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제주 4·3항쟁과 스님들

원문상 이일선 이세진 오이화
스님 등 제주불교 ‘4·3’ 참여
포교 전법하다 주민들과 함께
토벌대 연행 후 ‘수장’ 등 희생

제주 4·3항쟁은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컸던 4·3사건 당시 제주불교계 역시 고초를 겪었다. 당시 비극의 역사 한 복판에 있었던 제주불교와 스님들의 자취를 살펴본다. 

양성자
양성자

해방이후 중앙(서울)의 불교개혁운동에 따라 제주에도 불교청년단이 결성되고 조선불교혁신전도승려대회(이하 제주도승려대회)가 개최되었다. 1945년 11월 제주교무원에서는 원문상(1908~1950) 스님을 중앙에 보내 제주교구 독립을 추진하였다.

당시 제주불교청년단 총무와 제주도승려대회 부의장을 맡고 있던 원문상 스님은 중문중학원에서 국어, 역사, 한문을 가르쳤다. 스님에게 교육을 받은 조명철씨(1934년생, 중문면 하원리)의 회고를 들어본다. 

“1학년 때 역사교사로 선생님(스님)을 만났습니다. 교과서도 없이 옛날이야기 하듯 수업을 했지요. 학생들은 100% 집중할 만큼 최고 인기였어요. 혜화전문학교를 나오고 제주도에서 유일한 한글학회 회원이기도 하셨죠. 최현배의 <한글 갈> 책자를 제게 주시며 ‘너는 장차 한글학자가 되거라’ 당부하셨어요. 그 책을 얼마나 열심히 봤는지 책갈피마다 선생님 도장이 찍혀있어요. 어느 봄날 선생님을 따라 법화사로 갔어요. 거기서 가사 장삼을 갈아입고 나오시는 걸 보고 스님인 줄 처음 알았죠.

다음 해에 선생님은 새로 부임해 온 서북출신 교사에게 모함을 받아 예비검속 때 끌려가 총살 당하셨습니다. 죄명을 ‘2·7사건 주모자로 좌익사상 극렬자’라고 기록했더군요. 마음속에는 사회주의사상을 가졌던 것도 같아요. 선생님도 당대 지식인이었고 석가모니 정신을 받은 사람이니까. 석가모니 자체가 인도계급사회를 타파하기 위한 혁명가 아닙니까.”

제주도승려대회 준비위원장을 맡은 이일선(李一善, 1895~1950) 스님은 전남 장성 출신이다. 1937년 백양사 포교사로 제주로 와 전도순회강연을 주도할 때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스님은 1947년 2월에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공동의장을 맡았다. 당시 중앙(서울)민전은 우익을 배제한 단체였는데 제주도는 우익이라 할 세력이 없어, 전 도민의 결집체로 역할을 하였다.
 

억울하게 희생된 제주 4·3 영가를 추도하고 평화의 상생을 기원하기 위해 총무원과 제23교구본사 관음사는 2019년 3월30일 ‘4·3 사건 추모 위령재’를 봉행했다. 불교신문
억울하게 희생된 제주 4·3 영가를 추도하고 평화의 상생을 기원하기 위해 총무원과 제23교구본사 관음사는 2019년 3월30일 ‘4·3 사건 추모 위령재’를 봉행했다. ⓒ불교신문

민전 주최로 1947년 3·1절 기념식을 열었을 때, 일선스님의 연설을 기억한 분은 이 날을 겨울로 생각하고 있었다. 3월1일이면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릴 때고, 특히 제주는 맵찬 영등바람으로 체감추위가 겨울 못지않았을 것이다. 한금순 박사 논문에 실린 김평수(토산리)씨 증언이다. 

“북국민학교에서 신탁통치 운동할 때, 겨울이었는데 ‘서쪽에 저 동백꽃을 보라’면서 운동장에 핀 동백꽃을 가리키며 연설하던 모습이 눈에 선해. ‘서숙밥(조밥)을 먹더라도 우리나라에서…’하고 연설을 했는데, 신탁해야 한다는 쪽으로 연설했지. 그때는 신탁하는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할 때야.”

기념식이 끝날 무렵 경찰 발포로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사망자 대부분은 어깨나 등에 총을 맞았다. 미군정 주장처럼 항의 군중이 아닌 해산 군중을 향해 최소 14발을 쏘았던 것이다. 관청이 몰려있는 관덕정 마당에서 총소리가 난 것은 유사 이래 처음이었다.

미군정에서는 민전 간부 28명을 체포했는데, 일선스님도 포고령 위반 혐의로 형을 받았다. 이후 분노한 도민의 항의 총파업이 3월10일 일어나고 미군정은 한 달 사이에 2500명을 체포 구금하였다. 이 와중에 고문치사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여 제주는 공포 속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세진(李世震,1910~1949) 스님은 여섯살에 어머니와 인연 깊은 내장사 백학명 스님에게 맡겨졌다. 때묻지 않은 동진(童眞)출가였다. 11세에 고향에 내려와 제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간 사서를 배운 후 18세에 내장사로 출가해, 백양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스님은 백학명 스님이 만든 내장선원에서 3년가량 수행했다. 내장선원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선농(禪農)불교의 기본정신에 입각한 선원이었다. 그 후 금강산 표훈사 중향강원 강사로 있다가 1937년 제주도로 돌아와 한림 포교당 포교사로 부임해 승려교육을 담당하였다.

스님은 1942년 도평리에 서(西)관음사를 창건하였다. 내장선원 강령에 따라 초가집에 법당과 객실 한 채만 짓고 나머지 터에는 기와공장을 운영하여 주민들과 판로 개척을 의논하며 직접 시장에 나가 팔았다. 자체 생산 활동으로 승가의 자립을 이루고자 했던 스님의 꿈이 실현되는 시기였다. 

서관음사 개혁운동이 불교계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킬 때 제주 4·3항쟁이 시작되었다. 이세진 스님은 도평리 청년들과 입산하였다. 스님 나이는 39세 였다, 도평리 사람들에게는‘산왕’으로 불렸고, 여러 스님들도 ‘총을 들었던 무장대 스님’으로 기억하고 있다. 1949년 3월 경 산에서 내려온 스님은 체포, 수감되었다 김우송 헌병의 도움으로 풀려난다. 그러나 예비검속 때 다시 잡혀 수장(水葬)되었다. 여섯살 사미승으로 불가에 들어가 35년 동안 사문의 길을 걸은 스님이 마지막 길은 총을 든 무장대원이었다.

오이화(吳利和, 1903~1950) 스님은 관음사가 군인들에게 이중 삼중 포위되어 총성이 울릴 때도 법당에 앉아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외웠다고 한다. 스님은 제주시 오라리에서 출생하여 12세에 출가하였다. 제주교구 교무원장을 지내고 제주승려대회 임시의장을 할 만큼 지도력이 있었다.

성품이 온화하고 사리에 밝아 대중강연에도 능통했다. 마차에 묶여 물고문을 받는 등 모진 고문을 받아 후유증으로 1년 후 돌아가셨다. 이렇게 해방 후 불교계에서 주도적으로 일한 스님들은 모두 희생되고 새로운 세상을 염원했던 희망도 함께 파괴되었다. 모두 토벌대에 의한 죽음이었다.
 

4·3에 참여했다 희생된 이세진 스님을 추모하는 비가 제23교구본사 관음사에 있다. 사진은 2017년 11월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스님들이 이세진 스님 비에 예를 올리는 모습이다.
4·3에 참여했다 희생된 이세진 스님을 추모하는 비가 제23교구본사 관음사에 있다. 사진은 2017년 11월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스님들이 이세진 스님 비에 예를 올리는 모습이다.

애월읍 수산리 대원정사 주지 일조스님(1940년생)이 고아가 된 내력은 70년 동안 금기였다. 수십 년 동안 스님과 동고동락한 신도나 화주들도 “대동아전쟁 때 일본에 돌아오다 폭격 맞아 부모님이 돌아가셨다”정도로 알고 있었다. 스님은 80세가 돼서야 아홉살에 겪은 4·3을 담담히 말하였다. 

“아버지는 일본서 대학을 나오고 해방 후 돌아와 단국중학교를 세웠어요. 5.10선거를 반대해 학생들과 산으로 올라갔고, 이 일로 수감되었다 풀려났는데 아버지 행방을 대라며 할머니를 잡아갔어요. 시어머니가 잡혀가니 어머니도 맨발로 아기업고 따라갔다가 같이 총살되었죠. 누나도 죽고. 고모 등에 업힌 여동생도 총에 맞아 시름시름 앓다 다섯살에 죽었습니다. 아버지는 후에 대전형무소에서 돌아가셨고요. 집도 한 채는 불태워 버리고 남은 한 채는 경찰에서 쓴다고 헐어 목재들을 가져갔어요. 난 이 때 충격에 노지 생활까지 겹치니 탈장에 소아 관절염으로 걷지를 못했어요.

15세에 고모할머니가 보살로 계신 인연으로 원천사에 갔어요. 이 절은 원래 수산사인데 고정선 주지 스님이 4·3 때 남로당원이던 고인수 스님을 며칠 숨겨준 것이 드러나 총살당하고 절은 뜯어서 해체되었다가 나중에 원천사를 세운 거죠. 그때 스님이 ‘아픈 것 낫게 해달라 하지 말고, 새로운 삶을 주신다면 부처님 뜻 받들어 살겠으니 도와 달라’고 기도방법을 가르쳐 주셨죠. 새벽에 일어나 절도 못하고 합장기도만 했지요. 기도생활 34일 만에 걷기 시작하고 49일째는 뛰어 다닐 수 있게 되었어요.

저는 부처님과의 약속으로 출가했습니다. 1953년 6·25전쟁이 끝나자 애월면에서 군인 전사자가 318명이나 되었어요. 수산봉 요사채에 있을 때, 애월면에서 위령제를 부탁 했어요. 4·3 때 죽은 군인 경찰가족까지 합쳐 417명이 되었죠. 비록 부모님은 경찰 군인에게 죽었지만 저는 출가자니까 초월해야지요. 1954년도부터 시작해서 55년 째 군경호국위령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남원읍 의귀리 속칭 ‘속냉이 골’에는 평화탁발순례단 푯말이 있다. 2004년 5월, 도법스님 일행이 이곳을 찾아 천도재를 지내며 세운 것이다. 1949년 1월10일 ‘의귀리 전투’에서 희생된 무장대원 수십 명의 주검은 근처 밭에 버려졌다. 몇몇 유족이 몰래 야트막한 무덤을 만들었으나 돌보는 이가 없어 가시덤불로 덮여 있었다.

지금은 스님 조언을 따라 뜻있는 사람들이 매년 8월15일 벌초를 하고 있다. 제주 4·3평화공원 묘역 어느 귀퉁이라도 대자대비 마음으로 시대를 중생과 같이 했던 16명 스님의 순교비가 세워지는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불교신문3571호/2020년4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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