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사유상에 유려한 손짓 섬세한 발가락 보았나요

삼국시대 반가사유상 40여 위
대부분 신라 영역에서 출토돼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은
사산조페르시아 문화 영향 큰
신라서 조성했을 가능성 높아

국보 83호 반가사유상 보관
신선사 마애보살반가사유상
황룡사지 출토 금동보살상과
유사해 신라 작 정설로 여겨

“…먼저 편안히 앉아 있을 곳이 항상 안온하여 오랫동안 방해가 없게 한다. 다음엔 다리를 바르게 해야 하는데, 반가좌라면 왼다리를 오른다리 허벅지 위에 놓은 후 몸 가까이에 끌어당겨서 왼발 발가락을 오른다리 무릎과 나란하게 한다. …”
- <대승기신론소기회본(大乘起信論疏記會本)> 권6

 

국보 제83호 금동보살반가사유상은 신라 7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높이는 90.8cm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국보 제83호 금동보살반가사유상은 신라 7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높이는 90.8cm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대승기신론>을 원효스님(617~686)이 주석한 <대승기신론소기회본>의 내용이다. 승려들이 선관(禪觀)수행할 때 반가부좌(半跏趺坐, 반가좌)로 앉아 몸을 조화롭게 하는 조신(調身)에 대한 설명으로, 반가좌로 앉아 선관(사유)수행하는 반가사유상을 연상하게 한다. 반가사유상이란 대좌에 앉아 오른발을 왼다리 허벅지 위에 올려 반가좌한 다음 오른팔 팔꿈치를 오른쪽 무릎 위에 두고 오른손을 뺨에 댄 채 사유하는 모습을 말한다.

반가사유상은 과거 인도였던 간다라 지방에서 불전(佛傳) 장면의 하나로 쿠샨시대부터 이미 나타나며,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북조의 여러 나라(북위, 동위․서위, 북제․북주)에서 유행하였는데, 중국 남조에서는 지금까지 반가사유상이 발견된 예가 거의 없다. 현존하는 40여 존의 삼국시대 반가사유상은 대부분 신라 영역에서 출토되었으며, 이는 6세기 중반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가 중국의 산동성(山東省)과 연결되는 교통로를 확보하여 중국 북조(특히 북제)와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가능하였다.

신라에서만 보이는 상당한 크기의 반가사유상들은 6세기 후반의 북제 때 유행하였는데, 특히 신라 반가사유상의 공통적인 특징인 허리 양옆에 드리운 띠 장식이 산동성 동남부 지방의 반가사유상에서만 확인되는 것은 북제의 반가사유상이 산동성을 경유하여 신라로 전래되었음을 알려 준다. 
 

신라 7세기 전반에 조성된 양산 출토 금동보살반가사유상의 보관 화불. 높이 27.6cm이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사진=김세영
신라 7세기 전반에 조성된 양산 출토 금동보살반가사유상의 보관 화불. 높이 27.6cm이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사진=김세영

신라에서 유독 반가사유상이 많이 조성되게 된 배경은 명문과 관련 기록이 없어서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반가사유상이 유행하던 7세기 전반에 승려들의 선관수행이 활발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원효스님이 <대승기신론소기회본>에서 선관수행의 자세(조신)의 하나로 반가좌를 언급한 것도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는 신라 반가사유상에 영향을 준 중국 북조에서 선관수행과 반가사유상이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즉 4세기 말부터 승려들은 선관수행을 통하여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나 미륵보살의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였는데, 그들은 선관의 대상으로서 반가좌, 교각좌(交脚坐), 의좌(倚坐)자세를 한 미륵상을 조성하였다. 신라에서도 이러한 영향을 받아 7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선관수행의 대상으로서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조성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 승려들은 반가사유상을 보고(觀) 자신도 같은 자세로 앉아 수행함으로써 결국 도솔천에 태어나 미륵보살의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였다. 이러한 생각의 경전적인 배경은 당시 유행했던 <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을 통하여 알 수 있는데, 다만 경전에서는 반가 자세가 아닌 가부좌한 미륵보살이 설법할 때 많은 화불(化佛)이 나타난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록 가부좌하지는 않았지만 신라의 반가사유상 중에는 경상남도 양산에서 출토된 금동보살반가사유상과 같이 화불이 보관에 나타난 예도 확인된다. 
 

국보 제78호 금동보살반가사유상은 신라 7세기 전반에 조성됐다. 높이 81.5cm이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국보 제78호 금동보살반가사유상은 신라 7세기 전반에 조성됐다. 높이 81.5cm이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신라의 반가사유상을 대표하는 국보 제78호 금동보살반가사유상(78호 반가사유상)과 국보 제83호 금동보살반가사유상(83호 반가사유상)은 출토지가 분명하지 않아 학자들 간에 국적 논란이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다. 두 상의 가장 큰 차이는 78호 반가사유상이 천의(天衣)를 상체에 걸친 반면, 83호 반가사유상의 상체에는 아무 것도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 상이 중국 북조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천의를 걸친 반가사유상이 북조에서 6세기 중엽에 먼저 나타나고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상이 그 이후에 조성되기 때문에 78호 반가사유상이 83호 반가사유상보다 선행하는 형식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두 상은 주조할 때 상(像)의 기본 형태를 이루는 내형토(內型土)의 성분도 다른 것이 확인되었는데, 이러한 보살상의 형식과 내형토의 차이가 조성 시기나 국적 중 어느 것이 원인인지는 단정할 수가 없다. 

78호 반가사유상의 국적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지만, 83호 반가사유상이 신라 작인 것은 거의 정설에 가깝다. 83호 반가사유상은 경주 황룡사지 출토 금동보살머리와 단석산(斷石山) 신선사(神仙寺) 마애보살반가사유상의 보관과 같이 신라의 반가사유상에서만 보이는 세 개의 반원으로 구성된 보관을 쓰고 있으며, 경상북도 봉화에서 출토된 석조보살반가사유상의 법의 자락과 매우 유사한 표현 기법을 보여 준다.

즉 금동보살머리은 오른쪽 턱 아래에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어서 원래 반가사유상의 머리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보관 형식은 물론 맑은 얼굴 표정이 83호 반가사유상과 매우 닮았다. 또한 7세기 후반에 조성된 봉화 출토 석조보살반가사유상은 하체만 남아 있지만 압도적 크기와 역동적인 법의 자락에서 수준 높은 표현을 엿볼 수 있으며, 허리에서 밖으로 접혀진 법의 주름, 하체를 덮고 흘러내린 법의 자락, 연화 족좌(足座) 등은 83호 반가사유상을 돌에다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이 흡사하다. 

한편 83호 반가사유상과 조형적으로 매우 닮은 일본 고류지(廣隆寺)의 목조보살반가사유상은 몽전(夢殿)관음보살입상, 백제관음보살입상 등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 조성된 목조상이 여러 개의 구스노키(楠木)로 짜 맞추어 완성된 것과 달리 하나의 적송(赤松)을 통으로 깎아 만든 것이다.

83호 반가사유상과의 조형적인 유사성, 당시 일본 목조상과는 다른 불상재(佛像材)와 제작 기법에서 이 상을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기록된 신라 진평왕이 622년 혹은 623년에 일본에 보낸 진사(秦寺, 고류지의 전신前身)의 불상, 즉 목조보살반가사유상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추정은 83호 반가사유상이 7세기 전반에 신라에서 제작된 것임을 역으로 입증해 준다. 

83호 반가사유상은 몸에 비해 머리가 약간 크고, 두 팔이 지나치게 가늘고 긴 것을 제외하곤 완벽한 조형이다. 상체는 사유의 이미지와 어울리게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정적인 모습이며, 하체는 상체와 대조적으로 치마 자락이 다리의 굴곡을 따라 활달하게 처리되어 동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반가사유상은 사유에 잠긴 듯한 얼굴 표정, 가늘고 긴 눈과 눈썹, 유려하고 자연스런 오른손 손가락, 오른발 발목을 팽팽하게 감고 있는 법의 주름, 잔뜩 힘이 들어간 오른발 엄지발가락에서 섬세한 표현력을 엿볼 수 있다. 둥글게 도안화된 뒤쪽 머리카락과 엉덩이를 덮고 흘러내린 치마 주름은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대좌는 중앙아시아에서나 볼 수 있는 넝쿨나무로 엮어 만든 의좌를 모델로 하였다. 
 

봉화에서 출토된 석조보살반가사유상은 신라 7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하반신 높이만 180cm에 달하는 거대한 조각이다. 경북대학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사진=김민규
봉화에서 출토된 석조보살반가사유상은 신라 7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하반신 높이만 180cm에 달하는 거대한 조각이다. 경북대학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사진=김민규

한편 78호 반가사유상은 대좌(墩) 위에서 반가 자세를 하고 오른손 손가락을 뺨을 대고서 사유하고 있는 모습이다. 반가사유상은 형식화된 3개의 꽃으로 구성된 보관, 아래쪽 가운데가 뾰족하게 나온 둥근 목걸이, 비천(臂釧)과 완천(腕釧) 등의 팔찌를 착용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바미얀(Bamiyan)석굴의 보살상 그림에서나 볼 수 있는 3개의 꽃 장식을 한 보관, 중앙아시아에서 많이 보이는 넝쿨나무로 만든 의좌를 연상하게 하는 대좌, 중국 북제의 보살상에 보이는 목걸이 형식에서 78호 반가사유상의 도상적인 요소가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 중국 북제와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78호 반가사유상의 상체에는 천의가 걸쳐져 있으며, 하체에는 치마를 입고 있다. 반가사유상에서는 엄숙한 얼굴 표정과 선 위주의 평면적인 법의 주름에서 다소 경직된 분위기가 느껴지지만, 등까지 내려온 갈래 머리와 흘러내린 보관의 관대(冠帶)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유려하게 처리되었다.

반가사유상은 사산조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받은 바미얀 석굴에 보이는 보살상의 보관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 삼국 중에서 사산조 페르시아의 문화적인 요소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 신라라는 점, 상당히 큰 독존 형식의 반가사유상이 고구려와 백제에는 없고 신라에서만 조성되었다는 점 등에서 신라 작일 가능성이 높다.

반가사유상은 안틀과 바깥틀을 사용한 중공식(中空式) 주조법으로 만들어졌는데, 이 방식은 신라에서 7세기 이후에나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조성 시기를 추정하는데 참고가 된다.

한편 7세기 전반에 신라에서 유행한 미륵상생신앙은 삼국 통일의 주역이자 미륵의 현신(現身)으로 여겼던 화랑(花郞)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라에서만 7세기 전반에 상당한 크기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조성되는 것도 화랑의 사회적인 입지가 점점 부각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불교신문3574호/2020년4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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