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온화한 얼굴에 큼직한 이목구비…

7세기 조형적 도상적으로 변화
북주와 교류하며 불상도 영향

마애불상 북조 석굴조상 답습
서산 태안 마애불 조형 수준급
부여 왕실발원 정도로 뛰어나

무왕 대 익산 불상조성 활발
익산 연동리 석조불좌상은
불신 광배 대좌 따로 제작
중국 고구려서 보기 드문 예

백제 불상에서는 600년경부터 조형적, 도상적으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난다. 이는 위덕왕(554~598)이 남조 일변도의 외교 정책에서 벗어나 북제(北齊, 567년), 북주(北周, 577년)와 교류하면서 북조 불상의 영향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불상은 부드럽고 둥근 조형으로 바뀌고 북조의 석굴 조상을 답습한 마애불상이 조성된다.

이들 마애불상은 중국 산동성(山東省)과 왕경 부여(사비)를 이어 주는 교통로인 충청남도 태안반도에서 발견된다. 6세기 말의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 7세기 초의 서산 용현리 마애불삼존상과 태안 동문리 마애보살삼존상이 그 예로, 모두 부여의 왕실 발원 불상에서나 볼 수 있는 수준 높은 조형을 갖추고 있다. 이들 불상은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조성 배경을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의 접근이 어려운 깊은 산 속에 있다는 점에서 승려들의 수행과 연관될 가능성이 높다. 
 

6세기 말 조성된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 사진=김민규
6세기 말 조성된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 ⓒ김민규

화전리 석조사면불상은 방형에 가까운 바위 네 면에 1존의 불좌상과 3존의 불입상을 돋을 새김한 것이다. 바위의 동남서북 방향에 불상이 있어서 사방정토에 있는 불상, 즉 사방불(四方佛)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일반적인 사방불과 달리 크기와 형식이 제각각인 것이 특징이다. 비록 명문 완독이 어려워 어떤 도상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북위 때 조성된 산동성의 석조사면불상(청주시박물관)은 형식과 도상에서 화전리 석조사면불상과 매우 닮아서 주목된다.

북위의 석조사면불상이 같은 시기의 중심탑주(中心塔柱)식 석굴의 중앙에 세워진 탑주 사면의 불상에서 유래된 것을 감안해 볼 때, 화전리 석조사면불상도 이러한 도상적인 전통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법당 가운데에 있던 이 불상을 오른쪽으로 세 번 돌면서 예불(右繞三匝)하였다.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가야산에 조성된 용현리 마애불삼존상은 불입상을 중심으로 좌우의 보살반가사유상과 보살입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대부분의 마애불상과 같이 머리 쪽을 돋을 새김하고, 다리 쪽을 얕은 새김하였다.

불상은 통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있으며,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올려 시무외인을, 왼손은 약지와 소지를 구부린 채 내려서 여원인을 결하였다. 불상은 고식(古式) 불상과 같이 몸에 비해 머리와 손발이 크며, 5등신의 비례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맑고 온화한 얼굴 표정, 큼직큼직한 이목구비, 후리부리한 눈, 또렷한 인중, 힘이 살짝 들어간 입술, 손마디와 손금이 새겨진 손, 몸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처리된 법의 주름과 옷고름에서 새로운 조형적인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부드러운 백제불상을 대표하는 서산 용현리 마애불삼존상은 보살반가사유상과 보살입상을 협시로 둔 비대칭적인 구도이다. 배 앞에 두 손을 모아 합을 들고 있는 보살입상은 중국 양나라 523년명 석조불군상 협시보살상과 일본 아스카시대 보살상에서 확인된다.
부드러운 백제불상을 대표하는 서산 용현리 마애불삼존상은 보살반가사유상과 보살입상을 협시로 둔 비대칭적인 구도이다. 배 앞에 두 손을 모아 합을 들고 있는 보살입상은 중국 양나라 523년명 석조불군상 협시보살상과 일본 아스카시대 보살상에서 확인된다.

용현리 마애불삼존상은 보살반가사유상과 보살입상을 협시로 둔 비대칭적인 구도이다. 불입상은 석가모니 붓다, 보살반가사유상은 미륵보살로 추정되지만, 보살입상에 대해서는 관음보살이나 제화갈라(提和竭羅)보살로 본다.

배 앞에 두 손을 모아 합(혹은 보주)을 들고 있는 보살입상은 중국의 양나라 523년명 석조불군상(石造佛群像)의 협시보살상과 일본의 아스카(飛鳥)시대 보살상에서도 확인되어 남조, 백제, 아스카에서 유행하던 도상임을 알 수 있다. 양나라 보살상에는 존명이 확인되지 않으나 백제의 영향을 받은 일본 호류지(法隆寺)의 유메도노(夢殿)관음보살입상과 호류지 헌납보물 중 금동보살입상(도쿄국립박물관)에서는 관음보살로 명기되어 있다.

마애불삼존상이 조성되던 7세기에 백제에서 법화 사상과 신앙이 발전하였다는 점에 주목하여 과거세에 수기(授記)를 받아 연등불(燃燈佛)이 된 제화갈라보살, 연등불의 수기를 받은 석가모니 붓다, 석가모니 붓다가 수기를 준 미륵보살로 보기도 한다.

비록 관음보살이 석가모니 붓다와 미륵보살과 함께 조성된 배경에 대한 설명이 더 필요하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로 보면, 불상이 조성되던 7세기 초에 가장 인기 있던 미륵보살과 관음보살을 협시로 삼은 것은 분명하다. 

서산시 태안면 동문리 마애보살삼존상은 용현리 마애불삼존상과 비슷한 시기인 7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산 정상부의 바위 면에 불상 2존과 보살상 1존을 돋을 새김한 것이다. 불상을 중심으로 보살상이 협시하는 일반적인 불삼존상과 달리, 커다란 불상을 양쪽에 두고 작은 보살상을 중간에 배치하였다.

보살상은 약 5등신의 비례를 갖추고 있으며, 서산 용현리 마애불삼존상의 보살입상과 같이 보관을 쓰고 두 손을 배 앞에 모아 무엇인가를 잡고 있다. 이들 불상과 보살상도 머리 쪽은 돋을새김하고, 다리 쪽은 얕은 새김하였다. 불상들은 7등신에 가까운 신체 비례, 둥글고 원만한 얼굴, 부드럽게 처리된 넓은 어깨를 갖추고 있다.

보살상 좌측의 불입상은 통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었으며, 가슴 앞에는 옷고름이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약지와 소지를 구부린 채 살짝 들어 올려 설법인을 결하고 있으며, 왼손 손바닥에 약합이 표현되어 있다. 이 약합은 불상이 약사불일 가능성을 높여 준다.

우측 불입상도 신체 비례와 착의법은 약사불입상과 닮았으나 양손 모두 약지와 소지를 구부려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결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이 수인은 석가모니 붓다의 기본적인 손자세이지만, 같은 수인을 한 신묘명 금동불삼존상(571년)의 주존이 무량수불로 기록되어 있어서 이 불상도 무량수불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태안 동문리 마애보살삼존상.
태안 동문리 마애보살삼존상.

태안 동문리 마애보살삼존상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보살상을 중심으로 불상들이 협시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깎인 바위 면을 자세히 보면, 양쪽 불상의 대좌가 보살상의 대좌를 가리고 있는 것은 물론, 불상들이 보살상보다 훨씬 심혈을 기우려 돋을 새김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로 보아 원래 계획한 두 불상이 완성될 즈음에 보살상이 추가된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보살상을 주존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이는 마애보살삼존상이 조성된 산의 이름이 관음보살의 주처인 보타락가산, 즉 백화산(白華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타락가산은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말이 되어서야 백화산으로 한역되기 때문에 보살상이 조성되던 7세기 초에는 백화산의 이름이 아직 사용되지 않아 관음보살상을 주존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결국 동문리 마애보살삼존상은 원래 동방유리광정토의 약사불과 서방극락정토의 무량수불만 조성할 계획이었으나 완성될 즈음에 당시 유행하던 관음보살입상을 추가한 것이다. 즉 북제와 수(隋)대에 중국 하북성과 산동성에서 유행하던 석조불병립상의 영향을 받아 두 불상이 조성되었고, 7세기 초 백제에서 인기 있던 관음보살신앙에 의해 관음보살상이 첨가된 것이다. 
 

7세기 초 조성된 익산 연동리 석조불좌상은 광배가 326cm에 달하는 압도적인 크기다. 불신, 광배, 대좌를 따로 만들어 조합했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물론 중국의 북조 불상에서도 그 예를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사진=원광대학교박물관
7세기 초 조성된 익산 연동리 석조불좌상은 광배가 326cm에 달하는 압도적인 크기다. 불신, 광배, 대좌를 따로 만들어 조합했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물론 중국의 북조 불상에서도 그 예를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원광대학교박물관

한편 7세기에는 무왕(武王)이 왕경(혹은 별도)을 옮기고자 했던 전라북도 익산에서 불상 조성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미륵사, 왕궁리 사원, 제석사가 창건되고 수준 높은 불상들이 조성되었다. 현재 이들 불상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익산 연동리 석조불좌상은 조형적인 수준과 압도적인 크기에서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머리가 보수되었지만, 불신, 광배, 대좌를 따로 만들어 조합한 것은 고구려와 백제는 물론 중국의 북조 불상에서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불상은 통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방형대좌 위에서 가부좌하고 있는데, 부드러우면서도 당당한 분위기를 보여 준다.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채 가슴 앞까지 올리고 오른손은 중지와 약지를 맞댄 채 무릎 위에 내려 설법인을 결하고 있다. 법의 자락은 무릎을 덮고 흘러내려 대좌에 새겨진 법의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으며, 배 앞에는 옷고름이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상현좌(裳懸座, 윗부분이 법의로 덮인 대좌) 형식은 그 원류가 중국 남조 불상에 있으나 이후 남북조 불상에서 모두 확인되고 있다. 광배는 돌기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구획하였는데, 신광에는 돋을 새김한 보주(寶珠)가, 신광 밖에는 역시 돋을 새김한 7존의 불좌상(화불)과 음각한 화염문이 표현되어 있다.

연화좌를 갖춘 보주는 북제 미술에 많이 보이는 모티프로서, 석조불좌상에 미친 북조(특히 북제) 불상의 영향을 상상하게 한다. 붓다의 설법상에 7존의 붓다, 즉 과거칠불이 화불로 나타날 때 불상은 인간 세상에 일곱 번째로 왔던 석가모니 붓다이거나 여덟 번째로 올 미륵불이 대부분인데, 연동리 석조불좌상은 가부좌한 것으로 보아 석가모니 붓다일 가능성이 높다.

광배 중앙에 보주 위에 있는 불좌상(화불)을 중심으로 양옆으로 내려오면서 각각 3존의 불좌상을 배치하여 과거칠불을 표현한 것은 아스카시대 7세기 후반에 조성된 호류지 헌납보물 143호 금동불입상의 광배에서도 확인되어 주목된다.

[불교신문3566호/2020년3월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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