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 썩은 자리서 나무 자라듯
죽음이 삶의 씨앗 되는 반면
삶 시작되는 순간 죽음 시작돼

혜인스님
혜인스님

가을에만 낙엽이 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나뭇잎들은 누렇게 바짝 마른 채로 겨우내 가지에 붙어 있다가 새벽 봄비를 맞고서야 떨어지며 삶과의 작별을 고한다. 떨어지고 싶지 않은 것이 나무의 마음이겠지. 죽고 싶지 않은 것이 나뭇잎의 마음이겠지. 잔인하게도 누런 낙엽들이 촉촉한 봄비를 머금고 산등성이를 덮고 있는 모습은 마치 흙바닥을 수놓은 붉노란 카펫인 듯. 가을 추수기의 황금들녘만큼이나 아름답다.

누군가의 죽음이 이렇게 아름답게 보인다는 건 자비심이 부족한 수행자의 허물일까,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는 자연의 진리일까. 나뭇잎들과 이별하며 비로소 젖은 낙엽 카펫을 밟게 된 앙상한 가지의 나무들은 거친 흙바닥 위에서 울창할 때보다도 포근해 보인다. 낙엽들은 그렇게 포근하게 썩겠지. 썩어가는 낙엽들 위에서 나무들은 촉촉하게 자라겠지. 죽음이 삶의 씨앗이 되는 순간이다.

반대로 삶이 죽음의 씨앗이 되는 순간도 있다. 사람 몸속에 들어와 영양분을 흡수하는 바이러스라는 생명에게 자신의 삶을 양보하고 죽음에 이르는 사람들. 바이러스도 나뭇잎처럼 그저 살고 싶었을 뿐일 텐데 아름답기는커녕 슬프고 두렵기까지 한 이 풍경은 잔인하게도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는 똑같은 자연의 진리.

그렇다면 무엇이 바이러스를 두렵게 만들고, 무엇이 젖은 낙엽들을 아름답게 만들었을까. 어쩌면 자연이 자연(自然)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담고 있을 뿐 어떤 인생을 살지는 선택할 수 없는 생존 본능적 한계를 지니기 때문은 아닐까.

액션 영화의 주인공만큼이나 악당들은 똑똑하고 용감하지만 그들은 악랄하고, 교활한 악당들만큼이나 주인공은 싸우고 부수고 죽이지만 영웅이 된다. 하지만 악역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그 사람이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그 악당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고, 어디에서 그런 선택의 답을 찾았는지, 그 사람의 인생을 만든 선택의 과정들을 그려보고 이해하는 것이 연기라지. 그러니 자연 속에서 진리를 보는 것도, 악함 속에서 선함을 찾는 것도 사실은 내가 하는 일이다.

소설 속 싯다르타에게 “궁금한 게 있거든 흐르는 강물에게 물어보라”던 사공의 말처럼 역사 속 싯다르타는 별을 보고 도를 깨우치셨다는데. 아무리 물어도 저 강물은 대답이 없고 아무리 별을 봐도 나는 깨우치지 못하니. 답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나일 수밖에 없다는, 자연이 해낼 수 없는 사람의 진리.

남을 위해 살고 싶어서 출가했다는 내 선택에 많은 선배 스님들이 ‘너 자신을 위해 사는 게 남을 위해 사는 거라’ 하던 때가 있었다. 그 선배 스님들은 요즘 ‘너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남을 위해 하라’ 한다. 남을 위한다는 것과 나를 위한다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말씀일까.

우리가 ‘누군가를 위한 선택’을 한다는 것이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가고 있을 뿐이라는 말씀일까. 살아간다는 게 죽어간다는 거고, 죽는 게 다시 사는 거라면 나는 삶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인생을 선택하고 싶다. 바이러스를 두려워하지 않는 젖은 낙엽들처럼. 두려워하지 않는 선택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돌봐주는 사람들처럼.

‘나는 죽기 마련이다. 나는 죽음에서 놓여나지 못했다’라고 여자든 남자든 출가자든 끊임없이 반조해야 한다고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 죽음에서 놓여나는 순간 새로운 삶이 시작한다는 것이 젖은 낙엽을 보며 내가 선택한 답. 삶이 시작되는 순간 죽음도 시작된다는 것이 바이러스를 보며 내가 선택한 답. 흐르는 저 강물에게 물어보라. 그 강물은 진리가 네 안에 있다는 걸 깨우쳐줄 것이다.

혜인스님 고양 중흥사

[불교신문3567호/2020년3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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