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금갑을 활로 쏘라”

삽화=견동한
삽화=견동한

거문고갑 속의 남녀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니 도대체 무슨 뜻일까?’

월성으로 돌아오는 내내 비처는 종이에 쓰인 말을 되뇌었다. 글이 적힌 종이를 소매에 넣은 비처는 선혜궁으로 갔다. 공주의 얼굴도 보고 좀처럼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 선혜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할 참이었다. 문을 나서는 순간, 바람이 불지도 않았는데 침상 곁에 있던 촛대가 갑자기 쓰러졌다. 다행히 불이 옮겨 붙지는 않았으나 이상하게 가슴이 철렁했다. 고개를 내저으며 숨을 한 번 크게 내쉬며 선혜궁 근처에 간 비처는 걸음을 멈췄다. 선혜의 방에서 거문고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선혜의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안심한 비처는 미소를 지으며 방문을 열었다. 그때 선혜의 방에서 나오던 궁녀가 비처와 마주쳤다. 

“마립간 전하”

궁녀는 깜짝 놀라며 들고 있던 찻주전자를 떨어뜨렸다. 거문고 소리는 뚝 끊어졌고 쨍그랑 소리와 함께 파편이 튀었고 따뜻한 찻물이 비처의 발을 적셨다. 궁녀들은 허둥지둥 깨진 주전자 파편을 치우고 마른 천을 찾아 비처의 발을 닦는다며 수선을 떨었다. 문 앞이 소란스러운데도 선혜는 방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지 나와 보지 않았다. 

“송구합니다. 송구합니다.”

“오늘따라 이상한 일이 자꾸 일어나는구나. 많이 젖지 않았으니 괜찮다. 문을 열거라.”

비처의 용서에도 불구하고 찻주전자를 떨어뜨린 궁녀는 비처 앞에 엎드린 채 몸을 떨었다. 

“벌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비처가 부드럽게 말했으나 여전히 궁녀는 고개를 떨군 채 비처의 앞을 막고 있었다. 어쩐지 가슴이 갑갑해진 비처는 궁녀를 재촉하는 대신 직접 방문을 열었다. 

“!”

어찌된 일인지 방안은 텅 비어 있었다. 비처는 이게 무슨 귀신의 조화인가 싶어 방을 둘러보았다. 침상 앞에는 거문고가 놓여 있었고 찻잔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향로를 보니 향을 피운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선혜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방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한데, 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일까? 내가 그토록 보고 싶지 않은 것인가? 일부러 몸을 숨긴 것인가?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오늘도 부인께서 몸이 좋지 않으신 것 같으니 다음에 다시 오도록 하지.”

선혜가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린 비처가 나가려고 몸을 돌린 순간, 소매에 넣어 두었던 종이가 떨어졌다.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

종이에 쓰여 있는 구절이 갑자기 비수처럼 비처의 가슴을 찔러왔다. 비처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한 손으로 부여잡고 종이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또 다른 종이가 들어있었다. 숨을 삼키며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꺼내자 또 다른 글귀가 쓰여 있었다.

“사금갑을 활로 쏘라.”

비처는 선혜의 방을 다시 살펴보았다. 거문고가 놓여 있는 침상 뒤로 병풍처럼 세워놓은 거문고 집이 보였다. 

“오함!”

“무슨 일이십니까?”

선혜궁 밖에서 대기하던 비처의 호위대장이 뛰어왔다. 

“활을 다오.”

“네?”

“당장 활을 다오.”

순식간에 핏발로 가득 찬 비처의 눈을 본 오함은 말없이 활과 화살을 건네주었다. 비처는 화살을 시위에 걸고 거문고 집을 겨누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비처의 손을 떠난 화살이 거문고 갑을 맞혔다. 꿩의 깃털로 만든 깃이 떨리듯 흔들리다 멈췄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침묵이 흘렀다. 거문고 집의 뚜껑이 천천히 열렸다. 거문고 집 안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선혜가 묘심과 부둥켜안고 있었다. 선혜의 얼굴을 확인한 오함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비처는 얼음보다 차가운 눈으로 선혜와 묘심을 노려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오함.”

“말씀하십시오.”

“오늘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아는 사람은 그대와 나, 둘 뿐이어야 한다. 지금 바로 선혜궁의 궁녀들을 모두 죽여서 입을 막아라. 선혜의 부정을 알면서도 고하지 않았으니 죽어 마땅한 죄인이다. 순순히 명을 따르면 단칼에 죽이고 울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반항하면 사지를 찢어 죽여라.”

“명 받잡겠습니다.”

“선혜궁은 폐쇄한다. 앞으로 내 허락 없이는 선혜궁의 그 누구도 궁 밖으로 나올 수 없다. 지금 당장 시행하라.”

“네.”

선혜의 딸, 오도

오함이 선혜궁의 궁녀들을 끌고 가는 것을 확인한 비처는 천천히 묘심에게 다가갔다. 

“스님 덕분에 선혜가 건강을 되찾았으니 스님은 저의 은인이자 공주의 은인이십니다.”

두려움과 공포에 질린 묘심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과연 선혜가 반할만큼 아름다운 눈이었다. 비처는 손을 뻗어 선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선혜는 징그럽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 비처의 손길을 피했다. 

“그러니 저도 스님께 보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스님을 부처님께 보내드리려 합니다. 어떻습니까? 제 보답이 마음에 드십니까? 스님이 받아주시지 않더라도 오늘 저는 꼭 보답하겠습니다.”

활을 겨누고 있던 비처를 보면서도 두려운 기색이 없던 선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입술을 깨물며 비처를 노려보던 선혜의 몸이 갑자기 축 늘어졌다. 기절한 것이었다. 묘심은 쓰러지는 선혜를 안고 그녀의 손발을 주물렀다. 묘심의 얼굴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선혜에 대한 걱정만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비처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얼마 후 쿵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오함이 돌아왔다. 그의 두 손에서는 피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분부하신 일은 잘 처리했습니다.”

“그렇군. 이제 한 가지 일이 남았으니 잠시 기다리고 있게.”

“알겠습니다.”

오함을 문밖에 세워둔 비처는 묘심스님에게 빈정거리며 말했다.

“그만하면 제 부인을 충분히 주무르신 것 같으니 이제 부처님을 뵈러 갈 준비를 하시지요. 가시는 길에 섭섭하지 않도록, 저 거문고 집을 관으로 드리겠습니다.”

선혜의 팔다리를 주무르던 묘심이 이윽고 몸을 일으켰다. 옷을 걸친 묘심은 비처를 향해 합장하고 고개를 숙였다.

“다음 생에는 마립간께 소승의 목숨을 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묘심스님이 방을 나서자 핏물이 맺힌 칼을 든 오함이 그 뒤를 따랐다. 기절한 선혜를 침상으로 옮겨 이불을 잘 덮어준 뒤 방에서 나온 비처는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아직 하루가 다 지나지도 않았는데 10년쯤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비처는 이를 악물고 힘이 풀려버린 다리에 힘을 주었다. 대전으로 향하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이날 이후, 선혜궁은 폐쇄되었고 보도공주의 처소도 선혜궁과 가장 먼 곳으로 배치되었다. 선혜궁에는 새로 들어온 궁인으로 최소한의 인원만 배치했다. 비처는 선혜의 반응을 기다렸으나 선혜궁에서는 아무런 기별도 오지 않았다. 그렇게 봄이 지나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고 그 사이 보도공주는 어느덧 걸음마를 시작했다.

“음마, 마마마, 마.”

엄마를 찾는 것 같은 보도공주의 옹알이를 들을 때마다 비처는 가슴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어느 늦은 밤, 홀로 술을 마시던 비처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선혜궁으로 갔다. 선혜의 방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문득 가슴이 따뜻해졌다. 술기운을 핑계 삼아 선혜를 안고 싶었다. 그 순간, 선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예뻐라. 우리 딸은 누굴 닮아 이렇게 예쁠까?”

비처는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선혜와 보도공주가 떨어져 지낸 지 8개월이 넘었다. 혹시 갇혀 지내는 동안 선혜의 정신이 이상해지기라도 한 것일까 싶어 불안해졌다. 서둘러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 문틈으로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젖을 물리고 있는 선혜의 모습이 보였다. 보도공주를 낳았을 때와 달리 갓난아기를 바라보는 선혜의 얼굴은 자비로움과 행복함이 가득했다. 비처는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불교신문3566호/2020년3월18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