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삽화=견동한
삽화=견동한

보도 공주

488년 정월, 비처는 유랑하는 백성들을 농촌으로 돌려보내는 행사를 거행했다. 땅을 잃고 떠도는 유랑민은 도적이 되지만 곡식을 일굴 땅이 있으면 정착하여 백성이 되는 것이 순리였다. 황무지로 변해버린 땅을 다시 개간하여 수확을 하면 3년간 세금을 면제해준다는 이야기에 백성들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비처는 정착할 땅을 받긴 했으나 폐허나 다름없는 농촌으로 돌아가는 백성들에게 종자를 담은 작은 주머니 하나와 옷 한 벌 그리고 짚신 세 벌씩을 나누어주며 전송했다. 월성으로 돌아온 비처는 선혜가 거처하는 궁으로 방향을 잡았다. 

“공주의 얼굴이 벌써 보고 싶구나. 날마다 쑥쑥 자라니 자꾸 눈에 담아 두어야겠다.”

서둘러 선혜궁으로 간 비처는 보모 궁녀에게서 얼른 공주를 받아 안았다. 새근새근 잠든 공주를 바라보는 비처의 얼굴은 사랑으로 가득했다. 

“부인, 우리 딸이 참으로 어여쁘지 않소? 한 번 안아보시겠소?”

목석처럼 앉아 있던 선혜는 냉랭한 눈으로 공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출산 후 한동안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있던 선혜는 묘심의 기도 덕분에 의식을 회복한 후 천천히 건강을 회복했다. 선혜가 몸조리하는 동안 공주 엄마 노릇은 비처의 몫이 되었다. 비처는 공주에게 정이 담뿍 들었으나 선혜는 몸이 회복된 후에도 방 밖으로 나가는 일이 드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아기도, 살을 맞대고 지냈던 비처도 남보다 낯설었다. 뱃속에 품고 있는 동안에는 아기에 대한 사랑이 숨 쉴 때마다 솟구쳐 올랐는데 이상하게도 막상 태어난 아기를 보자 정이 생기지 않았다. 잠에서 깬 아기는 비처를 보며 방긋방긋 웃고 있었고, 비처는 아기의 입에서 흐르는 침이 옷에 떨어지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둘만의 세상에 푹 빠져있는 공주와 비처를 보던 선혜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몸이 좋지 않아 누워야 할 것 같습니다. 공주는 나중에 안아보겠으니 이만 가보시지요. 이따 저녁에는 묘심스님을 청해 염불을 들을 터이니, 오늘은 이곳에 다시 걸음 않으셔도 됩니다.”

단정하면서도 예의를 갖춘 선혜의 축객령에 비처의 얼굴이 굳어졌다. 일선에서 돌아온 이후, 선혜는 비처를 피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여인이 아이를 낳고 나면 더러 성격이 바뀌는 경우가 있다는 말에, 선혜가 몸과 마음을 회복할 수 있도록 배려하며 기다려보았지만 석 달이 지나도록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비처와 선혜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커다란 강이 흐르는 것 같았다. 

“알겠소. 그럼 푹 쉬시오. 오후에 군사들과 천천전에 다녀와야 하니 저녁에 예불은 부인 혼자 하셔야겠소. 그래도 괜찮겠소?”

“괜찮습니다. 다녀오십시오.”

비처가 몸을 일으키자 선혜는 안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까마귀가 가는 곳 

선혜궁을 나온 비처는 소리 없는 한숨을 몇 번이나 내쉬었다. 차라리 선혜가 속 시원하게 벽아에 대해 따져 묻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혼자 속으로 끙끙 앓는 것 같아 미안하고 답답했다. 비밀이 없던 부부 사이에 비밀을 먼저 만든 것은 비처였지만 설명하거나 사과할 틈을 전혀 주지 않는 선혜에게 자꾸만 서운하고 야속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대전에 도착한 비처는 호위대장을 향해 말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천천전으로 가자꾸나. 잠시 바람을 쐬고 와야겠다.”

“말을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잠시 후, 비처는 호위들을 데리고 궁을 나섰다. 답답한 마음을 떨치려는 듯 천천전을 향해 말을 달리던 비처는 문득 까마귀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저기 무엇이 있기에 까마귀들이 저렇게 모여 있는지 아는가?”

곁을 따르는 호위들에게 물었으나 당연히 알 리가 없었다. 비처는 말에서 내려 까마귀 떼를 향해 걸어갔다. 

“고구려에서는 까마귀를 신성한 동물로 여긴다고 하던데, 이 신성한 동물을 오늘 실컷 보게 되는군.”

그런데 몇 발자국 옮기기도 전에 까마귀 한 마리와 쥐 한 마리가 쪼르르 와서는 까악까악 찍찍찍 소리를 내며 비처의 앞으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아예 자리를 잡은 것처럼 비처의 발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비처는 재미있다는 듯 자리에 앉아 까마귀와 쥐를 보다가 혼잣말처럼 말을 걸었다. 

“한 놈은 연신 깍깍거리며 고개를 까딱거리고, 한 놈은 종일 입을 오물거리는 것이 나에게 무슨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느냐?”

비처의 말에 호위들은 헉 하는 표정으로 말없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최근 몇 달 사이 마립간과 선혜부인 사이가 서먹해졌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으나 그렇다고 혹시 비처의 정신까지 이상해진 것인가 싶어 겁이 났다. 호위대장은 동요하는 군사들을 향해 아무 말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앉아서 까마귀와 쥐를 한참 보던 비처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어린 호위 하나를 지목하며 명령을 내렸다. 

“이봐라, 저 까마귀를 따라가 보거라.”

“예? 예! 알겠습니다.”

놀란 토끼 눈을 한 어린 호위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대답을 한 후 비처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까마귀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호위가 다가서자 까마귀는 종종걸음으로 뛰듯이 앞서갔다. 까마귀의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어린 호위와 까마귀는 이내 비처와 호위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럼, 우리는 저들이 소식을 가져올 때까지 기다리자꾸나.”

비처는 느긋한 얼굴로 호위대장에게 눈짓한 후 바위에 기대앉았다. 호위대장은 말을 탄 군사 한 명에게 막내 호위를 따라가라고 명한 후 나머지 군사들을 주변에 배치했다. 햇빛이 드는 언덕은 따뜻했으나 아직 겨울이라 날이 일찍 저무는 것이 걱정이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마립간을 모시고 월성에 돌아가려면 까마귀를 따라간 막내가 한시라도 빨리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부지런히 까마귀를 따라가던 막내 호위병은 사람들이 많이 오고 가는 마을에 이르렀을 때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꽥꽥거리는 돼지 두 마리를 피하고 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까마귀도 사라져버렸다. 

“어쩐다.”

울상이 되어 발을 구르던 호위병에게 범상치 않은 복색의 노파가 다가오더니 종이로 만든 봉투를 한 장 내밀었다. 종이는 일반 백성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 물건이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마립간에게 가져다드리면 아실 겁니다.”

노파의 입에서 마립간이라는 말이 나오자 호위병은 정색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노파에게 마립간이 오신 것을 어찌 아는지 물어보려 했으나 노파는 순식간에 사람들 속에 섞여 사라지고 없었다. 그때 노파가 준 종이를 들고 멍하니 서 있던 막내 호위병을 발견한 군사가 말했다.

“어이! 여기 있었군. 어서 타. 지체하면 해가 떨어질 테니 서둘러 돌아가자.”

말을 타고 천천전으로 돌아간 호위병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비처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돼지 울음소리에 놀라 까마귀를 놓쳤는데, 남촌에 있던 웬 노파가 이걸 전해주었다 이 말이냐?”

“그렇습니다. 까마귀를 놓친 것은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호위병은 비처 앞에 엎드려 처분을 기다렸다. 

“되었다. 일어나라.”

비처는 호위가 가져온 종이봉투에 적힌 예언 같은 글을 읽었다.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 봉투를 준 노파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하니 이 말 속에는 분명 숨겨진 뜻이 있을 것이다. 허나 수수께끼 같아 도통 알 수가 없구나.”

고개를 갸웃하던 비처는 호위대장에게 봉투를 주며 말했다.

“태워라. 둘이 죽는 것보다는 하나가 죽는 것이 나을 테니 뜯지 않는 것이 좋겠다.”

순간 호위대장은 비처 앞에 무릎을 털썩 꿇으며 말했다.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태울 수 없습니다. 신국에 마립간은 한 분뿐입니다. 하나 죽는다는 소리는 신에게 마립간이 위험하다는 소리로 들리옵니다. 부디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불교신문3564호/2020년3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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