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법 공부하고 그대로 회향하는 삶”

12연기 법문 듣고 불교 귀의
운명처럼 만난 대각사 포교원

30여년 신도회장으로 봉사해
부부가 대각사 부지 보시도

법화행자로 16년째 사경 수행
남편 비롯해 가족포교도 성공

부처님 가르침 배워서 행복해
많은 분들 사회봉사 실천하길

늘 온화한 웃음을 잃지 않는 김경애 오산 대각사 신도회장은 대각사 주지 정호스님 곁을 지키며 오산불교를 지탱해 왔다. 이날 김 회장은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불교신문에 힘을 보태고 싶다며 500만원을 쾌척했다. 신재호 기자
늘 온화한 웃음을 잃지 않는 김경애 오산 대각사 신도회장은 대각사 주지 정호스님 곁을 지키며 오산불교를 지탱해 왔다. 이날 김 회장은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불교신문에 힘을 보태고 싶다며 500만원을 쾌척했다.

오산 대각사(주지 정호스님)는 용인 처인구에 위치한 사찰과 오산 시내에 있는 대각사 포교원을 통해 수행과 전법이라는 두 개의 수레바퀴를 굴리고 있다. 특히 대각사 포교원은 인재불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불교 불모지인 오산에서 지난 30여 년간 어린이, 청소년, 청년, 신도회, 직장인 등 계층법회를 열어 포교하고, 행복한 이주민센터를 중심으로 한 다문화가족을 보살펴 왔다.

김경애(85, 법명 보원각) 대각사 신도회장은 포교원 초기부터 신도회장을 맡아 사찰을 항상 지켜주고 지지해줬다. 관음보살처럼 인자한 미소가 인상적인 김경애 회장을 3월23일 오산 대각사 포교원에서 만났다.

김 회장이 불자가 된 것은 부처님 12연기법 가르침 덕분이다. 사실 김 회장은 개신교 신자였다. 기독교 학교인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자연스럽게 교회를 다녔다고 한다. 군인이었던 남편을 따라 대구로 내려가서 지낼 때였다.

집안에 어려움도 있고, 전방부대서 근무하는 남편 소속부대에 사고도 생기고 힘든 일이 많아 유독 힘들어하던 시절이었다. 목사나 권사를 만나서 왜 그런가 하고 물어도 속 시원한 답을 얻지 못하고 그저 기도를 열심히 하라는 말만 되돌아왔다. 기도를 열심히 해도 답은 찾아지지 않으니 마음속에는 답답함이 쌓여갔다.

“외할머니는 독실한 불자였어요. 해마다 백중 때만 되면 저를 직접 찾아와서 기도비를 받아갔어요. 할머니가 서울에서 대구까지 내려왔는데, 제가 기독교 신자라고 기도 안하겠다고 할 수 없죠. 용돈 삼아 드리는 정도였는데, 어느 해에 할머니가 오시지 않았어요. 건강이 안 좋은가 하는 걱정이 들어 서울로 올라갔어요.”

마침 할머니는 법련사 백중 법회에 참석 중이었다.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법련사로 가니 법당은 이미 앉을 자리도 없었다. 마루 끝에 앉아 법문을 듣는데 12연기법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날 김 회장은 그토록 궁금했으나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질문에 대한 해답을 법련사에서 찾았다. 그리고 절에 다니기 시작했다.

서울로 올라온 뒤에는 봉은사나 도선사 등 법문을 잘한다고 소문난 절을 찾아다녔다. “법문을 듣기 위해 절에 가는 시간이 많아지니 어느 날 가부(家夫)가 저를 따라나섰어요. 늘 어디를 그렇게 다니나 생각했나봐요. 절에 가서 법문을 들어본 후에는 신행 활동하는 것에 대해 특별한 얘기가 없었어요.”

부처님 법을 배우면서 날마다 환희심 넘쳐나는 시절, 영암스님 주석할 무렵 봉은사에서 열심히 기도했다. 능인선원 불교대학에 입학해 9기로 졸업하고 법사대학원까지 마친 뒤 다시 경전반까지 연속이었다.

그 사이 오산으로 이사도 갔다. 작고한 부군이 오산에서 예식장 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도 공부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법사대학원만 졸업하고 서울까지 올라가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지키지 못했다. 오산에서 서울까지 버스를 타고 다니며 경전 강의를 들었다.

“예식장을 운영해야 하는데 제가 자꾸 서울에 가니 가부가 그러지 말고 가까운 곳에서 공부하면 좋겠다고 제지를 했어요. 야속하고 힘들었죠. 그래도 강의날이 되니 다시 가방을 들고 터미널로 왔어요. 가부와의 약속이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 버스표를 환불하고 되돌아오는데 오산역 앞 상가2층에 대각포교원을 발견했어요.”

불교공부를 그만둬야 되나 상심했던 순간 찾아낸 포교원은 기쁨 자체였다. <금강경> ‘17 구경무아분’까지 강의를 듣고 왔는데 대각사 강의 진도까지 딱 들어맞았다.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도회장 소임까지 맡게 됐다. 신심으로 부처님 법을 배우고 신행활동하는 모습을 눈여겨 본 스님이 중책을 맡긴 것이다. 처음엔 감당하기 어려워 고사했지만 스님 말씀을 마냥 거절할 수만은 없었다. 1년만 하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게 벌써 30년이 가까워졌다.

김 회장은 인자한 미소 속에 엄격함과 철저함을 담고 있다. 스님과 함께 대각사 산하단체 공동대표를 맡아 인재불사를 후원했다. 또 매월 신도회 산하 16개조 간부회의에 빠지지 않는 것은 물론 회의 자료도 직접 만들어 온다. “항상 맡은 부서에서 최선을 다하는 신도들과 자비로운 스님 덕분에 사찰이 순조롭게 전법 포교할 수 있었다”고 인사했다.

오랫동안 신행활동을 하면서 김 회장은 “가피는 분명히 있다. 신심을 다해 한 가지 원을 이루고자 노력하면 실현된다”는 것을 경험했다고 한다. “역전 상가 2층에서 지금 건물 지하로 이사를 와야 할 때도 있었어요. 좁은 포교원에서 힘들게 포교하는 스님과, 신도들을 보며 넓은 포교당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기도를 늘 했어요.”

기도는 이뤄졌다. 밤마다 잠자는 남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포교원을 도와달라고 기도가 통했다고 했다. “자수성가해서 한 번 움켜쥐면 놓을 줄 모르는 가부였는데, 어느 날 달라졌어요. 포교원 개원 3주년을 맞아 예식장에서 암도스님을 초청해 기념법회를 열었어요. 법회가 끝난 후 정호스님과 함께 바람을 쐬러 가자며 그동안 사놓은 산들을 둘러보더니, 평생 지은 죄를 참회하는 마음으로 대각사 부지를 보시했어요. 그 자리에서 ‘당신이 관세음보살’이라며 가부에게 3배를 했어요.” 지금 용인 대각사 불사는 바로 김 회장 부군의 발심으로 이뤄진 것이기도 하다.
 

코로나19로 한 달여 간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며 집에서 기도했다는 김 회장이 불교신문 독자들과 만나기 위해 모처럼 딸 이선미 씨와 함께 나왔다. 놀랍도록 닮은 모녀가 환하게 웃고 있다.
코로나19로 한 달여 간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며 집에서 기도했다는 김 회장이 불교신문 독자들과 만나기 위해 모처럼 딸 이선미 씨와 함께 나왔다. 놀랍도록 닮은 모녀가 환하게 웃고 있다.

남편을 시작으로 가족포교에도 성공했다. 큰아들은 퇴직 후 마애불 촬영을 시작하며 전시회까지 여는 등 사진으로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둘째 딸과 막내아들은 법화행자가 됐다.

매주 목요일마다 포교원에서 법화경 강의를 듣고, 출근 전 사경을 한다. 손자, 손녀, 외손녀도 법화경을 사경하고 기도 정진한다. 특히 영국에서 미술을 전공한 외손녀는 현대미술과 불화를 접목한 대각사 산신각 탱화를 직접 그리기도 했다.

김 회장 역시 법화행자로 16년 째 <법화경>을 수지 독송하고, 매일 오후9시 사경을 한다. 칠순을 맞아 아르헨티나 여행을 갔을 때도 법화경과 함께였다. 좋은 가르침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고 싶어 경전 100권을 사서 신도들에게 보시했다. 주지 정호스님에게 <법화경> 강의도 부탁했다. 덕분에 스님은 4년 째 신도들에게 법화경 강의 중이다.

“이제 귀가 좋지 않아 법문을 듣고 싶어도 잘 못 들어요. 앞에 앉아도 뒤에 앉아도 스님 말씀이 들리지 않으니 너무 속상해서 보청기 회사를 찾아갔어요. 한 사람 얘기만 듣고 싶은데 어찌하면 되냐고 하니 무선마이크를 하나 맞춰줬어요. 스님 전용 무선마이크인 셈이에요. 법문을 들을 수 있게 돼 정말 행복합니다.”

김 회장은 지난 세월 스님과 함께 해온 불교중흥과 인재불사의 가치를 강조했다. 정호스님은 행복한이주민센터,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사단법인 ‘나눔과 비움’ 시립지원아동센터, 건강지원센터 사회적기업 등 10개 단체를 운영하며 오산 시민과 불자들을 위해 노력을 경주한다.

가장 가까이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조력해온 김 회장 또한 후배 불자들에게 “부처님 법을 배운 그대로 사회에 봉사하고, 불교를 발전시키는 데 노력해야 한다”고 늘 얘기한다. 가족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할머니가 아닌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갚으라”고 하고 “포교하고 힘닿는 데까지 어려운 계층을 도와야 한다”고 가르친다.

요새 코로나19 때문에 절에도 잘 오지 못한다는 김 회장은 일상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낀 시간이었다고 한다. “행복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부처님 법을 만나 공부하고 다른 사람에게 회향해 온 그간의 삶 자체가 행복하고 감사한 것을 깨달았다”는 그는 “어려움도 따르지만, 많은 분들이 인과법을 제대로 깨달아 선업을 많이 쌓고 생활에서 행복을 느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불교신문에 발전기금과 함께 보내온 김경애 회장의 손편지.
불교신문에 발전기금과 함께 보내온 김경애 회장의 손편지.

오산=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사진=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불교신문3571호/2020년4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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