불의좌상과 협시보살상이다. 신라 7세기 중엽에 조성됐으며 불상 높이 167cm, 보살상 높이 99~100cm이다.

7세기 전반, 신라의 반가사유상이 중국 북조(北朝) 불교의 선관(禪觀)수행의 영향에 의해 조성된 것임은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신라 승려들은 실제 중국 승려와 같이 왕경(王京)에서 멀지 않은 조용한 산 속에 들어가 수행하기도 하였다. 신라 왕경의 서남쪽에 위치한 남산(南山)의 북쪽 동·서면 계곡에는 이곳이 신라 승려들의 선관 수행처였다는 것을 알려 주는 불교 존상들이 남아 있다.

사원에 봉안하여 선관의 대상으로 삼았던 반가사유상과 달리, 중국의 석굴과 같이 민가의 개와 닭소리가 들리지 않는 한적한 남산을 수행처로 삼았던 흔적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이는 신라 초기의 오악(五岳) 중 남악(南岳)으로서 신성시되었던 남산이 불교 성지화(聖地化)되는 과정, 즉 신불(神佛) 교체의 초기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남산 불곡(佛谷) 감실 속에 고부조로 새겨진 승려상은 이 중 한 예로, 역시 선관수행과 관련되는 중국 서위(西魏)시대의 538년(혹은 539년)에 조성된 돈황(敦煌) 막고굴(莫高窟) 285굴의 감실 속 승려상과 매우 닮아서 주목된다. 덮어 쓴 두건(頭巾) 아래 솟구쳐 올라 온 정수리는 승려상이 상당한 수준의 경지에 오른 수행승(修行僧)을 모델로 한 것임을 알려 준다. 승려상은 둥글고 입체적인 머리와 다소 평면적인 몸과 대좌를 갖추고 있는데, 머리를 살짝 숙여서 수행하고 있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불상이 있는 계곡”, 불곡이라는 이름에서 추측되듯이 승려상에 대해서는 지금도 불상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이 상이 선관수행승이라는 것은 주변 계곡에 새겨진 여러 존의 승려상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즉 탑곡(塔谷) 마애존상 중 7세기 중엽에 새겨진 바위 남면의 감실 속 승려상과 동면의 나무 사이에 앉아 있는 승려상, 불곡과 탑곡 사이의 월정사(月靜寺) 뒷산 바위 면에 새겨진 통일신라시대의 전각 속의 승려상 등은 불곡 주변이 당시 승려들의 선관 수행처였음을 알려 주고 있다. 
 

신라 7세기 중엽부터 통일신라 8세기 후반 사이에 조성됐을 것으로 보이는 탑곡 마애존상. 바위 전체 높이 9m 전후에 여러 존상이 조각돼 있다.
신라 7세기 중엽부터 통일신라 8세기 후반 사이에 조성됐을 것으로 보이는 탑곡 마애존상. 바위 전체 높이 9m 전후에 여러 존상이 조각돼 있다.

탑곡 마애존상은 지금까지 북면에 새겨진 황룡사(皇龍寺) 구층목탑을 연상하게 하는 구층탑(九層塔)과 칠층탑에 관심이 집중됨으로서 남면과 동면의 승려상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다양한 모습의 승려상이 집중적으로 바위 면에 새겨진 것은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으로, 그 조성 배경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들 승려상은 중국 북조의 선관 수행과 연관되는 <선비요법경(禪秘要法經)>(구마라집 한역)과 <부법장인연전(付法藏因緣傳)>(담요 등 한역) 등에 기록된 “수행을 위해서는 깊은 산 속의 바위 틈, 계곡 사이, 나무 아래 등에서 좌선(坐禪)하여 찬바람도 견뎌내는 인내를 가져야 한다”는 내용을 연상시키고 있어서 역시 수행하는 승려의 모습일 가능성이 높다.

불곡과 가까운 장창곡(長倉谷)에서는 석실(石室) 속에서 승려가 보면서 수행했을 법한 석조미륵불의좌상(石造彌勒佛倚坐像)과 석조보살입상들이 출토되었다. 미륵상과 선관수행과의 관계는 신라 승려들이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선관의 대상으로 삼아 수행함으로서 궁극적으로는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나고, 그곳에서 미륵보살의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을 이루고자 한 것을 통하여 알 수 있다. 7세기 중엽에 조성된 장창곡 출토 석조미륵불삼존상도 선관수행이 유행하던 당시의 분위기로 미루어 보아 선관의 대상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불상은 타원형에 가까운 방형 대좌 위에 앉자 두 발을 나란히 내려뜨리고 있다. 오른손은 들어 올려 엄지만 펴고 나머지 손가락은 오므린 상태에서 손바닥을 앞으로 내보이고 있으며, 왼손은 무릎 위에 둔 채 법의 자락을 잡고 있다. 5등신(等身)에 가까운 어린애 같은 신체 비례, 맑고 명랑한 표정, 낮고 편평한 육계, 도식적인 법의 주름 등은 기존의 신라 불상에서는 볼 수 없던 새로운 모습이다.

협시보살상들은 손의 위치와 법의 표현, 장엄 등에서 다소 차이가 있지만 크기와 조형은 거의 같다. 석조미륵불삼존상에서는 조각 후 표면을 다시 갈아 부드럽고 포근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등 진전된 조각 기법도 엿볼 수 있다.
 

신라 7세기 중엽에 조성된 불곡 감실 승려상으로, 전체 높이는 약 150cm이다.
신라 7세기 중엽에 조성된 불곡 감실 승려상으로, 전체 높이는 약 150cm이다.

불상은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환조(丸彫)의 의좌상(倚坐像)으로, 정확한 존명은 알 수 없으나 중국에서 이 자세의 불상이 대부분 미륵불이라는 점은 참고가 된다. 석조미륵불삼존상은 지금까지 일연스님(1206~1289)의 <삼국유사> ‘생의사 석미륵(生義寺石彌勒)’과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에 기록된 남산 삼화령(三花嶺)의 미륵세존(彌勒世尊)에 비정되어 왔다.

즉 석조미륵불삼존상은 선덕여왕 때인 644년에 승려 생의(生義)가 땅 속에서 찾았던 미륵세존(彌勒世尊)이자, 미륵의 현신(現身)이었던 세 명의 화랑, 즉 “삼화(三花)”와 관련된 미륵상들로 인식되어 왔다.

<삼국유사>의 삼화령 미륵세존이 석조미륵불삼존상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한 주의가 필요하지만, 이들 상이 7세기 중엽 신라 승려들의 선관수행의 대상이었음에는 의심할 의지가 없다. 남산 북쪽 산기슭에는 장창곡, 불곡, 탑곡과 함께 미륵곡(彌勒谷)이 있는데, 이곳도 장창곡의 석조미륵불삼존상과 같이 미륵상과 관련된 선관 수행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경주 남산이 7세기 중엽 신라 승려들의 선관 수행처라는 것은 북서쪽 기슭의 선방사(禪房寺) 절터에서 1926년경에 발견된 탑지(塔誌)에서도 확인된다. 탑지는 통일신라시대 9세기 말인 897년(건부 6) 5월15일에 선방사 탑의 보수 사실을 기록한 것이지만, 이곳이 “선방(禪房)”, 즉 참선하는 절이었다는 것도 알려 주고 있다. 

선방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현재 이곳에는 7세기 중엽에 조성된 석조불삼존입상(일명 배동 삼체석불)이 있다. 불삼존상은 정병(淨甁)을 든 좌협시 보살상을 관음보살로 보아 아미타불삼존상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우협시 보살상은 오른손으로 영락(瓔珞) 장식을 가볍게 쥐고 있으며, 왼손으로 연꽃 봉오리를 잡고 있다. 불삼존상은 친근한 미소를 띤 얼굴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장창곡 출토 석조미륵불삼존상과 선방사의 석조불삼존입상 등 7세기 중엽의 남산 초기 불상에서는 기존에 볼 수 없던 5등신의 신체 비례, 중량감이 느껴지는 조형미, 환조의 조각 기법이 확인된다. 이는 <삼국유사>에 “서학(西學)”으로 기록된 중국불교를 배우기 위해 수(隋)나라와 당(唐)나라에 유학했던 신라의 구법승(求法僧)들이 수도 장안(長安, 섬서성 서안)에서 보았던 불상에서도 확인된다. 

진평왕(579~632 재위) 때인 600년(혹은 601년)에 원광(圓光), 605년에 담육(曇育)과 안함(安含, 또는 안홍)은 각각 수나라에서 귀국하였고, 선덕여왕(632~647 재위) 때인 635년경에 명랑법사(明朗法師)와 643년에 자장율사(慈藏律師)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 왔다. 선덕여왕 때에 건립된 분황사(芬皇寺, 634년), 영묘사(靈廟寺, 635년), 황룡사 구층목탑(645년~646년)은 모두 이들 구법승과 관련된다. 이 중 현존하는 분황사 모전석탑(模塼石塔)은 수나라와 당나라에서 유행한 전탑을 모델로 삼아 벽돌 모양으로 깎은 돌로 쌓아 만든 것이다. 

그런데 남산 초기 불상에 영향을 준 장안(長安)의 불상은 당나라 때 조성된 것이 아니라 과거 장안을 수도로 삼았던 북주(北周)와 수나라 불상이었다. 즉 신라 승려들이 유학했던 7세기 전반에 수나라와 당나라에서 불교의 입지는 많이 달랐는데, 수나라 문제(581~604 재위)와 양제(604~618 재위)는 독실한 불교도로서 불상 조성과 보수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당나라 황제들은 건국 초기부터 도교와 유교를 불교보다 우위에 두는 정책을 펼쳐 불교의 입지가 줄어들면서 불상 조성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라의 구법승들이 장안에서 봤던 불상들은 그곳에 전해 오던 북주 불상이거나 수나라 불상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신라 승려들이 귀국할 때 지니고 오거나 그려왔을 법한 불상들도 남산 초기 불상에서 확인되듯이 당나라 불상이 아니라 북주와 수나라 불상이었다.
 

신라 7세기 중엽에 조성된 선방사 석조불삼존입상으로 불상 275cm, 보살상 236cm이다.
신라 7세기 중엽에 조성된 선방사 석조불삼존입상으로 불상 275cm, 보살상 236cm이다.

[불교신문3578호/2020년4월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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