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의 진제는 열반의 상태다”

삼독 없어 인과에 자유롭고
나와 너라는 분별심 없어
인과 초월할 수 있는 것

등현스님
등현스님

무아론은 인과론의 연기설과 한 쌍을 이루고 있으며, 또한 연기론을 떠나서는 본래 존재하지 않았던 물(物)이 어떻게 형성되었지 설명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인과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업과 악업의 상속성이다. 계를 어기는 행위를 하면, 그로 인한 불이익이 현재 또는 미래에 닥친다는 믿음 때문에, 사람들이 계를 지키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업이 상속을 하려면 업이 상속할 수 있는 자체적 힘이 있어야만 한다. 불선법에는 불선행이 가져다주는 과보의 성질이 있어야 하고, 선법에는 선행이 가져다주는 과보의 성질이 있어야 한다. 이 과보의 논리는 불교 윤리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만약 선법과 악법의 과보를 가져오는 성질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불교 윤리학이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성질(自性)을 팔리 불교에서는 ‘sabhāva’ 산스트리트 불교에서는 ‘svabhāva’라고 한다.

<금강경>은 중관학파의 소의경전이고 <중론>은 소의논서에 해당한다. <중론>에서는 자성인, 타성인, 동시인, 무인 등 4가지의 인과를 모두 부정한다. 그러면 ‘어떻게 자성인과 타성인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도덕적으로 인과를 말할 수 있는가’가 중관을 이해하는 관건이다. 인과라고 하는 것은 어떤 법칙성이 있어야만 한다.

만일 법칙성이 없다면 우연주의에 떨어지게 될 것이고, 인과의 윤리를 말할 수 없다. 만약 자성인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석에는 쇠를 끌어당기는 자성이 없다는 논리가 될 것이고, 그렇다면 자석이 쇠를 당기는 것과 같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중관학파는 인과에 어떤 법칙성을 줄 수 있는가? 아니면 인과 부정론자인가?

우리는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불교의 발달사에 등장한 속제와 유위의 진제, 무위의 진제 등 이 3가지 관점에 주목해야 한다. 속제라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대상에 개념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예를 들어, 죽비, 책상, 마이크, 컴퓨터 이러한 것들을 모두 속제라고 한다. 마이크는 본래 마이크라고 이름 할 수 있는 자성이 있지 않다.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서로 합의하에 마이크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이러한 개념을 깊이 따지고 들어가면 꼭 마이크가 아니더라도, 그것은 강, 산, 들 다른 이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속제에는 자성이 없다.

유위의 진제는 인간이 능동적인 개념을 일으키지 않아도 수동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이다. 물질, 몸이라고 하는 것은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땅을 밟을 때 땅(地)의 딱딱한 성질, 물(水)의 촉촉한 성질, 불(火)의 따뜻한 성질, 바람(風)의 움직이는 성질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몸, 땅 등의 개념은 이름이라서 개념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없다.

반면 지수화풍의 성질은 우리가 개념을 일으키지 않아도 수동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아비담마에서 유위의 진제라고 말한다. 지수화풍 사대가 뭉쳐져 있는 것은 책상이나 탁자나 컴퓨터이다. 이러한 것은 개념을 말하는 것이고, 실재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물질이 가지고 있는 딱딱함, 습윤성, 따뜻함의 성질, 움직이는 성질들이다.

그래서 나 혹은 나의 몸이라고 말하는 것은 속제가 되는 것이고, 나와 나의 몸이라고 말하기 전에 이 몸을 구성하는 최소의 경험적 대상인 지수화풍의 속성을 지각하면 유위의 진제라 한다. 상대적이고, 조건 지워진 것이기에 유위(有爲)이고, 개념 없이 지각할 수 있으므로 진제(眞諦)이다. 인과율과 자성은 이 유위의 진제에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무위의 진제는 모든 것이 해체되어서, 거기에는 주관도 객관도, 모든 조건 지어지고, 형성된 것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불교 논리학의 역사에서 법무자성(法無自性) 즉, 인과를 말할 수 없는 단계는 그러므로 속제와 무위의 진제인 열반의 상태이다. 그러나 유위의 진제인 지수화풍 사대, 선법과 불선법 등의 상태는 모두 인과율에 의해서 지속된다. 그러므로 무위의 진제는 열반의 상태이며, 탐진치 삼독이 없기 때문에 인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고, 나와 너라고 하는 분별심이 없기 때문에 인과를 초월한 것이다.

[불교신문3571호/2020년4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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