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사랑’ 동국대학교병원 투병 · 간병 수기 공모전
[사랑상(3등상) 수상작] 이시영 ‘선생님, 저 완치될 수 있을까요?’


유방암 4기 진단 받고 입원
세상 끝난 것 같은 절망감
긍정 마인드로 치료 받으며
‘완치’ 희망 갖고 매일 기도

“엉엉엉… 엄마 얼굴이 무서워요. 엉엉엉”

자꾸만 빠지는 머리카락을 다 밀고 집에 들어온 날,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딸은 나를 보고 뒷걸음치며 울었다. 나는 딸의 반응에 조금 당황스러웠고 나도 모르게 주르르 흘린 눈물을 애써 감추며 딸에게 말했다.

“엄마가 머리카락을 다 자른 건 새 머리카락이 예쁘게 잘 자라게 하려고 자른 거야”라고 말했더니 그때서야 울음을 멈추고 “엄마 머리는 대머리”하면서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까르르 웃었다. 나는 딸에게 내가 암에 걸렸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니, 아직 어린 딸은 암이 무엇이지 잘 모른다. 
 

유방암4기 진단을 받은 이시영 씨는 어린 딸을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완치하겠다는 굳은 각오로 치료에 임하고 있다. 사진제공=동국대의료원
유방암4기 진단을 받은 이시영 씨는 어린 딸을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완치하겠다는 굳은 각오로 치료에 임하고 있다. ⓒ동국대의료원

나는 2019년 8월에 유방암 4기라는 진단을 받고 동국대병원에 입원했다.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 진단받았을 때 이제 여덟 살이 된 내 딸을 앞으로 어떡하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았다는 진부한 표현은 쓰고 싶지 않다. 나는 이미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경험을 여러 번 한 상태였다.

엄마의 죽음, 불행한 결혼생활, 목숨보다 소중한 자식을 뺏기고 3년 동안의 기나긴 이혼 소송, 지난 10여 년간은 정말 단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그냥 매일 같이 죽을까 말까 결정을 못하고 시체처럼 살다가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그러다가 기적적으로 승소하고 딸을 데려와서 같이 살게 되면서 너무나 행복했다. 이제 불행 끝! 행복시작! 이럴 찰나에 유방암 4기를 진단 받았다.

그 순간 나는 오히려 마음이 싹 가라앉으면서 차갑게 식었다. 결국 나는 ‘죽는구나’ 아마 이런 생각이었던 것 같다. 이건 엄마를 폐암으로 떠나보낸 경험과도 무관하지 않다. 엄마는 4년 간 폐암투병을 하면서 너무나 고생을 많이 하셨다. 힘든 항암치료를 받으며 수도 없이 응급실에 실려 가셨고 각종 부작용에 시달리다가 결국 돌아가셨다.

암 전문 큰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셨지만 우리는 의사로부터 어떠한 인간적인 배려나 자세한 설명을 들은 적도 없이 그냥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이 줄 서서 주사를 맞았고, 부작용에 괴로워하다가 응급실에 가도 당장 죽을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오랜 시간 방치된 채 있던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만약 내가 암에 걸리면 항암치료는 절대 받지 않으리라 결심했었다.

비로소 행복 찾은 때 암 선고 

유방암 4기는 수술의 의미도 없고 그냥 죽을 때까지 항암치료를 하는 거라고 한다. 항암제를 쓰다가 내성이 생기면 약을 바꾸고… 이런 식으로 반복하다가 맞는 약이 없으면 그냥 치료를 중단하는 것이다. 그 무서운 항암치료만 죽을 때까지 받으라니 솔직히 나는 치료를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딸 생각을 해서라도 어쨌든 치료는 받아야 했다. 

주변에서는 무조건 서울에 있는 큰 병원을 가라고 했지만 지인의 조언에 따라 동국대병원에서 치료 받기로 결정했다. 특히 곽범석 선생님은 실력도 좋고 인품도 훌륭해서 환자의 마음까지 고치신다고 하여 오직 선생님만 보고 결정한 것이었다. 치료를 받기로 한 이상 나는 엄마의 경우처럼 환자공장 돌리듯이 취급받으며 치료받고 싶지는 않았다. 

역시나 동국대병원에서 각종 검사부터 진료를 받기까지 모든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들이 무척 친절하고 편안하게 대해주셨다. 특히 곽범석 선생님은 진료 때 뿐 아니라 입원한 날부터 퇴원한 날까지 계속 나를 들여다보며 안심시켜 주고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시는데 환자를 진심으로 보살펴 주신다는 게 느껴졌다. 제한된 시간 내에 수많은 환자를 상대해야 하는 의사로서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암’이라고 하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떠올릴 것이다. 내 소식을 들은 지인들 역시 나만 보면 울고불고 심지어 겨우 데려온 딸을 다시 돌려보내라는 의견도 있었다. 사실은 나부터가 진단을 받은 후 죽을 준비를 했던 것 같다. 

항암치료를 받는 건 역시 쉽지 않았다. 몸이 아프니 마음도 더욱 우울해져서 온갖 잡생각에 시달리며 말도 안 되는 별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느라 몇 주일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고, 그러면서 잊고 있었던 좌절과 분노가 다시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딸과 함께 식당에 갔다가 쓰려져서 동국대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그냥 구역감과 어지러움으로 인한 잠시 동안의 실신상태였고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딸이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딸은 엄마가 눈앞에서 쓰러지는 것을 보았고, 119 구급차를 같이 타고 가서 병원 침대에 누워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보며 심상치 않은 어떤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그 뒤로 딸은 ‘엄마 죽으면 안 돼’ 이런 말을 자주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딸이 “엄마, 천국 갈 때 나 데려가. 나 꼭 같이 데려가야 해!” 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당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유머로 넘겼지만 사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티를 안내려고 노력했지만 아이는 내가 절망과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음을 느꼈던 것 같다. 

죽을 거라는 생각 버리고 항암치료

나는 그 다음부터 암과 마음수련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보통 암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지속적인 큰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들 중 마음이 소심하고 주변에서 착하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들이 주로 암에 걸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살아온 지난날을 보면 나는 남에게 싫은 소리를 손톱만큼도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는 사람이었다. 직장에서든 결혼생활에서든 나는 항상 호구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런 상처들을 털어버리지 못하고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두니 결국 그 스트레스가 병이 되었던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남 기분만 살피는 삶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부터라도 나 자신만을 위해 살기로 했다. 내 마음이 말하는 걸 잘 듣고, 내가 원하는 걸 다른 사람에게 당당히 말하고, 나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리라 결심했다. 

또한 나는 암에 걸리면 죽는다는 그런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었음을 깨달았고 그 믿음을 완전히 버렸다. 암은 이겨낼 수 있는 하나의 질환이며 얼마든지 완치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기로 했다. 결국 마음의 병이 몸의 병을 일으켰으니 마음으로 몸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이다. 

긍정적인 마음만으로 치유하기엔 유방암 4기는 그리 쉬운 병이 아니다. 하지만 원망과 절망으로 가득차서 죽어가는 것보단 상처를 털어버리고 완치될 수 있다는 희망과 행복한 미래에 대한 기대로 가득차서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언젠가 의사 선생님께 여쭤보았다. 

“선생님, 저 완치될 수 있을까요?”

“그럼요. 완치될 거라고 믿는 거 외에 또 뭘 하겠어요?” 나는 내가 죽을 거라는 생각부터 당장 버렸다. 그리고 매일매일 기도하고 행복한 상상을 한다. 내가 은발이 된 풍성한 머리를 휘날리며 푸른 색 정장을 입은 멋쟁이 할머니가 되어서 어른이 된 내 딸이 낳은 예쁜 손주의 초등학교 입학식에 손잡고 같이 들어가는 것이다. 

암 환자들이 방송에서 암에 걸린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 인터뷰 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완전히 거짓말이다. 어떻게 암에 걸린 후가 더 행복하단 말인가? 당연히 암 걸리기 전이 훨씬 행복하다. 나라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암에 걸린 지금도 행복합니다.”

환자를 소중하게 대해주시는 곽범석 선생님과 너무나 친절하신 외과 간호사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불교신문3566호/2020년3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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