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 창시한 중국 선승
제자들에게 가르침 전한
편지글 모은 ‘수행 교과서’

“절대로 말없이 침묵하는
곳에 떨어져 있어서 안 돼”

대혜법어

대혜스님 지음 / 김태완 역주 / 침묵의향기
대혜스님 지음 / 김태완 역주 / 침묵의향기

“무엇보다 일부러 깨달음을 기다리면 안 됩니다. 만약 일부러 깨달음을 기다린다면, ‘나는 지금 어리석다’고 스스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리석음을 붙잡고 깨달음을 기다린다면,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이 지나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다만 화두를 거론할 때 잠시 정신을 차리고 ‘무슨 도리인가?’하고 살펴보십시오.”

간화선을 창시한 중국 송나라 때 선승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스님의 남다른 가르침이다. 역대 조사들이 남긴 검증된 화두인 공안을 철저하게 타파해야 할 과제로 제시한 대혜스님의 정신은 오늘날 한국의 출재가 선원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선사 어록 <대혜보각선사어록> 전 30권을 완역한 김태완 무심선원장이 역주로 참여한 가운데 최근 출간한 <대혜법어>는 대혜스님이 출재가 제자들에게 법(法)에 관한 가르침을 글로 써서 보낸 편지글 40여 편을 모은 책으로서 간화선의 교과서이자 탁월한 참선의 지침서다.

특히 대혜스님은 이 편지글들을 통해 간화선의 본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참선이란 어떤 것인지를 알려 준다. 또한 불법을 보는 안목, 방편의 언어와 진실에 관한 안목 역시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여기에 간화선을 하는 올바른 방법에 관해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은 물론 불가사의한 진리를 돌아보도록 지도하는 등 불법을 보는 안목을 길러 곧바로 본래면목을 깨닫도록 인도한다. 또한 수행자들이 빠지기 쉬운 잘못된 선병(禪病)들과 잘못된 공부 자세를 상세히 지적해 알려 줌으로써 도중에 길을 벗어나 헛된 세월을 낭비하지 않도록 돕는다.

“힘을 얻게 되면 무한히 힘이 들지 않게 되고, 힘이 들지 않는 곳에서 무한한 힘을 얻습니다. 이와 같이 될 때 분별심은 억누를 필요 없이 저절로 고요해집니다. 비록 이와 같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말없이 침묵하는 곳에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 병을 없애지 못하면, 분별심이 아직 멈추지 않았을 때와 다름이 없습니다.”
 

중국 송나라 선승 대혜스님이 출재가 제자들에게 법(法)에 관한 가르침을 글로 써서 보낸 편지글을 모은 '대혜법어'가 최근 출간됐다. 사진은 중국 항저우 경산사(徑山寺)에 봉안돼 있는 대혜 종고스님의 진영.
중국 송나라 선승 대혜스님이 출재가 제자들에게 법(法)에 관한 가르침을 글로 써서 보낸 편지글을 모은 '대혜법어'가 최근 출간됐다. 사진은 중국 항저우 경산사(徑山寺)에 봉안돼 있는 대혜 종고스님의 진영.

더욱이 <대혜법어>가 간화선의 교과서일 뿐 아니라 선(禪) 공부의 필독서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개인의 공부 상황에 맞춰 구체적인 안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지식을 만나지 못한 상태로 공부를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빠지기 쉬운 함정이 수없이 많다.

만약 선지식의 바른 말씀을 듣는다고 해도 수행자가 자기 식으로 그릇되게 이해해 버릴 가능성 역시 매우 높다는 것이 스님의 우려다. 이 같은 경우들에 대해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사례들이 풍부하게 실려 있는 이 책은 선 공부에 반드시 필요한 참고서라 할 만하다.

대혜스님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선과 간화선에 대해 체계적으로 정리한 <간화선 창시자의 선(禪)>의 저자이기도 한 김태완 무신선원장은 “당송대 백화문 사전을 비롯해 여러 가지 관련 사전을 두루 참고했으며, 책에 인용된 수많은 문장들의 원전도 빠짐없이 찾아보고 확인하는 등 최대한 정확하고 엄밀하게 번역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했다”면서 “대혜스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고 선 공부, 간화선 공부에 도움이 되도록 수많은 도움말도 주석으로 덧붙였다”고 밝혔다.

중국 안휘성 선주 영국현에서 태어난 대혜스님은 16세 혜제대사에게 출가했다. 처음에는 조동종 스님을 찾아다니며 공부하다 담당 무준화상과 원오 극근선사 밑에서 차례로 수학하며 큰 깨달음을 얻었다. 50세가 되던 해인 1138년 승상 장준의 요청으로 경산에 주석하면서 선풍을 진작시켰다.

하지만 주화파의 모함을 받아 1141년 귀양길에 오른다. 10년을 형주에서 보내고 다시 6년을 매주에서 보낸 스님은 유배지에서도 사대부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간화선을 지도했다. 사면된 이후 경산사 주지를 맡아 원오선사의 종지를 크게 선양했으며 당시 따르는 제자들이 2000여 명에 이르렀다.

스님의 문하는 대혜파로 불리며, 같은 원오선사의 제자인 호구소룡 문하의 호구파와 쌍벽을 이루며 번창했다. 1163년 세납 75세로 입적한 스님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황제는 보각(普覺)이란 시호와 보광(普光)이란 탑명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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