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 입고 뿔 얹어 남 위해 수고…이류중행하는 보살의 경지”

모순에 찬 당대 현실 ‘개혁’
꿈 통해 새로운 깨달음 얻어

오대혁
오대혁

경주에 살던 박생은 세상에는 천하의 이치가 하나뿐(一理論)이라고 주장하던 유학자였다. 그런데 꿈속에서 남염부주(南炎浮州)의 염라왕을 만나 불교며 유교, 귀신, 이상적 치국관 등의 문제를 문답한다. 꿈을 깬 그는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이웃 사람들 꿈에 신인이 나타나 그가 염라왕이 되었다고 일러준다. <금오신화>의 네 번째 작품인 ‘남염부주지’의 줄거리다.

작품 초반부터 주인공이 유학자임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많은 연구자들은 유학자의 입장에서 불교를 비판한 소설로 보기도 하고, 유교의 기일원론에 따른 역설이라고 하며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허위성을 밝힌 소설로 여기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실상 작품은 그리 단순한 구도로 읽힐 수 없는 여러 장치들을 서사 문맥에 숨기고 있다.

소설의 첫머리에 의심할 바 없이 참된 유학자라 밝히고 있는 박생은 현실 속에서 소외된 존재다. 그는 승보시(陞補試)를 보아 태학관에 올랐지만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못하고 온전히 자신의 사상을 펼치지 못한다. 참된 유학자를 등용하지 않는 당대 사회를 지배하던 자들을 향한 비판이다.

염라왕과 만났을 때는 폭압적인 정치로 백성을 도탄에 빠뜨려서는 안 될 것이고, 왕도(王道)가 민심(民心)에서 비롯되므로 항상 애민의 정치를 해야 한다고 한다. 유학자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유학자 박생을 통해 여실히 보여준다.

염라왕과 박생의 대화에서 보여주는 비판은 불교 자체가 아니라 세속화된 불교에 대한 것이다. 청정함이나 존엄함을 지향해야 할 불교가 복을 빌고 무병장수를 바라는 불사에 매달리던 당대 불교계에 대해 비판한 것이다. 세속 불교의 지옥, 시왕, 윤회 등의 관념으로 현실을 어지럽히는 것은 잘못이라 했다.

그렇지만 유교의 가르침은 정직하여 군자가 따르기 쉽고, 불교의 가르침은 황탄하여 소인이 믿기 쉬운데, “지극한 경지에 이르러서는 모두 군자와 소인들로 하여금 결국 올바른 이치로 돌아가게 하려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문제는 그 가르침을 세속화하고 혹세무민하는 작태들이라는 것이다. 권력 유지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은 유교도 바로잡아야 하고, 세속화된 불교도 바로잡아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박생이 찾아간 ‘염부주(炎浮州)’는 풍토병으로 괴롭고, 구리쇠 물을 마시며, 야차나 나찰, 도깨비가 넘실대는 세계라고 묘사된다. 그런데 ‘염부주’는 천지만물의 조화가 깨져버린 현실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하룻밤 꿈이라는 주인공의 의식에 존재하는 현실이다. 거기에서 염라왕과의 대화를 통해 당대 현실의 문제를 끄집어내어 조목조목 비판한 것이다.

‘남염부주지’는 현실을 상징하는 남염부주라는 공간에서 그릇된 사상과 부정이 판을 치는 당대 현실의 개혁방향을 추궁해 들어간 소설이다. 이는 김시습이 조동오위사상에서 밝힌 ‘편중지(偏中至)’의 면모와 관련된다.

김시습이 “하늘은 하늘이고, 땅은 땅이며, 큰 것은 큰 것이고 작은 것은 작은 것이며, 짧은 것은 짧고 긴 것은 길며, 꽃은 꽃이고 풀은 풀로서 각각 제 형상을 드러낸다.”(<조동오위요해>)라고 밝힌 경지다. 박생에게 꿈은 정위(正位)가 함께하는 편위(偏位), 곧 나타난 현상 그대로가 진성 본체라는 편중지의 깨달음을 얻게 한다. 

소설은 박생이 죽은 후 염라왕이 되었다고 했다. 꿈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박생이 현실을 빗댄 세계인 남염부주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편중지의 깨달음을 얻은 자가 현실로 들어가 교화를 펴는 것과 같다. 모순에 찬 현실을 바로잡으려 깨달은 자가 다시 현실로 복귀하는 것이다.

“털을 입고 뿔을 얹고 남을 위해 수고로움을 다한다(披毛藏角 服勞爲人)”(<조동오위요해>)라고 김시습이 언급한 경지요, 이류중행(異類中行)하는 보살의 경지다. 

유교면 어떻고, 불교면 어떠하며, 기독교면 어떠하랴? 중생들 틈에서 나를 버리고 남을 위해 수고하라, 그거다. 

[불교신문3574호/2020년4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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