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주
이봉주

스물세 살에 나와 결혼한 아내는 늘 생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다녔다. 첫 아이가 여섯 살이 되었을 무렵 어느 날 아내가 파마를 하고 내 일터까지 찾아와서 들뜬 모습으로 “여보 나 어때?”하고 물었다. 아내가 생전 처음 한 파마였는데 예쁘다거나 잘 어울린다거나 듣기 좋은 말로 맞장구 쳐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광판리에서 콩 팔러 온 아줌마 같네”라고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을 해 버렸다. 그 날 이후로 오늘까지 나는 아내의 파마머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지나 온 길을 뒤돌아보면 얽히고 설켰던 그 모든 것이 분명해 진다. 지난날의 사소한 오해나 엉뚱한 말 또는 깊게 생각하지 않은 말로 사태를 그르쳤던 모든 것을 헤아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소리나 감촉이 없지만 말과 행동을 통해서 향기, 감촉, 무게를 상대방에게 느끼게 한다. 지난 날 내가 무심한 마음으로 던진 한 마디가 가시가 되어 아직도 아내의 가슴 속 깊게 박혀 있는 것이다. 

시를 쓰면서 나는 시 속에다 많은 거짓말을 썼다. 내 시를 보고 내가 셋방살이를 전전하면서 사는 줄로 알았던 한 문우가 사실은 내 실제 생활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난 어느 날, 내 다른 시를 보고 이 시는 사실이냐고 물어 온 적이 있다. 그런데 나는 실생활에서는 거짓말을 서툴게 하면서 살아왔다.

기분 좋은 거짓말은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믿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여자에게는 ‘예쁘다’,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 같은 말일 것이다. 결혼하고 40여 년을 살을 비비고 살고 나서야 내 말 한 마디가 아내에게 상처가 되기도 하고 위로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얼마나 무지했던가. 

어느 날 차를 함께 타고 가다가 신호 대기 중에 문득 아내가 물었다. “저기 저 여자하고 나하고 누가 나이가 더 들어 보여?” 아내가 가리키는 차창 밖을 내다보니 한 눈에 보아도 그 여자는 아내보다 대여섯 살은 더 젊어 보였다. 나는 당신이 대여섯 살 더 젊어 보인다고 거짓말을 했다.

저녁을 마주 앉아 먹다가 아내가 또 물었다. “내 얼굴이 몇 살 정도 들어 보여?” 몇 년 전 큰 수술을 받은 후 아내 얼굴이 갑자기 더 많이 늙었다. 그럼에도 나는 오십 대밖에 안 들어 보인다고 거짓말을 했다. 

날이 갈수록 아내의 물음은 주름살만큼이나 늘어만 간다. 아내의 물음이 늘어나는 만큼 내 입술은 굳은살이 점점 더 두꺼워진다. 오늘 TV를 함께 보다가 아내가 또 묻는다. “나 많이 늙었지?” 나는 화병에서 활짝 핀 장미꽃 한 송이를 들어 보였다. 불립문자다. 거짓인 줄 알면서도 갈대처럼 마음이 흔들리는지, 나약해져 가는 아내를 보면서 마음 한 구석이 짠해진다.

[불교신문3570호/2020년4월1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