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하고 괴로운 삶도 결국 소멸”

오온은 유위법이고 실재해서
생성과 소멸 말할 수 있지만
여래의 해탈법신 유무를 초월

등현스님
등현스님

초기경전을 살펴보면 부처님께서 열반의 상태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열반은 사유의 영역도,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영역도 아니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오직 고통의 원인이면서, 열반을 장애하는 ‘번뇌와 그의 소멸’을 말한다. 번뇌와 선업은 유위의 진제이기에 인과가 성립되고 언어의 영역이다. 그러나 열반의 상태인 무위의 진제는 언어의 영역도 아니고 인과를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중관학파 역시 오직 진제 즉 열반과 해체를 다루는 학파이기에 무위의 진제만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열반 이외의 모든 것, 유위의 진제마저도 모두 속제로 치부한다. 그러나 초기불교, 설일체유부, 유식학파, 경량부 등은 중생의 번뇌와 번뇌의 소멸을 다루기 때문에 유위의 진제를 다루어야만 하고, 이는 인과의 영역인 것이다.

이 때문에 중관학파와 여타 제 학파의 인식론과 수행 방법은 큰 차이가 있다. 유위의 진제는 자체적 성질이 있으나 탐진의 인연 따라 변하는 것이고, 무위의 진제는 형태가 있기 이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인과설에서 서로 충돌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위의 진제와 무위의 진제라는 서로 다른 차원을 다루기에 오류가 없는 것이다. 

<금강경> 5장에 여래께서 수보리에게 물으신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32(相)과 오온을 칭하여 여래(如來)라 할 수 있겠는가?” 수보리는 부처님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32상(相)과 오온을 칭하여 여래(如來)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32상과 오온은 무상하기 때문이고 (여래를 무상하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부처님께서는 그 대답에 흡족해하시고 이렇게 결론을 내리신다. “무릇 32상과 오온은 허망하고, 32상과 오온을 떠난(법신은) 형상을 떠났기에 허망하지 않나니, (그렇다고) 허망한 32상, 오온과 형상을 여읜(법신)을 떠나서 (다시) 여래를 말할 수 없느니라.” 

초기경전 중 이러한 이치를 자세히 설명한 <야마까경>이 있다. 야마까라는 비구는 여래의 사후 상태가 ‘단멸의 무’라고 믿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벗들이여, 나는 ‘번뇌를 소멸시킨 수행승은 몸이 파괴되어 죽은 후에 단멸하여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세존의 가르침을 이해합니다.”

그때 사리불 존자는 그 말을 듣고 여래는 그러한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면서 야마까를 꾸짖는다. 그리고 야마까에게 무엇을 칭하여 여래라 할 것인지에 대해 순차적으로 질문하신다.

먼저 몸이 여래인지를 물으신다. 그러나 몸은 사후에 소멸하므로, 몸밖에 여래가 있느냐고 다시 물으신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느낌, 생각, 의도, 의식의 안에 여래가 있는지, 밖에 여래가 있는지를 계속해서 순서대로 물으신다. 더 나아가서 이들 오온의 합을 여래라고 할 수 있을지, 이들 오온을 떠난 밖에 여래가 존재하는지를 물어보신다.

그 모든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하자, 사리불은 그러므로 여래는 어떠한 언어나 사념으로도 파악될 수 없고, 그러기에 여래의 사후를 단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결론짓는다. 

야마까는 ‘오온이 흩어지면 다음 생을 받지 않는다’는 말을 ‘여래의 사후 단멸’과 동일한 의미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여래의 사후에 대해 아무런 표현도 할 수 없는 것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여래의 사후에 대해 질문 받는다면 “오온은 무상한 것이고, 무상한 것에 집착하면 괴로움이 따르며, 무상하고 괴로운 것은 소멸하여 사라지는 것이다”라고 주어를 오온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언어가 표현할 수 있는 한계이다. 오온은 형성된 유위법이고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성과 소멸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래라는 이름의 개념과 모든 형상이 해체된 법신의 상태는 유무의 언어로 표현되어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여래라는 이름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개념이기에 대상의 유무를 논할 수가 없고, 여래의 해탈된 법신의 상태는 모든 조건(유위)이 해체된 상태(무위)이기에 더욱 유무를 논할 수가 없는 것이다. (無와 有無를 초월함의 차이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불교신문3573호/2020년4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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