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불교 전통을 인도에서 찾으려는 시도”

이차돈 순교로 신라불교 공인
중국 양나라 영향으로 공론화

황룡사 장육존상 및 협시상
흥륜사 미륵불상이 대표적

‘삼국유사’에 장육존상 기록
아육왕 석가삼존상 불사 발원
완성 못해 모형 신라로 보내

인도 아육왕상 바닷길 통해
남조 거쳐 신라로 왔음을 시사

<현우경(賢愚經)>의 순교(殉敎) 설화를 차용한 듯한 이차돈(異次頓)의 희생을 계기로 신라의 법흥왕은 527년(혹은 528년과 529년)에 불교를 공인한다.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417~458) 때의 묵호자(墨胡子)와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479~500) 때의 아도화상(阿道和尙)이 고구려에서 일선군(一善郡, 경상북도 선산)으로 내려와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면서 사적으로 불교를 전한 지 수 십년 후의 일이다. 고구려와 백제와는 달리 신라에서의 불교 공인은 그만큼 힘든 과정을 거쳤다. 
 

신라 574년경 황룡사 금당의 석조대좌, 대좌의 크기로 장육존상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신라 574년경 황룡사 금당의 석조대좌, 대좌의 크기로 장육존상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신라의 불교 공인에 이차돈이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521년에 양(梁)나라에서 신라 사신들이 귀국할 때 양나라 사신과 함께 온 승려 원표의 역할도 한몫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독실한 불교도인 양 무제의 뜻이 원표를 통하여 전달되었던 듯 양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고려한 신라에서는 불교에 대한 공인을 공론화하고 급기야 국가적인 차원에서 수용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분위기는 신라에 공식적으로 불교를 전한 나라가 양나라이며, 6세기 중반에 조성된 불상들도 양나라 불상의 조형적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추측하게 한다. 실제 신라 영역인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 절터에서는 양나라 수도 남경(南京)에서 출토된 금동불삼존상과 매우 닮은 6세기의 금동보살삼존상이 출토되었다. 금동보살삼존상이 양나라 작(作)인지 신라 작인지에 대해서는 단정할 수 없지만, 6세기에 있었던 양나라와 신라 간의 불상 교류를 알려주는 증거임에는 틀림이 없다. 

신라에서 불상이 조성된 것은 진흥왕(540-576) 때부터 확인되는데, 법흥왕 때 시작되어 진흥왕의 544년에 완공된 신라 최초의 사원인 흥륜사(興輪寺)의 금당에 봉안된 미륵불상과 553년에 창건된 황룡사(黃龍寺)의 금전(金殿, 금당)에 봉안하기 위해 574년에 조성된 장육존상(丈六尊像)과 협시상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신라 6세기 후반 조성된 황룡사 금당에서 출토된 불두 나발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신라 6세기 후반 조성된 황룡사 금당에서 출토된 불두 나발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중 황룡사 장육존상은 고려시대 1238년(고종 25)에 몽골에 의해 절이 전소될 때 함께 불에 탔으나 정확한 봉안 위치를 알려주는 금당과 석조대좌(573~574)가 황룡사 절터에 남아 있고, 장육존상의 머리 부분이라고 생각되는 4편의 나발(螺髮)이 금당 터에서 출토되기도 하였다. 석조대좌는 윗면을 가공한 넓적한 형태의 자연석으로, 두 발과 광배를 고정하는데 사용했던 3개의 홈이 아직도 남아 있다. 

고려시대 13세기 말에 편찬된 일연스님(1206~1289)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장육존상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새로 대궐을 용궁龍宮 남쪽에 세울 때, 황룡이 나타나서 절로 고쳐 황룡사라 하였다. … 얼마 있지 않아 남해(南海)로부터 거대한 배가 떠 와서 지금의 울주시 곡포에 이르렀다. (안을) 조사해 보니 편지가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서축(西竺, 서인도)의 아육왕(阿育王, 아소카왕)이 황철(黃鐵) 5만 7천근과 황금 3만 푼(分)을 모아서 석가삼존상을 주조하려다가 이루지 못하자 배에 실으면서 인연 있는 나라에 도착하여 장육존상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고 축원하였다. (이 편지와 함께) 1존의 불상과 2존의 보살상의 모형을 보내왔다. … 금과 철을 경주로 가지고 와서 574년 3월에 장육존상을 주조하였는데, … 또 다른 책에는 아육왕이 서축의 대향화국(大香華國)에서 붓다께서 입멸하신 지 100년 후에 태어나 진신(眞身)으로 공양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하여 금철(金鐵) 약간 근을 거두어 (장육존상을) 세 번 주조하려다가 성공하지 못하였다. … 왕이 배에 실어 바다로 보내어 남염부제(南閻浮提)의 16대국(大國), 5백 중국(中國), 1만 소국(小國), 8만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신라에 이르러 진흥왕이 문잉림(文仍林)에서 그것을 주조하여 완성하니 아육왕이 그제야 근심이 없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 인도 마가다국 마우리아왕조의 아육왕(阿育王, 아소카왕, 서기전 273~232년 재위)이 인도에서 장육불상을 만들려고 했다는 것과 석가불삼존상의 모형을 보내왔다는 기록은 아소카왕 때에는 아직 불상을 만들지 않던 무불상(無佛像) 표현의 시기이기 때문에 허구적인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쿠샨시대 2~3세기에 조성된 석조불입상으로, 파키스탄(고인도) 간다라에서 출토됐다. 높이가 2.45m이다. 현재 페샤와르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쿠샨시대 2~3세기에 조성된 석조불입상으로, 파키스탄(고인도) 간다라에서 출토됐다. 높이가 2.45m이다. 현재 페샤와르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고대의 불교도들이 아소카왕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그가 세운 석주(石柱, 아소카석주)와 불탑(佛塔)을 중심으로 인도 불교가 확산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석가모니불상도 만든 왕으로 인식되었던 듯하다. 이러한 생각은 법현(法顯)이 인도 구법 여행 중에 상캬시아(Sankasya)국(지금의 산카샤)에서 아소카왕이 만든 장육입상을 실견했다는 <불국기(佛國記)>(413~416)의 기록에서 보듯이 이미 인도 사람들도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아육왕상을 조성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 속에서 조성된 인도의 아육왕상은 동남아시아의 바닷길을 통하여 중국 남조로, 다시 신라로 이어졌고, 마침내 황룡사에서 아육왕상 즉 장육존상이 조성되었다. 황룡사 장육존상의 모델인 석가삼존상과 불상 재료가 아소카왕에 의해 배에 실려서 남해를 통하여 신라로 들어왔다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일이지만, 아육왕상의 도상적인 루트가 동남아시아의 바닷길과 관련되는 것은 분명하다. 

현존하는 아육왕상도 실크로드와 그 영향을 받았던 섬서성 서안과 하남성 낙양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해상 루트와 관련되는 중국의 남조에서만 확인되고 있다. 이는 아소카왕과 관련된 <아소카바다나(Asokavadana)>가 서진(西晉)에서 306년에 안법흠(安法欽)에 의해 <아육왕전(阿育王傳)>7권으로 번역되고, 양나라 때인 512년에 건강(建康, 남경)에서 승가바라(僧伽婆羅)에 의해 <아육왕경(阿育王經)>10권으로 다시 번역되어 아소카왕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남조를 중심으로 유행하면서 가능하였다. 

중국 남조에서 아육왕상의 조성 기록은 4세기부터 확인된다. 아소카왕의 넷째 딸이 만든 동진(東晋)의 양도(揚都, 남경) 장간사(長干寺) 금상(326~334년 추정), 아소카왕이 직접 조성한 동진의 형주(荊州, 강릉) 장사사(長沙寺) 금상, 5세기 초에 아육왕상으로 인식된 동진의 여산(廬山) 문수사리보살금상(文殊師利菩薩金像) 등이 이러한 예이다.

실제 남조의 중요한 도시였던 사천성(四川省) 성도시(成都市)에서는 두승일(杜僧逸)이 죽은 아들을 위하여 양나라 551년에 만든 아육왕상이 서안로(西安路)에서, 북주(北周) 문제(文帝)의 아들인 우문초(宇文招)가 익주(益州, 사천성 성도) 총관(561~565)으로 있을 때 만들었던 아육왕상이 만불사지(萬佛寺址)에서 각각 출토되었다.

두승일이 조성한 아육왕상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八’ 모양의 콧수염을 지닌 인도 쿠샨시대 간다라불상의 얼굴 모습을 하고 있는데, 통견 방식으로 입은 법의도 간다라 불상의 그것과 같이 목에서부터 다리까지 U자를 그리며 흘러내리고 있다. 이들 통하여 볼 때 양나라 사람들이 생각했던 아육왕상은 쿠샨시대 간다라 불상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양나라 551년에 조성된 아육왕상은 높이가 48.5cm로, 성도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양나라 551년에 조성된 아육왕상은 높이가 48.5cm로, 성도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574년, 신라의 진흥왕에게 인식된 아육왕상, 즉 아소카왕이 만든 석가모니불상의 모습은 두승일이 만든 아육왕상과 많이 닮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황룡사 장육존상이 특정한 불상 이름이 아니라 기념비적인 크기인 ‘장육(장육=1장 6척=16척, 약 5미터)’을 강조한 것도 ‘장육존상)丈六尊像)’과 ‘장팔존상(丈八尊像)’으로 명명되었던 남조의 아육왕상과 관련될 가능성이 높다. 

황룡사의 장육존상을 발원했던 진흥왕은 아소카왕과 그가 만든 아육왕상에 대한 이야기를 양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각덕(覺德, 549년 귀국) 등 신라 승려들로부터 전해 들었을 것이다. 양 무제가 양나라의 아소카왕이 되고자 했듯이 진흥왕은 황룡사 장육존상, 즉 아육왕상 조성을 통하여 신라의 아소카왕이 되고자 하였다. <삼국유사>의 기록과 같이 장육존상의 조성 배경 속에 아소카왕과의 특별한 인연을 강조한 것도 다 이러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法興王, 514~539) 때부터 진덕여왕(眞德女王, 647~653) 때까지 불교식 왕명을 사용한 것도 인도 불교의 진종(眞種) 사상을 체제화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황룡사 장육존상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조성된 것이다. 당시 양나라에서 조성된 많은 불상 중에서 특별히 아소카왕이 만든 석가모니불상을 신라 불교의 중심 사원인 황룡사의 주존으로 봉안한 것도 신라 불교의 전통을 중국 양나라가 아니라 인도에서 찾으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불교신문3570호/2020년4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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