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찾아 헤매던 시절 지나니
마음속 고독 사라지는 자리에
타인의 고독 품어줄 온기 자라

혜인스님
혜인스님

학창시절 즐겨보던 한 다큐멘터리 프로에서는 재밌는 실험들을 하곤 했다. 한 사람이 횡단보도를 건너다 멈춰서 하늘 한 편을 바라본다. 사람들은 투명인간을 지나치듯 각자의 길을 가기 바쁘다. 이번엔 두 사람이 횡단보도를 건너다 멈춰서 함께 하늘 한 편을 바라본다. 겨우 몇 사람이 둘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흘겨볼 뿐 대부분은 역시 길을 건너기 바쁘다.

이번엔 세 사람이 함께 동시에 하늘 한 편을 바라본다. 그러자 어느새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길을 잊고, 건널목 중간에서 세 사람이 바라보는 곳을 모두가 보게 되는 신기한 실험. 이 장면이 지금까지도 뇌리에 생생한 이유는 혼자서 하늘 한 편을 바라보던 첫 번째 사람에게서 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바라보는 곳을 함께 봐주는 사람이 없다는 군중 속의 고독 같은 걸 느꼈었던 것 같다.

세 사람만 한 곳을 바라보면 세상도 바꿀 수 있겠구나. 이후로 나의 20대는 나와 같은 곳을 보며 함께 걸어가 줄 누군가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때는 연애에 빠져 부모님이 걱정하실 정도로 붙어 다녔고, 내가 가는 길에 있을 법한 관심 가는 것들은 뭐든 해봐야 직성이 풀렸으며, 국적을 가리지 않고 친구를 사귀는 데 열을 올린 적도 있고, 그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라면 아프리카 초원 너머 원주민 마을에까지 찾아가는 것도 서슴지 않았었다.

그러다 당도하게 된 곳은 우리나라 땅 끝에 있는 한 절. 거기에 계신 스님들 모습에서 나와 같은 곳을 봐주고 있는 누군가를 보았던 걸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동행자를 찾았다는 마음에 덜컥 머리를 깎아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아, 나와 같은 곳을 보며 함께 걸어가 줄 누군가라는 건 없구나.’ 모두가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는 줄 알고 들어왔던 승가에서도 난 어느샌가 또 미아(迷兒)가 된 느낌이었고, 그렇게 20대 청춘을 지나보내고 나서야 깨닫게 된 건 내가 엉뚱한 답을 찾고 있었다는 것. 답을 잃어버린 그때, 무언가에 이끌리듯 홀연히 탁발을 떠났다.

이틀째 되던 날, 홀로 떠난 내 걱정에 한달음에 달려와 끝까지 동행해준 도반. 그 도반과 함께 걸망 둘러매고 산을 넘는 데 지나가던 차가 우리 앞에 선다. 산을 넘을 때까지 우릴 태워주신 아버지뻘쯤 돼 보이시던 거사님이 해준 말.

“지금은 무일푼으로 함께 다녀줄 친구가 있는 게 좋을지 몰라도 그 친구들도 결국엔 다 헤어지게 됩디다.” 평생 함께 의지할 수 있는 도반이 돼주어 고맙다던 그 스님이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열흘간의 여정을 마치고 나서야 느끼게 된 하나는 그동안 내가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는 것. 어딜 보는지도 모른 채 함께 바라봐줄 사람을 찾는다는 게 말이 되나. 그리고 둘은 앞으로 어디를 바라봐야겠다는 목적지가 조금은 분명해졌다는 것. 마지막 셋은 그 목적지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수밖에 없는 곳이라는 것.

그렇게 나는 청춘의 고독에서 자유로워져갔다. 그렇다면 세 사람이 함께 바라보던 곳을 어느샌가 모두가 함께 보게 되는 그 재밌던 건널목 실험은 어떻게 된 걸까. 도반이 수행의 전부라던 부처님의 말씀은 어떻게 된 걸까.

전법사 교육을 받으며 어떤 스님이 되고 싶냐는 강사의 질문에 ‘가장 어두운 곳에서 세상을 밝히는 스님’이라면 좋겠다고 했었다. 그때 안면이 없던 한 도반이 한 말. ‘세상을 밝히는 일은 내 마음을 밝히는 일부터.’ 그 다큐멘터리의 실험만큼이나 재밌던 내 청춘의 인생실험 결과는, 내 마음속 고독이 사라지는 자리에 타인의 고독을 품어줄 온기가 자라난다는 것. 인생은 고독한 동행이다.

혜인스님 고양 중흥사

[불교신문3569호/2020년3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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