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로 읽는 금오신화] <4> 발 딛고 선 세계에 깨달음 있네
[불교로 읽는 금오신화] <4> 발 딛고 선 세계에 깨달음 있네
  • 오대혁 시인 · 문화평론가
  • 승인 2020.03.28 08: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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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데 이별해야 하고 
살고자 하나 죽음 찾아들어 
오대혁
오대혁

우리는 현실적 삶에 집착하여, 죽음을 부정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만복사저포기’를 보면 내세를 긍정하는 것 같고, ‘이생규장전’을 보면 현세의 생을 긍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런데 김시습은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 화합한다(生死涅槃常共和)”라고 했고, “어찌 생사가 가고 옴이라는 분별이 있겠는가?(何會有生死去來)”라고 했다.

우주 법계의 근본 본체인 진여의 이체(理體)로 생사를 본다면 본각(本覺)의 묘유(妙有)일 따름으로 본다. 생사불이(生死不二)의 관점을 지니고, 생을 긍정하고 사를 긍정함으로써 생사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김시습의 입장과 달리 현세의 생을 집착하는 ‘이생’과 내세의 생을 긍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만복사저포기’의 ‘양생’은 문제적 인간이요, 측은함의 대상이다. <금오신화>의 두 번째 작품, ‘이생규장전’은 생사에 대한 집착에 헤매는 인간들이 참되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송도에 사는 이생은 담장 너머로 아리따운 최랑을 훔쳐본다. 연인은 밤마다 꽃들이 만발하고, 벌과 새들이 다투어 재잘거리는 공간에서 사랑을 나눈다. 그런데 이별의 장애를 딛고 결혼을 한 이들의 공간에 홍건적이 쳐들어온다. 친척과 노복들이 흩어지고 부모의 해골이 들판에 낭자하게 흩어진다. 

희로애락 현실에 부처 있어
현상세계 외면 말고 직시해야

사랑이 존재하던 현실 공간에서 벌어진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은 사랑과 가족을 철저히 파괴한다. 아리땁던 여인도 도적의 손아귀에 무참히 죽어간다. 현실은 자유로운 연애와 즐거움이 존재하는 세계이면서도, 이별의 아픔, 전쟁과 죽음의 고통도 함께 존재하는 세계다. 아내를 잃고 눈물을 훔치던 이생은 지난날 최랑과 함께 노닐던 일을 생각하며 ‘완연히 한바탕 꿈과 같음(宛如一夢)’을 깨닫는다. 꽃다운 청춘 남녀의 사랑과 고통의 삶은 한바탕 꿈인 것이다. 

그런데 소설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달빛이 비치는 공간에 죽은 최랑이 환신(幻身)이 되어 나타난다. 이생은 그녀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지나치게 사랑한 까닭에 그녀의 존재를 의심하거나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다. 살육의 땅에 흩어진 시신도 찾지 못하던 이생은 아내를 간절히 그리워하여 귀신을 불러들였던 것이다.

둘은 부모님의 해골을 수습하고, 제사를 드리면서 금슬지락을 즐긴다. 그렇게 채워진 환상의 시공간은 저승 세계의 법령을 어길 수 없다며 떠나는 최랑과 이별하는 순간 사라져버린다. 끝내 이생은 여인을 추모하다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다. 이생의 죽음은 온갖 연기의 삶 속을 헤매던 자가 집착을 놓아버린 상태를 나타낸다. 

윤회와 열반이 다르지 않고
부처와 중생도 다르지 않아

김시습은 말한다. “만약 생사를 논한다면 곧 이것은 보현보살의 경계인 것이요, 만일 열반을 논한다면 곧 이것은 윤회에 헤매는 중생인 것이다. 부처의 열반과 중생의 윤회는 서로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무명의 참성품이 곧 부처의 성품이고, 환화의 빈 몸이 곧 법신이다.”(‘대화엄법계도서’)

생사윤회나 열반이 다르지 않으며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희로애락으로 버무려진 현실 속에 부처가 존재한다. 이는 조동오위 사상의 ‘편중정(偏中正)’과 관련을 맺으며, ‘이생규장전’은 그와 같은 사상적 구도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정위(正位), 곧 깨달음은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발 딛고 사는 이 현상 세계에 존재함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생규장전’은 사랑하는데 이별해야 하고, 살고자 하나 죽음이 찾아드는 이 현실을 똑바로 보라고 말한다. 그 세계 속에서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대지와 산하 모두 자기인 것이고, 삼라만상이 모두 한 빛이어서 시방세계가 해탈의 문 아닌 것이 없다.”(<십현담요해>‘회기’)라는 김시습의 불교적 가르침이 잘 나타나는 작품이다.

[불교신문3570호/2020년4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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