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의 '부벽루연회도'.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의 '부벽루연회도'.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금오신화>의 세 번째 작품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는 수행자가 철두철미한 깨달음의 경지로 나아가야 함을 드러낸다. 그리해야만 털 뒤집어쓰고 뿔 단 소[披毛戴角]가 되어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보살행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진정한 깨달음이 없는 자가 보살행을 실천하겠다고 으스대다가는 정말 큰 사고를 치기 때문이다.

주인공 홍생(洪生)은 평양에서 술에 취해 탄식하다 비몽사몽간에 선녀 기씨녀(箕氏女)를 부벽정에서 만나 세속 삶의 무상(無常)을 절절하게 노래한다. 그리고 꿈에서 깬 그는 그녀를 잊지 못해 죽음을 맞이한다. 사람들은 그가 신선을 만난 후 육체를 버리고 신선이 된 것이라고 말한다.

작품 전반에 나타나는 도선적(道仙的) 경향으로 연구자들은 신선을 지향하는 작자의 의식이 투영된 것으로 보곤 했다. 또는 기씨녀가 말하는 왕위 찬탈의 역사에 주목해 세조의 단종 폐위에 대한 비판이나 고려 유민의 저항 의식을 반영했다고도 보았다.

주인공이 세속을 버리고 신선이 되었다는[遇仙屍解] 점에 착안하여, 김시습이 추악한 현실을 비판하면서 방외적 세계인 신선 지향적 면모를 보여준다는 것이 대부분의 주장이었다.

이를 두고 ‘취유부벽정기’가 보여주는 현실 도피적이며, 신선 지향적인 면을 한때 작가가 신선사상에 심취했던 데서 비롯된, 한 인간의 모순된 측면이라 보는 경우(임형택, 1971)도 있는데, 이는 작품의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한 것이다.

김시습은 “이 생(生) 이외에 다시 다른 생을 훔칠 것인가?”(‘용호(龍虎)’)라며 생사를 초월한 신선이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귀함과 천함,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은 하늘의 명(命)에 매여 있다.”(‘잡저-천형(天形)’)라며 불생불멸의 신선술(神仙術)을 부정하고, 점술법을 절대화하는 것도 경계했다. 철저한 현실주의자인 김시습은 귀신도 부정하고 신선도 부정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무엇인가?

‘취유부벽정기’를 지배하는 정서는 무상(無常)이다. 홍생과 기씨녀는 각각 7수씩 총 14수의 시를 읊는데, 그 모두가 맥수지탄(麥秀之嘆), 인생무상을 주제화한 것들이다. 단군, 기자조선으로부터 이어지는 역사를 회고함으로써 등장인물들은 비루한 티끌세상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벗어버린 경지를 보여준다.

주인공 홍생은 인간 세상이 덧없음을 느낀 자인데, 더 나아가 그의 의식은 은나라 임금의 후손이자 기씨의 딸까지 불러낸다. 그녀는 그의 의식이 불러낸 환상이다. 그 환상 속에서 진정한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이는 “무(無) 속에 티끌세상 벗어날 길 있다.”(동산양개)는 조동오위의 정중래(正中來) 사상과 관련된다.

그렇다면 ‘신선이 되었다[屍解]’는 것은 무엇인가? 소설은 홍생이 향을 피우고 땅 소제하고 뒤뜰에 자리를 펴게 한 다음, 턱을 괴고 잠깐 눕더니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오륙일이 지나도 홍생의 얼굴빛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해탈한 자의 모습이다. 불성을 깨달은 자가 열반에 든 모습이다.

선종사가들이 장례를 치렀던 달마대사가 관에 짚신 한 짝 남기고 나머지 한 짝은 손에 들고 인도로 간 것으로 그리듯, 시해선(屍解仙)의 모습으로 그려낸 것이다. 세속에 대한 부정 의식을 지닌 홍생이 꿈을 깨고 기씨녀를 그리며 병들어 있었는 모습은 일종의 법집(法執)이라 볼 수 있고, 신선이 되는 모습은 그 법집까지 놓아버린 진공(眞空)의 경지라 할 만하다.

김시습은 “산에 오르려거든 오로지 정상까지 오르고, 바다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바닥까지 내려가라.”(<십현담요해>)라고 했다. 그는 ‘취유부벽정기’를 통해 산에 오르고, 바다에 들어가되 반드시 극단까지 치고 들어가야 진정한 깨달음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공부하는 사람은 주장자를 비스듬히 집어 들고 취모검(吹毛劍)을 거꾸로 부여잡고 끝내 부처와 조사를 죽여야 한다고 김시습은 말한다. 설익은 공부는 중생을 지옥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불교신문3572호/2020년4월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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