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난에 희생 무릅쓰며 공동체 위한 자비심 발현

해남 대흥사에서 봉행된 서산대사의 영정과 제단.
해남 대흥사에서 봉행된 서산대사의 영정과 제단.

코로나19 사태에 대응하는 여러 종교의 자세를 생생히 접하는 나날들이다. 올해 음력3월은 구국의 의승(義僧) 서산대사 탄신 5백주년을 맞는 시기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종교적 도그마를 앞세우지 않고, 스스로의 희생을 무릅쓰며 공동체를 위해 있어야할 자리에 묵묵히 있어온 불교의 대승적 자비가 예전에도 오늘날에도 빛을 발한다. 

불교가 핍박받던 조선중기, 열여덟에 입산하여 운수행각으로 수행하던 한 출가자가 마을을 지나다 닭 우는 소리에 홀연히 마음을 깨우쳤다. “머리는 희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고 옛사람이 일렀던가. 이제 외마디 닭 울음소리 듣고서 대장부 할 일을 능히 마쳤도다.”

오도송을 남긴 그는 불교 최고 승직인 선종판사와 교종판사까지 올랐다가, 38세에 모든 자리를 떠나 금강산, 두륜산, 묘향산, 지리산 등을 주유하며 제자들을 길렀다. 후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나라와 백성의 삶이 풍전등화에 처하자, 73세의 노구를 이끌고 거국적 승군을 일으켜 나라를 지켰다. 

바로 서산대사(西山大師)로 잘 알려진 휴정(休靜)스님의 이야기이다. 스님의 구국공훈을 기리고자 나라에서는 사당을 세우게 하고 봄ㆍ가을마다 제수와 축문을 보내 국가제향을 봉행토록 하였다. 이 제사는 매년 봄 스님의 탄신일에 ‘서산대제(西山大祭)’로 전승되고 있다. 

서산대사의 구국 대승보살행

1592년 봄 부산진 앞바다에 신무기를 앞세운 왜군이 침략했다. 당시 사화(士禍)와 훈구ㆍ사림 세력 간의 계속된 정쟁으로 조선정세는 어지러웠고, 건국 초에 구축한 국방체제가 붕괴되어 국력은 쇠약해져 있었다. 이에 왜군이 동래성을 무너뜨리며 파죽지세로 15일 만에 한양에 이를 만큼 관군은 무방비상태였다. 선조는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난해 국운에 애태우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서산대사의 제자 영규(靈圭) 스님이 5백의 의승군을 모아 의병장 조헌과 함께 왜군이 점령한 청주성을 탈환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조선시대에도 승군은 고려 때의 조직과 훈련체계를 꾸준히 이어왔고, 각지의 산성을 축조하는 데도 큰 역할을 담당해왔던 것이다. 이에 선조는 묘향산에 주석하던 스님에게 사신을 보내 나라의 위급함을 알렸다. 

한걸음에 달려온 스님은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일에 흔쾌히 몸을 던지기로 결심하고, 의승군 총사령관인 팔도도총섭이 되어 전국의 사찰에 격문을 돌리며 모든 승려들이 구국으로 총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영동의 영규, 호남의 처영(處英), 관동의 유정(惟政), 해서의 의엄(義嚴) 등 수많은 제자들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의승장으로 활약하고, 각지에서 모여든 5천의 의승군들이 곳곳에서 왜적을 물리치며 승전보를 전했다. 서산대사는 몸소 승병 2천여 명을 지휘하며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큰 전공을 세웠다. 

이후 노쇠함을 이유로 팔도도총섭의 직을 제자인 유정스님에게 물려주고, 스님은 묘향산으로 돌아가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였다. 선조는 스님에게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라는 존호와 함께 나라를 위기에서 지킨 공과 불교의 덕을 치하하였고, 구국의 승장으로 활약한 스님과 5천의 의승군으로 인해 조선의 불교는 중흥을 맞게 된다. 

스님의 참전은 불살생의 계율을 파해 출가자의 본분을 내려놓은 대신 민중의 목숨을 구한 대승보살행의 실천이었다. 묘향산에 오래 머물러 ‘서산’이라는 별호를 얻은 스님은 85세에 그곳에서 입적하였고, 스님의 유촉에 따라 가사와 발우는 대흥사에 봉안되어 오늘에 전한다. 
 

조정에서 파견한 예제관 행렬.
조정에서 파견한 예제관 행렬.

사액사당과 국가제향 

“지난 임란에 왜구들의 변고가 있을 때 공문(空門)의 충의는 오직 휴정이었습니다. 지혜의 칼이 서산에서 나아가니 의로운 승병들은 그림자처럼 따랐습니다.” 1789년 대흥사 경내에 유교사당인 표충사(表忠祀)를 지어 서산대사를 모시고 첫 국가제향을 올릴 당시 제문(祭文)의 일부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약 2백년이 지난 정조 대에 와서 서산대사의 구국업적이 재조명되기에 이른다. 정조는 스님의 공훈을 크게 평가하여 사액사당(賜額祠堂)을 세우게 하고, ‘표충(表忠)’이라는 친필편액을 내려 봄ㆍ가을마다 제수와 축문을 보내 국가제향을 봉행케 한 것이다. 이 제사에는 조정에서 파견한 예조관리가 헌관을 맡고, 인근고을의 각 수령이 예제관(禮祭官)으로 참여해 제물단자를 마련하였다.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사찰에 사액사당을 세우고 출가자의 제사를 지내도록 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뿐만 아니라 대흥사에 이어 묘향산 보현사에도 서산대사를 모시는 사액사당 수충사(酬忠祠)가 나란히 세워졌고, 밀양 표충사(表忠寺)에는 제자인 사명대사 유정스님을 모신 사액사당이 세워져, 영ㆍ정조 연간에 구국승려들의 공적과 위상이 재정립되었다. 특히 한 인물을 여러 곳에 배향하는 첩설을 금지하던 당시, 서산대사를 두 곳에서 제사하였으니 유교국가에서 전례 없는 사례를 남긴 셈이다. 

80년 이상 ‘표충사 향례(享禮)’라는 이름으로 봉행해오던 대흥사의 국가제향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중단되었고, 이와 무관하게 사중에서는 스님의 열반일인 정월과 탄신일인 삼월에 추모재를 봉행해왔다. 근래 대흥사에 전하는 의식집 ‘표충사향례홀기(表忠詞享禮笏記)’와 제사차림도인 ‘진설도(陳設圖)’ 등을 면밀히 고증하여, 2012년부터 복원된 ‘국가제향으로서 서산대제’를 종묘제례보존회의 집전으로 봉행하고 있다. 
 

초헌관이 첫 잔을 올리는 초헌례(初獻禮).
초헌관이 첫 잔을 올리는 초헌례(初獻禮).

제(祭)와 재(齋)의 이상적 조합

고증을 거쳐 복원된 서산대제는 ‘예제관 행렬’과 ‘제향’으로 구분된다. 일주문에서 시작되는 예제관 행렬은 조정과 인근고을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갖가지 장엄을 갖춘 채 제물을 싣고 진입하는 장면을 재현한 것이다. 기수단에 이어 향로와 향합을 실은 향정자(香亭子), 나라에서 내린 제물과 제기를 실은 채연(彩輦) 등의 가마를 비롯해, 관복을 갖추어 입은 관리와 호위병들이 의궤에 맞는 행렬로써 국가제향의 면모를 드러내었다. 

이어지는 제향에서 인상적이었던 점은 유교 제(祭)와 불교 재(齋)의 결합이었다. 의례절차는 유교제향에 따랐지만, 설단과 상차림은 ‘사찰에서 스님을 대상으로 한 유교제사’로서의 특수성이 뚜렷했기 때문이다. 불교의 위패와 유교의 신주가 함께하는가하면, 제물로 육류ㆍ해물ㆍ오신채를 쓰지 않았고 술 대신 청수를 갖추었다. 유교식 진설을 기반으로 하니 불교의 종사영반과 다름은 물론이요, 유교의 종묘제례나 불천위제사와도 달라 제물(祭物)과 재물(齋物)의 이상적 조합을 보는 것 같았다. 

제단에는 서산대사를 중심으로 좌우에 제자 유정스님과 처영스님의 구국 3화상을 모셨다. 영정과 위패의 앞쪽에 각각의 제단을 마련하고, 신주를 중심으로 22개의 굽다리그릇에 제물을 가지런히 차렸다. 대나무로 만든 제기는 양기(陽器)라 하여 연밥ㆍ대추ㆍ잣ㆍ밤ㆍ한과ㆍ인절미ㆍ시루떡ㆍ백설기 등의 마른 음식을 담고, 나무로 만든 것은 음기(陰器)라 하여 우무ㆍ채소ㆍ다시마ㆍ무청ㆍ미나리ㆍ군두부ㆍ흑임자ㆍ메밀국수ㆍ해조류 등의 물기가 있는 음식을 담아 올렸다. 

서산대사 제향에서 제기와 제찬의 수를 나타내는 변두(籩豆)는 12변10두이다. 이는 종묘사직에 올리는 대사(大祀) 12변12두에 버금가고, 공자제례인 석존(釋奠)의 중사(中祀)와 동일하거나 높아 그 격을 극상으로 배려한 것이었다. 8변8두 이하 4변4두의 소사(小祀)는 이이ㆍ이황과 사명대사 등의 제향이 해당한다. 이는 <국조오례의>로 아우를 수 없는 특별한 진설체계로, 유교예법과 다른 불교예법의 세계와 제자 사명대사와의 관계를 반영하면서, 위상을 최대로 높여 서산대사의 구국공훈을 기린 상징적 표현이라 하겠다. 
 

진설도(陳設圖)에 따라 차린 제물.
진설도(陳設圖)에 따라 차린 제물.

남북 합동제향의 역사적 의의 

승려의 도성출입마저 금했던 숭유억불의 시대에, 왕명으로 사찰 내에 유교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세우고, 중앙관리를 파견해 서산대사를 기리게 했다. 이는 구국의 대의 앞에 유학자들의 반발까지 잠재울 수 있었고, 사상적ㆍ문화적으로 양대 축을 이루어온 불교와 유교가 백성의 평안을 화두로 대승적 화합을 이룬 상징적 사건이라 할 만하다. 

의례에 주목했을 때도 유교예법이 엄한 가운데 파격적 변례(變例)로써 서산대사를 대우하였고, 진설된 음식으로 불교와 유교의 원융함을 보여주었다. 사찰과 사당, 승려와 유학자, 불교재물과 유교제물, 위패와 신주 등이 80년 이상 동일한 시공간에 의미화 됨으로써 핍박받던 시절에 스스로의 희생을 무릅쓴 스님들의 호국불교를 통해 전통문화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것이다. 

두륜산 대흥사와 묘향산 보현사에 서산대사의 사당이 나란히 제향을 이어온 점도 상징성이 크다. 서산대제의 완전한 복원은 남북 합동제향을 이루어 민족동질성을 회복하는 데 있다. 봄의 두륜산과 가을의 묘향산에서 합동제향이 봉행된다면, 이는 역사적 사실의 복원일 뿐만 아니라 남북한의 불교교류는 물론, 남북 문화교류의 장을 열어가는 소중한 디딤돌이 될 수 있다. 이에 사찰과 종단에서는 북한 조선불교도연맹과 교류하는 가운데 정부의 협조를 이끌어내며 역사적 과업으로 면밀하게 추진해나가고 있다. 

그간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인정한 호국명장으로서 서산대사의 위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승려의 신분으로 왜군과 싸워 나라와 백성을 지킨 이름 없는 5천의 의승병은 거의 주목받지 못하였다. 국난극복에 앞장선 이름 없는 이들의 삶을 헛되지 않게 만드는 것은, 그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이며, 잊혀져간 역사를 뚜렷이 새기는 일이다. 

[불교신문3571호/2020년4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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