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신문 창간 60주년 특별기획’
미움과 고마움은 한 생각 차이 ‘발심’

출가사문의 수행이력엔 언제 누구의 문하에서 득도했는지가 반드시 포함된다. 여기에서 득도는 한자로 得度이다. 과거 승적부를 도첩이라 부른데서 유래한 것이다. 당연히 사미계와 구족계 수지가 득도의 과정이다. 이것은 형식이다. 출가수행자에게 더 중요한 것은 진정한 출가다. 곧 심출가(心出家). 마음이 속세를 여읜 심출가 과정을 거쳤을 때 비로소 거룩한 승보라 불릴 만하다. 출가사문의 길은 비로소 심출가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학교 1학년때 할머니에 의해 강제로 절에 보내진 진우스님은 고된 행자생활에 할머니가 미웠다. 진우스님(가운데)의 표정에 그 마음이 담겨 있다. 태백 청원사에서 당시 행자로 있던 정오스님(오른쪽), 청원사 살림을 책임졌던 화주보살(왼쪽)과 함께 찍었다.
중학교 1학년때 할머니에 의해 강제로 절에 보내진 진우스님은 고된 행자생활에 할머니가 미웠다. 진우스님(가운데)의 표정에 그 마음이 담겨 있다. 태백 청원사에서 당시 행자로 있던 정오스님(오른쪽), 청원사 살림을 책임졌던 화주보살(왼쪽)과 함께 찍었다.

 

#1

유복한 집에서 자랐던 중학교 1학년, 14살 소년은 강제로 절에 맡겨졌다. 부처님이 뭔지, 불교가 뭔지, 스님이 뭔지도 몰랐다. 절 생활은 고됐다. 새벽 230분 자리에서 일어나면 밤 9시까지 온갖 일을 다했다. 도량석을 돌고 새벽예불을 하면 후원으로 가서 물을 길러 군불을 땠다.

아침밥을 짓고 끊는 물을 사중대중의 세숫물을 준비했다. 공양 준비와 설거지도 행자의 몫이다. 마루와 법당 청소, 빨래, 다듬이질을 해서 풀을 먹이고. 학교에 가면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학교가 끝나면 옷 갈아입고 또 일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일을 하고 살았는지 신기하다.

조계종 교육원장 진우스님의 행자시절 이야기다. 1970년 갓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월정사 강릉포교당에서 살던 때다. 수업이 없는 주말이면 강릉 보현사로 가서 능각스님 밑에서 공부했다.

귀하디 귀한 3대 독자를 절에 맡겨서 이 고생을 시킨 할머니는 분명 의붓할머니일거라고 생각했다. 의붓할머니가 아니라면 절에서 파김치가 될만큼 힘들게 살도록 보냈을리는 없을 터였다. 아무리 이해하려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할머니에 대한 마음은 미움이 점점 커졌다. ‘기필코 복수하리라.’

#2

얼마 전 순창 강천사에 있는 정오스님이 진우스님에게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낙동강 발원지 태백 황지의 청원사에서 찍은 행자시절의 사진이었다. 행전을 찬 허름한 행자복의 진우스님과 당시 청원사 행자로 있던 정오스님, 청원사 살림을 도맡았던 호랑이화주보살이 함께 찍었다. 행자생활 2년차, 중학교 2학년 때의 사진이다. 당시 청원사에는 윤수병이라는 속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무장스님이 주지로 있었다.

사진 속 진우스님은 삐딱한 시선과 불만이 가득찬 표정이다. 할머니에 대한 감정이 담긴 사진이라고 했다. 진우스님의 할머니는 ‘10찰 대화주였다. 이 지역 10개 사찰에 시주를 많이 하는 신자였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시주를 받아 사찰을 돕는 역할까지 했다.

쌀과 초, 향을 비롯해 절에서 필요한 물품을 트럭에 가득 싣고 청원사에 갔을 때 찍은 사진이다. 할머니가 함께 사진을 찍지 않은 이유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아마도 사진을 찍은 이가 할머니였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3

진우스님은 고2 시절 이광수의 <원효대사>를 읽고 발심했다. 신출가가 심출가로 바뀐 시점이다. 비로소 불교를 알게 됐고 수행해서 마음을 깨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할머니에 대한 미움이나 의구심이 사라져버렸다.

강제출가가 발심출가의 씨앗이 됐다. 미움과 고마움은 한 생각 차이, 미움은 감사함으로 바뀌었다. 스무살 때 읽은 황찬덕의 <중론송>과 스물일곱살 때 읽은 신소천의 <금강경 강의>는 출가사문으로서의 길을 분명하게 했다.

훗날 알게 된 것이지만, 할머니가 진우스님을 절에 보낸 것은 단명할 거라는 한 스님의 말 때문이었다. 당장 절로 보내라는 그 스님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초등학교라도 졸업시키고 보내겠다고 간곡히 요청해 보낸 것이었다. 어른이 되면 밖에서 살아도 된다는 말에 스무살이 되면 다시 집으로 데려올 요량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늦었다. 발심한 3대 독자는 환속을 거절했다.

[불교신문3573호/2020년4월11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