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 프린터의 등장이야말로
‘존재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이 질문을 제대로 던져준다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물질도 없고, 감각, 지각, 경험, 인식도 없고, 눈, 귀, 코, 혀, 몸, 생각도 없으며, 빛깔과 모양, 소리, 향기, 맛, 감촉, 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 <반야심경> 중에서

 

보일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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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그말리온과 3D 프린터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오음 따라 갖가지 것들을 그리는데 일체 세간의 것들 가운데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 없구나.” <화엄경>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화가와 같다고 설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욕망하고 집착하면서 마음속에 무언가를 그리고 만들어낸다.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면서 애착하고 탐닉한다.

아주 오랜 옛날, 고대 그리스에서 현실의 여인은 너무나 불완전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불만을 느낀 피그말리온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내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상형에 부합하는 여인의 조각상을 직접 만들어 내기로 결심한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피그말리온의 상상 속 완벽한 여인을 조각상으로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다.

그 조각상은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했으며,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황당하게도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만든 조각상과 사랑에 빠졌다. 그는 마치 살아있는 사람에게 하듯이 조각상에 말을 걸고 멋진 옷도 입혀주고 반지도 끼워주고, 귀걸이도 걸어준다. 점입가경이다. 그러나 아무리 살아있는 여인처럼 대해도 조각상이 사람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딘가 허전함을 느낀 피그말리온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제물을 바치면서 기도한다. “여신이며, 저 상아상과 같은 여인을 제 아내가 되게 해주세요.” 말도 안 되는 소원을 빌었다. 그런데 지성이면 감천인가. 여신 아프로디테는 피그말리온의 간청을 들어주었다. 조각상에 생명이 깃들었고 놀랍게도 아름다운 여인이 실제로 피그말리온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피그말리온은 그 여인과 사랑에 빠져, 아니 이미 빠져 있었지만, 부부가 됨으로써 자신의 상상을 현실화시킨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단순해 보이지만 꽤 다층적 의미를 담고 있다. 관점에 따라서 달리 읽힐 수 있다. 흔히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는 심리학과 교육학에서는 긍정적 의미로 사용된다. 무엇인가를 진심으로 간절히 원하면 기적이 일어나듯이, 현실을 변화시키는 마음의 힘이 발휘된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차가운 조각상을 피가 돌고 생기 넘치는 피부를 가진 육신과 영혼으로 변화시킬 정도의 힘 말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왠지 인간의 허망한 욕망과 집요한 애착에 대한 적나라한 서사로도 해석될 수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 마디로 왠지 짠하다는 생각이 앞선다.

어쩌면 피그말리온은 우리들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각자 내용과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말이다.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마음속에 상상해내고, 그것을 마음 밖에서 만들어내려고 끊임없이 시도한다. 그 상상이 현실과 얼마나 부합하는지는 중요치 않다.

나름의 생각과 경험으로 덧칠을 반복하면서 그려내고 또 만들어낸다. 3D 프린터가 도자기처럼 빚어내거나, 또는 조각을 깎고 다듬듯이 부단히도 생각을 현실 세계 속의 형상으로 만들어내고자 한다. 

➲ 3D프린팅 기술의 그늘 

금속탐지기에 포착되지 않는 총기를 만드는 방법은 뭘까. 간단하다. 금속이 아닌 물질로 만들면 된다. 미국의 ‘디펜스 디스트리뷰티드’ 라는 단체는 3D프린팅 기술을 통해 AR-15 반자동 소총의 부품을 만들어냈고 발사성능 실험에 성공했다. 실제로 이 무기로 인해 코네티컷 주에서는 총기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 후 총기 규제 논란은 다시 뜨거워졌다. ‘리버레이터’라는 이름의 이 권총은 공이 부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플라스틱으로 소재이다. 국가의 통제권 밖에서 사적이고 임의로 만들어져서 부여된 일련번호가 새겨진 총기들이다. 새로운 기술이 또 새로운 문제와 고민을 만들어 내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3D 프린터가 사람들의 편리와 생활의 혁신 이전에 범죄나 테러에 먼저 이용될 가능성이 훨씬 커지고 있다.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단순히 지구상의 수많은 총기류 중에 새로운 총기 하나가 3D 프린터를 통해 제작되어 더해졌다는 문제가 아니다. 그 파괴적인 위험성은 매우 심각하다. 총기 제조에 필요한 디지털 데이터가 인터넷을 통해 무한정 공유되고 배포되고 매매가 아주 쉬워지기 때문이다.

폭발물이나 총기 또는 흉기, 심지어 미사일이나 핵무기까지 제작할 수 있는 디지털 정보가 무분별하게 유튜브에서 공유되고 있다. 만약 이대로 방치된다면, 테러리스트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까지 클릭 몇 번으로 이 물건들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다양한 인터넷 플랫폼에서 총기나 무기 등의 설계도 유통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지만, 아직은 미봉책에 머물고 있다. 이처럼 새로운 기술이 가져다주는 혁신과 변화 이면에는 어김없이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D 프린터가 가진 가치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리스 신화 속 피그말리온은 우리들 자신의 모습과 닮아 있다.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마음속에 상상해내고, 그것을 마음 밖에서 만들어내려고 끊임없이 시도한다. 그 상상이 현실과 얼마나 부합하는지는 중요치 않다. 나름의 생각과 경험으로 덧칠을 반복하면서 그려내고 또 만들어낸다. 3D 프린터가 도자기처럼 빚어내거나, 또는 조각을 깎고 다듬듯이 부단히도 생각을 현실 세계 속의 형상으로 만들어내고자 한다. 출처=www.shutterstock.com
그리스 신화 속 피그말리온은 우리들 자신의 모습과 닮아 있다.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마음속에 상상해내고, 그것을 마음 밖에서 만들어내려고 끊임없이 시도한다. 그 상상이 현실과 얼마나 부합하는지는 중요치 않다. 나름의 생각과 경험으로 덧칠을 반복하면서 그려내고 또 만들어낸다. 3D 프린터가 도자기처럼 빚어내거나, 또는 조각을 깎고 다듬듯이 부단히도 생각을 현실 세계 속의 형상으로 만들어내고자 한다. 출처=www.shutterstock.com

➲ 개인 창의성의 시대

제4차 산업혁명은 개인 창의성의 시대이다. 사소한 문구류에서 복잡한 항공우주 부품에 이르기까지 3D프린터가 개입되지 않을 영역은 거의 없을 것이다. 3D프린터는 사물이 가진 고유한 디지털 데이터 전송을 통해 작동되는 원리이다. 디지털 세계의 정보가 현실 세계의 정보에 개입되고 다시 현실 세계의 정보가 디지털 세계의 정보량을 증식시킨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세상에 등장시킬 것인가이다. 그 무엇은 누군가의 상상과 창의력에서 나올 것이다. 누구나 아이디어만 있으면 컴퓨터로 상품을 설계할 수 있다. 그 디지털 데이터화된 상품 정보를 클라우드에 저장해 놓기만 하면 언제든지 주문량에 따라서 생산을 의뢰하기만 하면 된다. 회사 사무실 건물을 임대할 필요도 없고 직접 공장을 세울 필요도 없다. 전 세계의 모든 공장을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이용하면 된다.

이른바 ‘아웃소싱 플랫폼’이 가능해진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1인 기업이 가능해진 것이다. 직원이 없어도 모든 관련 업체들을 하나의 기업처럼 자신이 상품생산을 위해 관리하고 이용하는 체계이다. 이전의 대량생산 시스템에서 소량 생산 시스템으로 산업 구조 자체가 변화를 가져오고 대기업 중심의 자본 집약적인 산업에서 개인 창의력 중심산업으로의 대변혁을 의미한다.

이제 상상하는 자, 혁신하는 자들 앞에서 3D 프린터가 그 길을 열어주고 있다. 그대는 상상하고 소원하라. 3D프린터는 마치 알라딘의 마술램프에서 뛰쳐나온 ‘지니’처럼 그 상상을 실현해 줄 것이다. 

➲ 눈의 경계, 의식의 경계까지도…

오늘도 예불하면서 어김없이 <반야심경>을 합송한다. 문득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다’는 구절이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온다. 3D 프린터를 통해 만들어진 사물의 이전 모습은 어떠한가, 그 사물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 반대로 그 사물을 만들어낸 생각, 의식은 어디까지가 경계인가. 어디서부터가 사물이 시작되는 지점이고, 어디까지나 의식이 끝나는 지점인가.

3D 프린터는 우리 의식이 물질로 전환되거나 물질이 의식으로 전환되는 경계를 상징한다. 물론 그 경계 또한 실재하진 않는다. 3D 프린터를 통해 의식과 물질 사이에 경계가 따로 없으며, ‘공성(空性)’이 관통하고 있음을 사유할 수 있다. 3D 프린터의 등장이야말로 ‘우리가 존재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제대로 던져준다.

지금, 이 순간의 존재는 사물도 마음도 아니다. 물질도 정신도 아닌 것이다. 그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반야심경>에서는 ‘반야의 지혜로써 ’공(空)‘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설한다. 우리에게 인식되는 외부 대상은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각 활동에 의지하여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존재는 ‘있다’고 지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뇌 과학에서도 인간이 사물을 본다는 것은 눈이 보는 것이라 눈으로 본 것을 뇌에서 처리해서 인지하는 것이라고 본다. 각자마다 가진 지식과 경험이라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해서 현실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덧칠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되고 변형된 형태로 각자의 주관과 경험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다.

만약 피그말리온이 조각상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생각한 것이 잠정적이고 가변적인 것을 알았다면, 집착과 애착은 사라졌을 것이다. 마치 파란 하늘에 떠있는 구름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인간은 그 지점에서 멈추지 않는다. 다시 그 사물과 현상을 인지하면 다시 새로운 상상을 하고 그에 따라 무언가를 하려 하거나 만들어낸다.

그냥 떠 있는 구름을 보고서도 새털 같으니 부드러울 것이라는 둥, 솜사탕 같으니 달콤할 것이라는 등의 생각을 하면서 상상을 불어넣는다. 앨빈 토플러가 <부의 미래>에서 3D프린터를 통해서 “상상하는, 아니 상상하지 못했던 그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고 말했듯이 말이다. 그 무엇을 상상하든 현실이 될 것이다.

자, 무엇을 만들어낼 것인가. 환상 속에 환상을 더할 것인가. 무명에 무명을 더할 것인가. 피그말리온이 되는 것에 만족할 것인가. 그게 아니면 ‘여환자비(如幻慈悲)’라 했던가. 그 환상과 무명 속 일지라도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의 손길이 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 낼 것인가. 

[불교신문3567호/2020년3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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