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의 숲’에 들어 중 노룻을 익히고 다졌다”

1957년 봄 해인사 선원 방부
경전번역 원 세워 강원 입학
“운허스님 만나 雲水僧 대신
원고 쓰는 일에 발 적셨다”
‘불교사전’ 편찬에도 참여해

법정스님이 경전번역에 대한 원력을 세우게 된 계기가 된 인연이 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장경각. 이곳에서 스님은 ‘대장경도 모르면 빨래판 같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법정스님이 경전번역에 대한 원력을 세우게 된 계기가 된 인연이 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장경각. 이곳에서 스님은 ‘대장경도 모르면 빨래판 같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1957년 동안거를 해제한 법정스님은 쌍계사 탑전을 떠나 잠시 선운사에 머문다. 이 사실은 스님이 사촌동생 박성직 거사에게 보낸 1957년 3월 30일 편지에 확인되고 있다.

“지금 이곳은 전라북도 고창군에 있는 선운사라는 절이다. 별로 마음에 흡족치 않아, 다른 곳으로 옮기려던 것이 이제껏 약간의 사정으로 머무르게 되었다. 그래서 차분히 자리 잡으면 편지하려던 게 지금껏 늦었다. 많이 기다렸을 줄 안다. 머지않아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길 판이다.”

이런 글을 남긴 스님은 1957년 7월 26일 해인사에서 다시 편지를 보낸다.

“이곳 해인사는 그 유명한 <팔만대장경>이 보존되어 있는 국보사찰로서 이름난 곳일 뿐더라, 한국 절 중에서 가장 질서가 잡힌 곳이다. 현재 스님 네는 한 60명 가량 계시는데, 목탁을 치고 염불을 하는 그런 절은 아니고 순전히 공부만 하는 절이다. 그러기 때문에 비교적 규율이 엄격한다.”

편지 말미에는 세속과의 인연을 끊은 수행자의 결기도 보인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는 그저 먼 날에 죽어 버렸거니 생각하여라. 실은 죽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편지는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안 하는 것이 좋다. 이곳 여러 스님 네들이 덜 좋아할 뿐 아니라 공부에 방해가 되니까...”

해인사에서 법정스님은 해인강원 3기생으로 입학해 공부를 하게 된다. 그리고 1959년에는 통도사에서 자운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한다. 그러니 해인사에서 출가수행자로서의 교육을 받은 셈이다. 법정스님은 해인사에서의 생활을 자신의 저서 여기저기에 남긴다. 해인강원 동기생인 여수 흥국사주지 명선스님(조계종 원로의원)은 “법정스님은 동기생들보다 경전공부에 열의를 보였고, 대중생활도 모범적으로 하는 도반이었다”고 회고했다.

해인사는 법정스님에게 수행생활의 기초를 다지는 경전공부를 한 의미 있는 도량이다. <버리고 떠나기>라는 책의 ‘아직 끝나지 않은 출가(出家)’라는 글에는 법정스님이 퇴설선원(현재 퇴설당)에서 참선수행을 하고 있을 때 고려대장경과의 특별한 인연과 그 후 경전번역에 큰 뜻을 둔 사연이 소개돼 있다.

“또 한 가지 일은 방선(放禪)시간에 법당 둘레를 거닐고 있었는데, 시골에서 온 듯한 아주머니 한 분이 장경각에서 내려오면서 나를 보더니 불쑥 팔만대장경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방금 보고 내려오지 않았느냐고 하자, ‘아, 그 빨래판 같은 것이요’라고 되물었다. ‘빨래판 같은 것’이라는 이 말이 내 가슴에 화살처럼 꽂혔다. 아무리 뛰어난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이라 할 지라도 알아볼 수 없는 글자로 남아 있는 한 그것은 한낱 빨래판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받은 충격으로 그해 여름 안거를 마치고 나는 강원으로 내려가 경전을 배우기 익혔다. 국보요, 법보라고 해서 귀하게 모시는 대장경판이지만, 그 뜻이 일반에게 전달되지 않을 때는 한낱 빨래판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나를 끝없이 부추겼다. 어떻게 하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쉬운 말과 글로 옮겨 전할 것인가, 이것이 그때 내게 주어진 한 과제였다.”

그렇게 법정스님은 경전을 공부에 매진했고 우리나라 최초였던 운허스님이 주도했던 <불교사전> 편찬사업에도 참여한다. 첫 번째 수필집 <영혼의 모음>의 ‘그 여름에 읽은 책’에서라는 글에서는 해인사 소소산방(笑笑山房)에서 ‘화엄경 십회향품’을 독송하면서 한여름 무더위를 잊은 채 지냈는데 그해 봄 운허 노사(耘虛老師)에게서 <화엄경> 강의를 듣다가 십회향품에 이르러 보살의 지극한 구도정신에 감읍(感泣)해서라도 했다. 그러면서 “언젠가 틈을 내어 십회향품만을 따로 정독하리라 마음먹었더니 그 여름에 시절인연이 도래(到來)해서 조석으로 장경각(藏經閣)에 올라가 업장(業障)을 참회하는 예배를 드리고 낮으로는 산방(山房)에서 독송을 했었다.”고 밝혔다.

그 소소산방은 산방이라지만 방 하나를 칸으로 막아 쓴 좁은 공간이었으며 서까래가 내다뵈는 조그만 들창과 드나드는 문이 하나밖에 없는 방으로 답답했다고 한다. 그래도 법정스님은 “저 디오게네스의 통 속보다는 넓다고 자족했었다.”며 “또 한 가지 고마운 것은 앞산이 내다보이는 전망이었다. 그것은 3백호쯤 되는 화폭이었다.”고 밝혔다.

법정스님은 스스로도 해인사에 지냈던 시절을 ‘12년 동안’으로 계산하며 “중으로서 잔뼈가 굵었다”는 표현도 쓰고 있다. 이 이야기는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라는 책의 ‘박새의 보금자리’라는 글에서 ‘의지했던 사찰’이라며 회고하고 있다.

“(하동 쌍계사에 이어) 다음으로 의지해서 살던 곳이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이 봉안된 장경각 담 밖에 있는 퇴설당 선원이었다. 큰절에서 많은 대중과 어울려 살게 되니, 보고 듣고 느끼면서 배울 것이 만치만 무가치한 일에 시간을 쏟아버리는 그런 아쉬움도 있었다. 어쨌든 이곳 가야산 해인사에서 열두 해를 살면서 말하자만 말하자면 중으로서 잔뼈가 굵은 셈이다. 아침저녁 큰 법당에서 대중과 함께 예불을 마치고 나서, 따로 장경각에 올라가 절을 하면서 기도하던 그 정진이 지금도 좋게 기억된다. 기도란 무슨 소원을 비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활짝 여는 수행이란 걸 겪었던 시절이다. 해인사에서 운허스님을 만나게 된 인연으로 내 중 살림살이는 크게 바뀌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걸망 하나 메고 이 산 저 산 찾아다니는 운수승(雲水僧)이었는데 이때부터 원고지 칸을 메우는 일에 발을 적시게 되었다. 좋게 말하면 수도생활이 사회성을 띠게 되었다고 하겠지만, 억새풀처럼 시퍼렇던 기상이 가시게 되었다.”

이후 <불교사전> 편찬에 참여한 이야기를 <버리고 떠나기>라는 책의 ‘아직 끝나지 않은 출가(出家)’에 담담하게 썼다. “통도사에 계신 운허(耘虛)스님에게서 한 통의 서찰이 왔다. 자금을 댈 시주가 나타나 숙원사업이던 <불교사전>을 만들까하는데 통도사에 와서 편찬 일을 도와 줄 수 없겠느냐는 사연이었다. 기꺼이 동참했다. 60년 초봄부터 이듬해 여름 사전이 출간될 때까지 편찬 일을 거들었다. 이 기간에 4.19와 5.16을 겪었다. 이때 운허스님과 맺은 인연으로 해서 원고지 칸을 메우는 업이 지속되었다.”

운허스님의 부름을 받아 통도사에서 <불교사전> 편찬불사에 나섰던 법정스님은 출가 후 처음 세상소식을 접하게 되고 관심도 가지게 된다. 스님은 ‘아직 끝나지 않은 출가(出家)’라는 글에서 그 이야기를 계속 회고했다.

“양산 통도사 원통방(圓通房)에서 불교사전 편찬 일을 거들면서, 비로소 신문을 보고 라디오 뉴스를 들었다. 움직이는 세상과 접하게 된 것이다. 절에 들어오기 전에 익혔던 없이 서서히 움트기 시작했다.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통도사에서 지내는 그해 4.19를 맞이했었다. 종교의 역사의식에 대해서 골똘하게 생각하면서 세상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시기였다.”

법정스님은 해인사에서 지낸 일화를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대중생활을 하는 스님 중에 공동체 정신을 흐리게 하는 스님을 보기도 하며 공동체 생활이 때로는 수행에 방해가 되기도 했다고 했다. 또 법정스님이 본지인 불교신문(당시에는 대한불교였다)에 쓴 글 ‘굴신운동(屈伸運動)’이 당시 성철스님이 찾아오는 신도들에게 3000배를 하라고 한다는 것을 비판했다고 하여 곤혹을 치른 이야기도 하고 있다.

숱한 사연이 있었음에도 법정스님은 해인사에서의 수행생활에 대해 “가야산에서 내 생애의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을 보냈다. 출가하여 처음 중 노룻을 익히고 다지던 중요한 시기”라며 각별한 감회를 수필집 <텅빈충만>에서 ‘가야산 후배들에’라는 제목으로 소회하고 있다.

여기에서 법정스님은 전기가 들어오기 전 명등(明燈)을 켜던 시절 퇴설당에서 들려왔던 조실 금봉(金峰)선사의 화두에 대한 가르침인 “본래면목은 그만두고 어떤 것이 그대의 현전면목(現前面目)인고?”라는 일갈(一喝)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 또한 주지 청담스님의 정화정신과 주지 자운스님의 율장정신을 배웠다.

강주였던 명 명봉(明峰)스님으로부터는 처음 경전을 배우며 경(經)을 보는 태도에 대해 배웠는데 “이미 이루어진 틀에 박힌 남의 주석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전체의 맥락과 흐름과 사상을 캐내야 한다”며 “뜻은 대승에 두고 행동은 소승으로 하라는 그때의 가르침을 귓등으로 흘려듣고 말았는데, 세월이 지날수록 그 말씀의 뜻이 다가서고 있다.”고 회상했다.
 

해인사 시절 사촌동생 박성직 거사와 함께 찍은 사진.
해인사 시절 사촌동생 박성직 거사와 함께 찍은 사진.

그러면서 법정스님은 후배들에게 “출세간 공부를 진지하고 열의 있게 하고 경전 배우고 익히는 일 못지않게 수행자로서 지녀야 할 행동양식도 함께 갖추라”며 “자기에게 주어진 소임을 소홀히 하는 사람이 유능한 수행자가 될 수는 절대로 없으니 그 소임을 통해서 자신에게 잠재된 기능도 일깨우고 수행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도 함께 닦을 수 있다.”고 당부한다.

또한 스님은 “중노릇이란 한 해 이태로 그칠 일이 아니고 평생의 일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제대로 배우고 알차게 익혀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반거충이로 어정쩡하면 하루하루가 무료하고 무의미하게 된다.”고 지적하며 “순간순간이 바로 나를 형성하는 일이고 또한 구체적인 수도생활임을 명심한다면,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지낼 수 없으니 시간을 아껴서 활용할 줄 모르고 무익한 일에 홀려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글 말미에는 구호 같은 글귀로 해인강원 후배들의 건승을 독려하기도 했다. “학인들이여, 법보의 긍지를 지니고 밝고 맑게 살 것을 조석으로 염원하라. 그리고 거듭거듭 출가하라!”
 

법정스님이 방부를 들였던 퇴설선원(현재 퇴설당) 모습.
법정스님이 방부를 들였던 퇴설선원(현재 퇴설당) 모습.
법정스님이 출가 후 강원생활을 했던 궁현당의 현재 모습.
법정스님이 출가 후 강원생활을 했던 궁현당의 현재 모습.

취재협조 : (사)맑고 향기롭게

해인사 · 여수=여태동 기자 tdyeo@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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