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伽藍과 뫼] ⑦ 북한산과 암자들
[伽藍과 뫼] ⑦ 북한산과 암자들
  • 박부영 주필
  • 승인 2020.03.31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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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창간 60주년 특별기획’
문수 보현 원효 의상, 處處 가람…이곳이 불국토

북한산은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젊은이와 외국인들을 많이 만난다. 도심과 가까운 수도 서울의 진산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천년 고찰(古刹)도 즐비하다. 불교를 탄압했던 조선의 500년 도읍지에 천년 고찰을 비롯해 산이 많은 것은 놀랍다. 진관사 삼천사 중흥사 태고사 상운사 등 고대부터 수많은 고승이 찾아 암자를 짓고 수행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수도를 지키는 수호신이었다. 

상운사에서 바라본 영취봉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 빛나도록 아름다운 절이다.
상운사에서 바라본 영취봉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 빛나도록 아름다운 절이다.
북한산을 한 눈에 담아낸 안내도.
북한산을 한 눈에 담아낸 안내도.

 

◇ 템플스테이 사찰음식 유명한 진관사

북한산은 한국불교 사상과 신앙의 원류인 원효·의상대사가 수행하고 그 이름이 봉우리에 새겨져 오늘에 이르는 불교 명산이다. 임제종 간화선 전통이 꽃을 피운 태고보우국사를 만나는 조계종의 산실이다. 의상능선을 따라 문수봉 아래 문수암, 비봉 아래 승가사, 발길을 북쪽으로 돌리면 화계사, 도선사 등 명찰이 즐비하다. 우뚝 솟은 봉우리는 원효 의상 문수 보현 등 고승과 불보살의 화현이니 산 전체가 불국토다. 

북한산을 찾아가는 길은 구파발역에서 시작했다. 지하철 3호선 2번 출구로 나서면 뒷동산처럼 야트막한 이말산이 나온다. 2km 가량 걸어가 하나고등학교를 지나면 진관사 앞 한옥촌이다. 원래 이 곳이 진관사였다. 한옥촌을 지나 진관사로 들어서면 북한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계곡물과 숲이 어우러진 정갈한 산 속 가람을 만난다.

서울 시내에서 멀지 않은 아파트 단지에 이처럼 고즈넉하고 깨끗한 사찰을 두고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정부나 기업에서 한국 전통문화를 소개할 때 가장 많이 소개한다. 템플스테이와 사찰 음식으로 외국인들에게 명성이 자자하며 내국인들도 가장 가보고 싶어 한다. 
 

진관사 입구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신도 모습.
진관사 입구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신도 모습.
진관사 전경.
진관사 전경.

진관사(津寬寺)는 동쪽 불암사, 남쪽 삼막사, 북쪽 승가사와 함께 서울 근교 4대 명찰에 속한다. 정치적 이유로 쫓겨난 고려 제8대 현종(顯宗)을 보호한 이 절의 진관대사 은혜를 갚기위해 현종이 이름을 붙였으며 고려 내내 왕실 보호를 받았다. 조선 시대에도 그 위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조선 초 비명에 간 고려 왕족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수륙대재를 거행한 것을 계기로 조선시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국행수륙대재 사찰로 지정됐다. 2013년 진관사 국행수륙재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매년 성대하게 거행한다.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 산실이었다. 2009년 칠성각 해체 복원 불사 과정에서 백초월스님이 숨겨둔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와 독립신문이 발견돼 진관사가 독립운동 산실임이 밝혀졌다. 세종대에는 한글 창제를 비난하는 관료와 학자들을 피해 진관사에 사가독서당을 두고 비밀리에 제작한 역사도 있어 진관사가 우리 민족사에 남긴 자취가 예사롭지 않다.

6·25 때 나한전 일원 3채만 남겨 놓고 모두 불탄 진관사를 오늘날의 명찰로 발돋움시킨 주인공은 비구니 최진관(崔眞觀)스님이다. 1928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난 진관스님은 이화여고 재학시절 서울 안국동 선학원을 다니다 인홍스님을 만난 인연으로 21세 되던 해 수덕사에서 출가했다. 1963년 서운스님의 권유로 진관사를 맡아 18년에 걸쳐 오늘의 가람으로 일신했다.

1990년대는 어린이집 유치원 복지관 등 사회 복지 중생구제 불사에 매진해 현대 사찰이 걸어야 할 길을 제시했다. 언론과 접촉을 마다하고 참선과 후학교육으로 가람을 지키며 비구니 원로로 존경받던 진관스님은 2016년 입적했다. 많은 방문객으로 인해 늘 분주하지만 차분하고 정갈한 자태를 잃지 않는 진관사다.
 

삼천사 마애불.
삼천사 마애불.
삼천사지에 남은 석재들.
삼천사지에 남은 석재들.

◇ 불교 복지 총본산 삼천사 

진관사 입구에서 능선을 가로질러 넘으면 삼천사 가는 초입이 나온다. 철거한 식당 잔해가 아직 남아 초입은 어지러웠다. 그러나 삼천교를 지나면 전혀 다른 비경이 펼쳐진다. 바위 바닥이 모두 비치는 계곡과 눈부시게 빛나는 산빛 계곡을 따라 일렬로선 삼천사가 어우러져 별천지를 연출했다. 

삼천사는 661년(신라 문무왕1) 원효대사가 개산하고 한 때 3000여 명이 수도할 정도로 번창했다고 한다. 원래 위치는 현재 삼천사에서 2k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부왕동암문으로 가는 중간에 터가 남아있다. 임진왜란 중에 소실 된 것을 마애여래입상 길상터에 진영화상이 복원하고 삼천사라 이름 지었다. 

현재 삼천사는 복지활동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삼천사로 가람을 중창한 성운스님은 한국불교 복지 선구자다. 종단이 아직 사회복지에 눈을 뜨기 전인 1980년대부터 이미 불교 복지에 뛰어들어 1994년 사회복지법인 인덕원을 설립하였으며 아동복지를 시작으로 어린이 청소년, 노인 등 계층과 장애인, 지역, 도서관, 교육, 의료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를 망라한다. 이처럼 사회 전 분야에 걸쳐 복지활동을 펴는 스님은 삼천사 성운스님이 독보적이다. 스님은 양적으로 다양한 분야를 아우를 뿐 아니라 시설 직원활동 등 질적인 면에서도 최고를 유지한다. 

성운스님의 자비행은 사찰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곳곳에 손 세정제 등과 안내문이 붙어 있어 바이러스에 세심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등산객에게까지 절에서 가꾼 채소를 아낌없이 주던 공양간은 코로나로 때문에 문을 닫았다. 보물 제657호 마애여래입상과 성운스님이 조성한 세존진신사리 불탑 앞에는 마스크를 쓴 신도 몇 명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굳건한 신앙심은 전염병도 어쩌지 못했다. 

부왕동암문과 비봉으로 올라가는 갈림길에서 의상봉 방향으로 올라가면 삼천사 터가 나온다. 거북형상을 한 비 받침대 등 석재물이 많이 남아 있었다. 돌로 쌓은 튼튼한 담장도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삼천사 계곡을 따라 비봉에서 내려오는 등산객은 심심치 않게 만났지만 부왕동암문으로 가는 사람은 없었다. 경사진 등산로를 올라가자 작은 암문이 나온다. 성을 따라 올라가면 의상능선이다. 뾰족 솟아오른 봉우리가 많고 철제난간과 줄을 타고 오르고 내려야하는 험한 코스다. 반면 경치는 장관이다. 건너편 원효봉과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등 능선이 다 보인다. 
 

태고사에서 바라본 중흥사.
태고사에서 바라본 중흥사.

◇ 천혜 요새, 넓은 터 중흥사 권역

부왕동암문을 등지고 내려서면 북한산에서 가장 터가 넓은 중흥사권역이다. 경사가 완만하고 계곡이 넓고 큰데다 높고 험준한 의상능선과 원효봉 능선이 자연방벽을 이루고 있다. 이 지역에 전통사찰과 성을 지키던 승군 주둔 사찰이 많은 이유다. 

그 중심이 중흥사(重興寺)다. 임진·병자 양란을 겪은 조선은 18세기 초부터 북한산성을 축성하면서 승군을 동원했다. 승군이 성을 쌓고 지키는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 조정은 아예 서울을 북한산에 옮겼다. 이른바 전시 대비 산성기지였던 셈이다. 그래서 성문 이름도 남대문 서대문 동대문을 거꾸로 붙여 대남문 대서문 대동문이라 지었으며, 행궁과 각종 무기고 군량시설까지 건립했다. 

중흥사로 가려는데 목탁소리가 들린다. 바로 위 언덕 쪽에서 나는 소리다. 문화재 발굴 터임을 알리는 줄이 처져 있고 돌기둥이 사방에 널려있다. 부왕사지다. 절 복원 원력을 세운 듯 보이는 천막 법당이 보인다. 

다시 왔던 길을 돌아서 중흥사로 갔다. 가는 길에 비석이 여럿 서있는데 암각이 눈길을 끈다. ‘북한승도절목(北漢僧都節目)’. 이 지역 승군을 총괄하는 도총섭이 지켜야할 규칙을 새긴 바위다. 북한산 안에는 그 전부터 승군이 주둔했다. 하지만 총괄하는 총섭을 북한산 내 사찰이 아닌 다른 곳에서 임명하다 보니 이에 반발하여 승군이 이탈하고 승군사찰이 무너지는 등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절목을 만들어 바위에 새긴 것도 이 때문이다.

곧이어 중흥사다. 백운대로 곧장 올라가는 초입에 자리했다. 중흥사를 새로 일으킨 지홍스님(포교원장)이 십수년 전 불사 원력을 세운 뒤 이 곳을 찾아 들려주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스님은 그 때 중흥사에서 바라보면 이 일대 북한산이 전부 보이는, 북한산에서 유일한 곳이라고 했다. 그런 지형적 이점 때문이었을까? 중흥사는 승군 총지휘자 팔도도총섭이 주둔하는 승군 본부였다. 위상에 걸맞게 136칸의 건물을 거느리고 숙종 대에는 350여 명의 승군이 주둔하는 대찰이었다. 
 

태고보우국사비.
태고보우국사비.

◇ 조계종, 임제선풍, 태고국사를 만나다

중흥사의 역사적 가치는 승군사찰이 아니라 태고 보우 국사가 주석하며 임제선풍을 뿌리내리려 했던 조계종 중흥지라는 측면이 더 중요하다. 태고 보우 국사는 오늘날 조계종 근간을 만든 중흥조다. 

신라 말 도의국사가 전래한 선은 고려 초 융성했지만 권력과 밀착하면서 점차 퇴색한다. 이를 되살린 인물이 보조국사 지눌이다. 고려 말 마침내 임제선풍의 간화선은 태고 보우국사 나옹화상 등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이번에는 수행방법 차원을 넘어 가람 배치, 스님들의 생활방식, 총림 운영체계 등 전 분야에 걸쳐 혁명적 변화를 불러왔다.

남종선 중에서도 가장 활발발하며 기개가 살아있고 선기가 번뜩인다는 임제선풍과 방장을 중심으로 모든 수행자가 하나의 소임을 맡아 책임지는 선원공동체, 틈나는 대로 선지식을 통해 공부를 점검하고 서로 탁마하는 공부방식, 그리고 선농일치는 억불 500년을 넘고 일제의 대처화를 극복하여 현대 조계종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 중심이 보우국사며 중흥사다. 

태고보우국사는 41세이던 1341년 중흥사에 머물며 후학을 지도하고 태고암(太古庵)을 지어 5년 동안 머물렀다. 당시 머물 때 ‘태고암가’를 지었다. 임제종 18대손 석옥청공(石屋淸珙)을 만나 법을 인가 받고 귀국한 뒤에도 대사는 중흥사에 머물렀다. 이런 인연으로 태고사에는 대사의 탑과 비가 있다. 

중흥사는 1904년 화재에다 그 뒤 큰 홍수에 씻기고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폐사한다. 태고보우국사가 주석했던 태고암은 1930년대 다시 한 번 한국불교 역사에 등장한다. 한국불교의 중심을 세우는 총본산건립운동은 일제의 조동종 계열에 맞서 임제종에서 민족불교 가풍을 찾았으니 북한산 태고사가 그 대안이었다.

그리하여 태고사를 수도 서울로 옮기는 형식을 취해 승려도성출입 금지가 풀리고 처음 사대문 안에 건립한 각황사를 태고사로 변경하고 총본산으로 삼았다. 그리고 태고사는 해방 후 1950년대 일제 잔재를 청산하여 부처님 청정수행 가풍을 다시 세우던 정화의 산실로 다시 자리하면서 그 이름을 바꾸니 바로 조계사다.

태고보우 국사의 사상과 정신이 조계사로 이양돼 청정비구승단의 새로운 한국불교 뼈대가 되었지만 아쉬움은 남았다. 원래 시원(始原)이었던 북한산이 중흥사는 폐허로, 태고암은 다른 종단 소유로 넘어갔던 것이다.

이에 조계사 주지를 지냈던 지홍스님이 서울 4방위에 각각 포교당을 개설하라는 은사 광덕스님의 유훈에 따라 중흥사 주변 토지를 매입하고 복원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10년 넘는 불사 끝에 어엿한 가람으로 다시 일으켰다. 폐사지를 복원하는 차원을 넘어 북한산에 다시 조계종의 샘과 뿌리를 되살린 셈이니, 역사적 종단적 의미가 예사롭지 않다.
 

노적사.
노적사.

◇ 반세기 가람 지킨 노스님 수행이 서린 노적사

태고사에 들러 태고보우국사 비와 탑에 예를 올리고 발걸음을 노적사로 옮겼다. 10년 만에 찾은 노적사는 계단이 없어지고 넓어졌다. 종각 공사가 한창이었다. 얼마 전 화재로 곤란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후속 불사인 듯 했다. 올 때마다 놀랍게 변하던 노적사다. 바위 밑에 작은 법당과 요사채 만 있던 30여 년 전 노적사가 머리 속에 맴돈다. 

조선 숙종 때 도총섭 성능대사가 주도해서 북한산에 승군사찰을 세울 때 진국사(鎭國寺)라는 이름으로 출발했다. 화재로 불탄 뒤 1960년대부터 재가자가 중심이 되어 다시 복원하여 노적사라고 이름 붙였다. 작은 암자에다 워낙 빈궁해 10명의 스님이 몇 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떠났다. 아무도 찾지 않던 노적봉 아래 작은 암자를 1977년 부임한 11번 째 주지 종후스님이 가꾸고 지금껏 지킨다. 

조용하고 절대 당신을 내세우지 않으며 하심(下心)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주는 스님이다. 스님은 사숙(師叔)인 월주스님(원로의원)과 친밀해 지구촌공생회 해외 봉사단 활동에 가끔 동행한다. 2018년 오랜 만에 두 분이 케냐를 함께 갔다가 한국대사관저에 초대를 받았다.

종후스님을 만난 대사는 그의 모친이 오랫동안 노적사 신도였으며 얼마 전 세상을 떠나 49재를 지냈다며 감사를 표했다. 스님도 대사도 처음 보는 사이였다. 스님은 “어느 분인지 알겠다”며 수줍게 말하고 다시 입을 닫았다. 그 감사인사가 스님은 몹시 쑥스러웠던 듯 했다. 

노적사를 지나면 중성문이 나온다. 중성문을 지나면 길이 평탄해진다. 그 길을 따라 차량도 진입한다. 수도 방어를 위해 성을 세웠는데 길이 완만하니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세운 문이다.

노적사 건너편 의상봉 아래에는 국녕사가 있다. 국녕사 역시 북한산 승군사찰 중 한 곳이다. 1998년 강남 능인선원 지광스님이 맡아 대대적인 불사를 했으며 노천에 조성한 국녕대불 ‘합장환희여래불(合掌歡喜如來佛)’ 좌상이 유명하다. 중국 돈황석굴 도상을 재현한 여래불은 건너편 원효봉에서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거대하다. 

대서문으로 내려오면 선학원 사찰 무량사가 있다. 고종 후궁 순빈 엄씨가 백일기도를 올려 영친왕 이은을 낳아 원찰로 삼았던 절이다. 계곡 쪽으로는 사찰 불사가 한창이다. 서암사(西庵寺)다. 역시 승군 사찰 중 한 곳이다. 일제시대 홍수에 쓸려가 방치된 것을 복원 중이다. 

계곡 건너편 원효봉 아래에도 절이 있다. ‘거북이 바위굴’이라고 불리는, 원효대사가 수행했다는 굴을 조성해 대웅전으로 삼은 선학원 사찰이다. 석조 미륵입상이 멀리서도 보인다. 

◇ 고양 한강 한 눈에 들어오는 원효봉

다시 북한산을 찾았다. 이번에는 원효봉으로 올랐다. 가파른 계단이 끝없이 이어졌다. 작고 낡은 암자가 맞이한다. 원효암이다. 원효대사 수도처에 암자를 세웠다고 한다. 이 곳 역시 승군 사찰이었다가 6·25 때 일부 소실됐다. 다른 종단 소유다. 좁고 험준한 곳인데도 불상이 잘 조성돼 있다. 많은 사람들의 시주 덕분이다. 공덕을 쌓은 사람들 명단을 새긴 비가 눈길을 끈다. 

조금 더 올라가면 원효봉이다. 멀리 고양시와 한강 그리고 건너편 의상능선이 들어오고 고개를 돌리면 노적봉 영취봉 백운대 만경대가 다 조망된다. 넓은 바위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싸온 음식을 먹고 사진을 찍으며 봄을 즐겼다. 건너편 의상봉 아래 국녕사 대불이 들어온다. 사진을 찍으려고 최대한 바위 끝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찔하다. 
 

원효봉에서 바라본 북한산 일대.
원효봉에서 바라본 북한산 일대.

◇ 갓바위 백률사와 함께 최고 약사도량 상운사 

백운대 방향으로 눈길을 주는데 지붕 위에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 자세히 보니 절이다. 상운사(祥雲寺)다. 원효봉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북문(北門)이 나온다. 북한동 방향에서 오는 대서문, 평창동 방향 대남문, 수유 방향의 대동문과 달리 그냥 북문이다. 한양에 대북문이 없듯 북한산에도 대북문이 아닌 북문이다. 북한산성에는 동서남북 중앙 방향의 문에다 그 사이 작은 문, 그리고 유사시 드나드는 암문 등 모두 13개의 성문이 있다.  

영취봉을 지나 백운대로 가는 길은 암벽이다. 일반 등산객들은 대서문 아래 보리사에서 대동사를 지나 백운대로 오른다. 계단이 끝없이 이어지는 험한 길이다. 

계단을 따라 대서문으로 가다 백운대 방향으로 길을 돌리면 상운사가 나온다. 영취봉 아래 자리한 상운사(祥雲寺)는 원효대사가 이 곳에서 수도할 당시 창건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상운사 역시 승군 사찰 중 한 곳이었다. 

조선 전기 조성한 불상을 모신 약사굴이 유명하다. 팔공산 갓바위, 경주 백률사와 더불어 3대 약사도량으로 꼽히는 명찰이다. 경내에 서면 영취봉 백운대 만경대 노적봉이 한 눈에 들어와 눈이 부실 정도로 장엄하다. 고려시대 석탑 부재를 이용해 만든 석탑과 석조, 아들을 낳게 한다는 영험담이 전해오는 400년 된 향나무 등 작은 암자이지만 볼거리가 넘친다. 

상운사는 1960년대부터 원로의원 명선스님이 찾아 폐허가 된 절을 복원해 조계종으로 등록했다. 이후 상좌 진만스님이 불사를 이어 받아 오늘에 이른다. 명선스님이 오랫동안 주석하는 여수 흥국사 역시 뒷산이 영취산이며 이순신 장군을 도와 해전을 치렀던 의승수군의 본부이니 봉우리 이름도 호국사찰의 역사도 두 사찰이 똑같다. 상운사 뒤편에는 ‘비구니 혜수(慧修)’라고 적힌 부도를 비롯 2기가 서있다. 한 때 상운사를 거쳐간 스님이라고 한다. 

분명 영취봉인데 등산객은 물론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도 염초봉(廉峭峰)이라고 적는다. 성능대사가 북한산과 여러 사찰을 정리하여 펴낸 책 ‘북한지’에 염초봉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본문에는 영취봉으로 쓰고 도상에는 염초봉이라 다르게 쓰는 바람에 염초봉이 굳어졌다. 영취산과 영축산은 한자가 같고 발음만 다르다. <법화경>에서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했다는 산이다. 

샛길을 따라 내려가면 대동사(大東寺)라는 작은 암자가 나온다. 태고종 소속 암자다. 인기척이 없다. 산 속 암자에서 인기척을 느끼기 힘든데 코로나 때문에 빈 암자가 더 많아진 듯 하다. 접근 하기 힘든 암자는 점차 사람 자취가 끊어지는데 산 아래는 또 새로운 불사가 한창이다. 북한동 방향으로 내려오면 보리사가 나온다. 상운사 진만스님에 따르면 최근 종단에 등록했다고 한다. 

여기서부터 평지다. 북한동 입구를 정비하기 전에는 이곳까지 음식점이 들어서 취객들로 북적였다.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하고 취객들 고함소리로 난장을 짓던 입구는 상전벽해했다. 노적사 아래 중성문 코 앞까지 들어섰던 음식점을 산 아래 집단시설 지구로 내려 보내고 공원으로 정비했다. 

북한산 공원 입구로 발길을 옮기다 뒤 돌아보니 백운대가 손짓 한다. 아직 돌아야할 사찰도 배워야할 역사도 많이 남았다. 북한산은 크고 넓다.
 

도총섭 규율을 새긴 절목 바위.
도총섭 규율을 새긴 절목 바위.

◼ 북한산 승군사찰 

숙종 때 화엄사 성능대사 산성 건립
11곳 승군주둔 사찰 두고 수도 방비

백운대(836.5m), 인수봉(810.5m), 만경대(787m)를 아울러 삼각산(三角山)으로 불리는 북한산은 서울의 진산이며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수도를 수호하는 천혜의 방벽역할을 했다. 한강을 놓고 패권을 다투던 삼국시대에도 북한산은 요충지였으며 고려 시대에는 북 오랑캐 침입시 대피하던 요새였다. 

조선은 병자호란 이후 1711년(숙종 37) 북한산 일대에 산성을 축조하고 북한산성이라 불렀다. 북한산 능선 8km를 따라 이어지며 14개의 성문을 짓고 승군이 주둔하는 11개의 사찰과 2개 암자를 두었다. 그 사찰은 승대장이 주둔하는 중흥사를 비롯해 용암사, 보국사, 보광사, 부왕사, 원각사, 국녕사, 상운사, 서암사, 태고사, 진국사다. 이들 사찰을 승영(僧營)이라고 불렀다. 

오랫동안 논의만 무성하던 축조 계획을 단숨에 실현시킨 이는 승군 도총섭 성능대사였다. ‘계파(桂坡)’ 성능대사는 구례 화엄사 벽암 각성(碧岩覺性) 문하에서 3년 동안 수행하고, 화엄사 장육전 화주승으로 숙종의 지원을 받은 것을 인연으로 신임을 받았다.

숙종은 장육전을 ‘각황전(覺皇殿)’이라 사액했다. 숙종의 신임을 받은 성능대사는 1711년 팔도도총섭 지위를 맡아 북한산성 축성을 책임졌다. 선대부터 오랫동안 논의만 무성하던 산성 축성 과업을 성능대사가 맡아 단숨에 해결했으니 대사의 능력을 짐작하고 남는다. 

성능대사는 북한산성 축성이 완료된 후 다시 화엄사로 가서 ‘산성기사(山城紀事)’를 집필하였으며 ‘북한지(北漢誌)’를 찬하고 판각하여 오늘날 까지 그 전모가 상세하게 전한다. 그 후 대사의 자취는 알지 못하며 태고사 위 봉성사에 부도가 있다.

중흥사가 도총섭이 주석하는 사령부 역할을 했으며 각 사찰에는 수승(首僧)과 승장(僧將)을 1명씩 두었으며 승병은 8도 사찰에서 1년에 6차례 번갈아 뽑아 올렸다고 한다. 승군은 북한산성을 쌓고 완공 후는 성문과 수문, 장대, 창고 등을 지켰다. 승군은 1894년 갑오경장 이후 폐지됐다.
 

승군사찰 부왕사지.
승군사찰 부왕사지.

고양=박부영 주필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3570호/2020년4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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