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덕으로 온세상 두루 비추는 청정법신”

봉은사 1855년 간경소 설치
1년 후 화엄경 80권 등 불서간행하고
3479판 경판 보관 판전 건립

30년 후 비로자나불 그려 봉안
대화사 응석스님 밑그림 제작
왕실안녕 기원하며 상궁 발원

본존불 원만하고 당당한 형상
광배 주위 화염 역동적 표현
권속들 자세와 표정 안정적

봉은사(奉恩寺)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 수도산(修道山)에 자리한 도심 속 산사(山寺)이다. 명실상부 서울의 대표적인 전통사찰로, 법당 안팎으로 늘 참배객들이 가득하고 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는 기도도량이기도 하다. 신라 때 연회국사(緣會國師)가 ‘견성사(見性寺)’라는 사명으로 창건했으며 이후 왕실 사찰 조성과 운영을 위한 성전사원(成典寺院)으로 선정될 정도로 신라 사회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곳이었다. 
 

비로자나불도, 1886년, 봉은사 판전 내부 중앙 후불벽에 봉안되어 있다. 금빛 광배를 갖추고 지권인을 결한 비로자나 부처님의 형상이 돋보인다. 대화사 응석스님이 밑그림을 그렸다.
비로자나불도, 1886년, 봉은사 판전 내부 중앙 후불벽에 봉안되어 있다. 금빛 광배를 갖추고 지권인을 결한 비로자나 부처님의 형상이 돋보인다. 대화사 응석스님이 밑그림을 그렸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성종의 비인 정현왕후가 선릉(宣陵, 성종의 능)의 수비를 위해 중창하고 성종의 은혜를 ‘받들어 모신다’는 의미에서 ‘봉은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선릉의 능침 추복 사찰의 기능을 수행하던 봉은사는 명종대에 이르러 문정왕후와 보우스님이 불교 중흥 정책을 펴면서 그 위상이 더 높아진다.

봉은사는 선종의 수사찰(首寺刹)이 되어 교종의 수사찰인 봉선사와 함께 당시 불교계를 이끌었다. 안타깝게도 병자호란 때 당우(堂宇)가 대부분 전소되었으나 지속적인 재건을 통해 면모를 다시 갖추었다. 그 후에도 정조(正祖) 때 전국 사찰의 승풍과 규율을 감독하는 5규정소(糾正所)의 하나로 선발되는 등 불교계에 큰 역할을 했다. 

봉은사에서는 조선말인 1855년에 간경소(刊經所)를 설치하고 1856년에 화엄경 80권 등의 불서(佛書)를 간행했으며 3479판에 이르는 경판을 보관할 판전(板殿)을 지었다. 간경소 설치에서부터 경판의 제작, 그리고 판전의 건립에 이르기까지의 불사는 화엄 강백 남호영기(南湖永奇)스님을 중심으로 인허성유(印虛性維), 제월보성(霽月寶性), 쌍월성활(雙月性闊), 송암대원(松巖大遠), 월하세원(月霞世元)스님 등이 주축이 되었다. 시주자로는 왕실에서부터 관직을 지닌 세도가, 일반민간, 승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에서 동참했는데, 특히 왕실의 후원이 주목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봉축시록 현판(奉祝施錄 懸板)(1856)에 매우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현판을 보면, ‘主上殿下李氏 王妃殿下金氏 錢文伍百金 大王大妃殿下金氏 錢文伍百金 王大妃殿下趙氏 錢文參百金 大妃殿下洪氏 錢文貳百金’이라고 구체적으로 쓰여 있다. 당시 왕이었던 철종과 왕비 철인왕후,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 왕대비 신정왕후 조씨, 그리고 대비 효정왕후 홍씨가 시주했다고 적었으며 시주 금액까지 기재했다.

일례로 ‘오백금(伍百金)’은 당시 포 250필 정도의 가치이며 요즘으로 환산하면 2-3천만 원에 해당한다. 이렇듯 경판 제작과 판전 건립은 왕실의 후원이 있을 정도로 의미가 큰 불사였으며 봉은사가 조선말 불교 교학의 중심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판전의 편액은 당시 봉은사에서 수행 중이던 추사 김정희가 쓰기도 했다. 

판전은 봉은사에서 현재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로, 내부의 동·서·북벽에는 경판을 보관하기 위한 판가가 설치되어 있다. 판가에는 3000여 점의 경판이 차곡차곡 채워져 있다.

판전은 경판을 보관하는 장경각(藏經閣)인 동시에 예불을 드리는 불전이기도 하다. 정면 중앙에 불단을 마련해 불상을 모셨고 그 뒤 후불벽에 ‘비로자나불도’를 봉안했다. 그리고 정면을 기준으로 향 좌측에는 제석천과 범천, 대자재천, 예적금강 등 화엄 신중 39위를 한 화면에 그린 ‘신중도’를 두었다. 

본 회에서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그림은 판전의 후불화인 ‘비로자나불도’이다. 이 그림은 세로 302.3cm, 가로 236.5cm의 화면에 그려진 비교적 큰 화폭의 불화이다. 광서 12년인 1886년 4월에 그려 점안했다. 화면의 중앙에는 본존인 비로자나불이 수미단 위 연화대좌에 지권인(智拳印)을 결하고 앉아있다.

지권인은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모아 왼손의 둘째 손가락을 편 후 오른손으로 둘째 손가락의 윗부분을 감싸 쥔 형태의 손 모양으로 깨달음을 상징하는 비로자나의 수인이다. 신광(身光)의 내부는 금으로 칠해 마치 비로자나 부처님의 몸에서 빛이 퍼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부처님의 앞에는 좌협시 문수보살과 우협시 보현보살이 연꽃 위에 반가좌한 자세로 앉아있는데, 문수보살은 여의(如意), 보현보살은 연꽃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부처의 좌우에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시립하고 있다. 그림의 사방에는 이들을 수호하는 사천왕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은 각각 비파, 칼, 용과 여의주, 칠층 보탑을 든 채 호법신으로서의 위용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판전 내부의 신중도와 경판 일부, 화엄신중 39위로 구성된 신중도와 빼곡히 쌓인 경판들이 보인다.
판전 내부의 신중도와 경판 일부, 화엄신중 39위로 구성된 신중도와 빼곡히 쌓인 경판들이 보인다.

비로자나불은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의 주불이자 청정법신으로 지혜와 덕으로 온 세상을 두루 비춰주시는 광명의 부처님이다. 대승불교의 중심 경전인 화엄경의 주존이기도 하다. 따라서 판전에 비로자나 부처님을 그려 모신 것은 이곳이 화엄경을 비롯한 많은 불법 경전을 모신 공간이라는 점과도 잘 부합한다.

전통적으로 화엄계 불화는 비로자나불의 모습을 위주로 표현한 비로자나불도, 일곱 장소에서 아홉 번의 설법을 묘사한 칠처구회도(七處九會圖), 연화장세계를 형상화한 화장찰해도(華藏刹海圖) 등이 있다. 그중에서 비로자나불도는 독존도, 비로자나불과 좌우 협시보살을 그린 삼존도, 비로자나불 삼존과 보살·성문중·호법신 등을 함께 그린 설법도 등의 형식이 있다. 판전의 ‘비로자나불도’는 구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설법도 형식의 그림에 해당한다. 

봉은사 판전의 ‘비로자나불도’는 19세기 중후반 서울·경기에서 주로 활동하던 저명한 화사 경선응석(慶船應釋)스님이 밑그림을 그렸고 영명천기(影明天機)스님이 채색을 주도했다. 그런데 화기를 보면, 경선응석스님의 법명 앞에 ‘출초(出草)’라고 소임이 적혀 있다. 불화에서 ‘출초’란 말 그대로 ‘초를 낸다’는 뜻으로 ‘밑그림을 그린다’는 의미이다.

불화에서 밑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림의 주제와 도상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이렇듯 기본이 되는 밑그림이 마련되면 그 위에 윤곽선을 다시 그리고 채색을 올린 후 문양 등을 시문하는 것이 통례이다. 

따라서 출초는 화사 중에서도 역량이 뛰어난 수화승이 주로 맡는데, 이 그림 역시 응석스님의 기량이 십분 발휘되어 있다. 응석스님은 이 그림 외에도 신중도, 십육나한도, 감로도 등 다양한 주제의 불화 출초를 한 이력을 지닌 대화사(大畵師)이다. 

봉은사 판전 ‘비로자나불도’를 보면, 기존의 그림과 비교해 비로자나 부처님이 좀 더 크게 그려져 있고 협시보살이 반가좌로 묘사되어 있는 등 차이점이 많다. 또한 부처님의 원만하고도 당당한 형상이 잘 부각되어 있으며 광배 주위의 화염 역시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역동적이다. 그 주변으로 배치된 권속들도 자세와 표정 등이 안정감 있게 잘 묘사되어 있다. 간단히 말해 화엄 교주 비로자나불의 위엄이 잘 표현된 수작이라 할 수 있다. 

이 그림은 궁궐 상궁들이 다수 참여해 발원, 시주했다. 화기의 시주질(施主秩, 시주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에는 왕실의 성수를 기원하는 축문인 ‘主上殿下壬子生李氏 聖壽萬歲, 王妃殿下辛亥生閔氏 聖壽齊年, 世子邸下甲戌生李氏 聖壽千秋’을 시작으로 10여 명의 상궁 이름이 빼곡히 채워져 있다.

특히 축문 바로 뒤에 기재된 상궁 하씨 정덕혜는 시주의 주축이 된 인물로 짐작되는데 일가 형제들의 이름까지 모두 올렸다. 그 외에도 동참 시주로 이름을 올린 상궁 노씨 향림월과 홍씨 묘혜월 역시 평소 불교에 후원을 많이 했던 인물들이다.
 

비로자나불도의 화기 부분, 왕실의 성수를 위한 축원과 시주 상궁들의 명단 일부.
비로자나불도의 화기 부분, 왕실의 성수를 위한 축원과 시주 상궁들의 명단 일부.

앞서 언급했듯이 봉은사는 신라 왕실의 성전사원이었으며 조선에 들어와서는 선릉의 능침사찰이자 선종 수사찰이기도 했고 5규정소 중의 한 곳이었다. 화엄경을 비롯한 3000여 점의 경판 조성과 판전의 건립에도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으며 판전 내 주불도인 ‘비로자나불도’ 역시 왕실의 성수를 기원하며 상궁들이 주축이 되어 발원, 시주한 그림이다.

따라서 이 불화는 봉은사 불사 후원자 양상 더 나아가 조선말 불교의 후원 세력을 살펴보기에 좋은 자료이다. 무엇보다도 화엄 신앙을 시각적으로 완성도 있게 구현해 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크고 귀하다. 

[불교신문3568호/2020년3월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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