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지역문화, 특산물 연계한 포교 필요해”

나눔 실천하며 이웃에 다가가
불교와 스님에 대한 벽 낮춰

평생 절에 다닌 노보살들에게
무료 효도관광 매년 선물하고

입춘 복주머니 동지팥죽 달력
해맞이 행사 때마다 이웃 보시

적광전 건립, 비로자나불 봉안
시내 포교당에 어린이집 개원

이천은 도농복합도시다. SK하이닉스 공장을 비롯해 도시가 형성돼 있으며 읍면으로 가면 시설채소, 화훼농가가 많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충남 홍성에 이어 두 번째로 한우농가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도시와 농촌이 어우러진 이곳은 기독교와 카톨릭 신자들이 많다. 30년 넘는 역사를 가진 YMCA와 천진암, 주어사지 등 천주교성지도 있어 두 종교의 자생력이 뛰어나다. 설봉산 영월암(주지 보문스님)은 이천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3월19일 영월암을 찾아갔다.

부처님오신날 준비는 이미 시작됐다. 해마다 영월암은 대웅전과 아미타전에 달 오색등을 직접 만드는데, 올해는 코로나19로 찾아오는 신도들이 많지 않아 스님들이 팔을 걷어부쳤다. 3월19일 영월암 공양간에서 주지 보문스님을 비롯해 스님들과 행자, 신도 2명이 함께 영가등을 만들고 있다.
부처님오신날 준비는 이미 시작됐다. 해마다 영월암은 대웅전과 아미타전에 달 오색등을 직접 만드는데, 올해는 코로나19로 찾아오는 신도들이 많지 않아 스님들이 팔을 걷어부쳤다. 3월19일 영월암 공양간에서 주지 보문스님을 비롯해 스님들과 행자, 신도 2명이 함께 영가등을 만들고 있다.

이천 대표사찰답게 영월암엔 많은 불자들과 시민들이 찾아온다. 1월1일엔 설봉산에서 해돋이를 보려고 500~600명이 올라온다. 스님은 12월31일부터 마당에 장작불을 지피고, 대추차와 뜨거운 물, 가래떡과 귤, 사탕을 준비해 누구나 먹을 수 있게 한다. 12시부터는 누구나 재야의 종을 칠 수 있게 했다. 입춘에는 2000여 개 복주머니를 만들어 나눠주고, 칠순을 넘긴 불자들에게는 3000원 씩 세뱃돈도 넣어 준다.

매년 부처님오신날엔 2500여 명이 올라와 비빔밥을 먹고 돌아간다. 동지에는 800인분 팥죽을 끓여 시청과 주민센터, 노인정 등에 돌린다. 영월암을 오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단주를 선물하는데 그 개수가 매년 2000개가 넘는다.

노보살들도 극진히 모시는데, 매년 무료로 효도관광을 보내준다. 몇해 전에는 대만여행비 일부를 지원해주기도 했다. 보문스님은 “평생 절에 다니면서 시주하고 영월암을 지켜준 오랜 신도들에게 대접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모시고 다닌다”고 했다.

스님은 “불교가 이웃 주민과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고 했다. 작은 친절과 보시가 불교 이미지를 개선하고, 결국엔 이웃들을 부처님 품으로 이끌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란 확신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잠시 중단됐지만, 일요법회와 어린이법회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어린이법회가 열리는데, 10~2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봄가을엔 기차여행을 떠나고 여름엔 템플스테이, 겨울엔 스키캠프를 함께 한다.

더 나아가 스님은 이천 시내 포교당에 연내 어린이집 개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포교당은 1986년 김관식 신도회장을 비롯해 신도들이 시내에 80여 평 부지를 매입해 2층 건물을 시주했다. 당시 주지 성곡스님이 3층 규모로 확대해 영월유치원을 운영했다고 한다. 그 뜻을 되살려 불교어린이집을 운영, 젊은 불자 부모들이 선호하는 보육시설로 자리매김하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지난 시간 가람수호를 위한 노력은 놀라울 정도다. 2012년 재임하면서 도량정비 원력을 세웠다는 스님은 어떻게 불사를 할까 고민했다. 답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영월암과 이천의 역사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스님은 전문가 집단을 모아 학술연구에 들어갔다. 또 2016년 대웅전 해체 복원하면서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조선시대 중건된 영월암이 1907년 항일무장투쟁이 일어난 시기에 전소됐다는 것이다. 또 대웅전 부재가 이천 관아의 부재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일제가 1914년 이천 관아를 해체하고 경찰서를 세우면서, 이천 관아 부재로 향교를 지었다.

향교가 1948년 무너지면서 당시 영월암 주지 스님이 부재를 싣고 올라와 대웅전을 건립했다는 것이다. 또 대웅전 자리에서 아궁이 2개와 굴뚝 2개 흔적을 찾아냈는데, 인법당처럼 불상을 모시고 스님이 기거했던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적광전에 봉안된 비로자나불상의 좌배와 광배는 통일신라시대 말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적광전에 봉안된 비로자나불상의 좌배와 광배는 통일신라시대 말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에 이어 종각, 아미타전을 해체복원하고, 토사로 무너지기 직전의 석축을 다시 쌓았다. 삼층석탑을 아미타전 뒤로 이운했다. 화엄 종찰의 면모를 되살리기 위해 가건물을 없애고 그 자리에 적광전을 새로 지었다. 불사 중 주춧돌이 발견되면서 원래 법당터라는 것도 알게 됐다. 불상 없이 전해지던 석조 좌대와 광배의 조성 시기가 영주 부석사 비로자나불과 유사한 것을 확인하고 그에 맞는 비로자나부처님도 봉안했다.

2019년 공사를 끝낸 적광전에 스님은 천불탱화를 봉안한다.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불을 중심으로 천불 명호와 시주자 명단도 함께 기록할 계획이다. “천불봉안에 동참한 제자들이 영월암을 지키는 호법신장이란 생각으로 모든 시주자 이름을 기록한다”며 “한국불교미술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운 불사”라고 말했다.

도자기로 유명한 이천지역 문화의 특징을 살려, 도자기 벽화도 준비하고 있다. 비로자나불 좌우에는 도자기로 구운 사천왕 탱화를 모시고, 적광전 외벽은 <부모은중경> 탱화를 새긴 도자기를 붙인다. 앞서 스님은 사천왕상 2장, <부모은중경> 12장, 아미타내영도 도판 4장, 반야용선도 4장 등을 도자기로 구운바 있는데, 이들 도판을 적광전과 아미타전에 각각 봉안한다.

스님은 “세미나와 해제복원조사를 통해 가람을 어떻게 정비할지 답을 찾았다”며 “사찰의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적광전을 건립했고, 이 시대 문화와 불교를 결합시켜 탱화와 도자기를 결합했다”고 말했다. 또 “많은 사찰들이 관광화를 위해 건물을 짓기보다 지역문화와 특산물을 불교와 연결해 지역의 리더로서 문화를 어떻게 보존하고 전승할지에 대해 고민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 인터뷰/ 영월암 주지 보문스님

“IMF 이후 중단된 지역봉축 되살려

보문스님
보문스님

보문스님은 2009년 처음 주지 소임을 맡은 이래 지금까지 10년간 이천불교를 이끌어왔다. 스님은 아주대 전자공학과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1988년 동국대 불교학과에 진학해 23세에 출가했다. 상월사, 송광사, 통도사 극락암 선원에서 16안거를 성만하는 등 20여 년간 대중살이를 한 스님은 이대로 선방에서 수행하면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다 20094월 뜻하지 않게 영월암 주지 소임을 맡았다.

영월암 주지 임명을 받았을 때 스님이 처음으로 한 생각은 세상에 공짜는 없구나였다. 사실 스님은 영월암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적이 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스님을 따라 영월암으로 왔다. 입적한 정오스님, 지금 용주사 주지 성법스님이 영월암에서 지냈는데, 어린 스님을 정말 예뻐했다고 한다. 스님들이 다정하게 아껴준 덕에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물으면 스님이라고 할 정도였다. 어린 시절을 떠올린 스님은 부처님께 빚 갚겠다는 생각으로 주지 소임을 맡았다.

그리고 스님은 10년간 정말 많은 일을 했다. IMF 시절인 1997년 이후로 사라졌던 이천지역 부처님오신날 봉축행사를 되살린 게 대표적이다. 20094월 주지 소임을 맡고 얼마 되지 않아 스님은 이천불교사암연합회 회의에 참석했다. 부처님오신날 직전인데 이천에 봉축행사를 하지 않아서 의아했다. 봉축법요식 끝난 후에도 만났는데, 아무도 봉축행사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이듬해도 마찬가지였다. “부처님 은덕으로 사는데 1년에 1번 봉축행사는 해야 하지 않겠냐싶은 마음에 스님들에게 제안했다. 문화를 통해 시민들에게 불교를 알리는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게 안타까웠다. 계기를 마련한 것은 스님이었다.

2010년 말 우리나라에 구제역이 발생하면서 적지 않은 소, 돼지가 살처분됐다. 충남 홍성에 이어 두 번째로 축산업 인구가 많은 여주 이천지역에서 총 37만 두 가운데 35만 두가 매몰됐다. 정성으로 키우던 가축을 잃은 농가의 시름이 깊어지면서 스님은 20111월 가축위령제를 기획했다.

사암연합회 이름으로 행사를 개최하고, 실제 주관은 보문스님이 도맡았다. 대웅전 앞마당에 천막을 치고, 농촌지도소의 협조를 받아 200여 농가마다 위패를 만들었다. 이천시장과 축산업자 500여 명이 참석해 슬픔에 빠진 농가를 서로 위로했다.

위령제를 발판으로 스님은 봉축행사로까지 역량을 확대해나갔다. 십수년간 봉축행사를 하지 않은 까닭에 사암연합회 스님들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스님이 집행위원장을 맡아 행사를 주도했다. 행사비용을 모연하고, 지역 시민단체들과 결합해 행사준비에 착수했다.

전영일 공방에 장엄등을 의뢰하고, 함께 활동하던 이천문화원 산하 이천 오층석탑환수위원회와 예총 등과 행사를 키웠다. 2011년부터 3년간 탑돌이문화제와 부처님오신날 봉축행사를 해오다가 이후 사암연합회 힘으로 봉축행사를 이어오고 있다.

2016년 이천경찰서 경승단도 꾸렸다. 이천시청과 경찰서가 이전하면서 경찰서에 경승실을 내준다고 했는데, 막상 경승으로 활동하겠다고 나서는 스님이 없었다. 당시 이천경찰서장을 만난 스님은 경승이 15년 이상 없다는 얘기를 듣고, 연합회 스님들을 설득해 경승위원회를 꾸렸다. 경승위촉식 후 경찰서에서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도 열었다.

이듬해에는 경찰서에 법당도 마련했다. 경찰서에서 부지를 마련해줘 14평 규모로 이동법당을 열고, 경승불원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곳에서 스님은 경승들과 1달에 1번 법회를 보고, 가을에는 불자들과 성지순례도 다녀온다.

군포교도 빼놓을 수 없다. “이천에 4개의 사령부가 있어서 별이 15개가 떠다닌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라고 말하는 스님은 사암연합회 차원에서 군법당 지원이 활발하다고 했다. 사안연합회와 군승이 월1회 회의를 해 서로 소통하고 지원하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보물 822호 영월암 마애여래입상
보물 822호 영월암 마애여래입상

영월암은…

영월암은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당시 이름은 북악사였다. 고려시대 나옹스님이 중건했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1774년 영월스님이 중창해 영월암이라고 이름 붙였다. 보문스님은 “삼국시대 설봉산은 북악산이라는 이름이었는데, 북악산은 영주 부석사가 있는 산의 이름과 같다”며 “영월암이 부석사와 마찬가지로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화엄 사상을 중시하는 사찰”이라고 설명했다.

삼국시대 이천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점령하고자 애썼던 지역이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의상대사는 이곳에 호국호법을 뜻하는 화엄종찰 북악사를 건립했다. 당시 북악사 사세는 영축총림 통도사만큼 컸다고 한다.

영월암에는 보물 822호 마애여래입상이 전해진다. 7~8m 높이 바위에 가득 채운 마애여래입상은 고려 초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스님은 성흥산성 인근에 위치한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황산벌이 내려다보이는 관촉사 은진미륵과 마찬가지로, 영월암 마애여래입상 또한 미륵부처님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군사요충지로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이천지역 스님과 민중들이 발원해 조성한 미륵불상이라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영월암 스님들은 설봉산성을 관리하고 남한산성까지 지키며 호국, 호법의 역할을 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천=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불교신문3569호/2020년3월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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