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작품해석의 모호성으로
학자들 ‘이현령비현령’ 대상

율곡도 김시습 일대기 정리
매월당 유학자 만들기 최선
스스로 불교적 자취 정당화

유교 숭상하나 행적은 '불교'
‘심유적불 논리’ 지금도 계속
불교텍스트 깊은 이해 보다
‘기일원론’에 매달린 '형국'

유불선(儒佛仙)의 가르침을 담은 <금오신화>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이다. 억불숭유의 조선시대에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에 맞서 생육신(生六臣)의 한 명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 작품이다. 율곡 이이가 ‘동방의 공자’라고 극찬한 김시습은 출가하여 설잠(雪岑)스님으로 수행하기도 했다. 코로나 19로 어려운 시기를 맞아 김시습이 민초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금오신화>를 불교 입장을 중심으로 8차례로 나눠 재조명한다. 오대혁 문화평론가는 ‘<금오신화>의 연구-선(禪)사상적 사유체계를 중심으로’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전문가이다. 

오대혁
오대혁

김시습이나 그의 소설 <금오신화>는 뜨거운 감자였다. 그의 사상이나 소설이 보여주고자 하는 주제에 대해 내로라하는 학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마디씩은 거들어댔다. 그의 저작들이나 소설은 해석의 모호성으로 인해 이현령비현령의 대상이기도 했다.

김시습은 <금오신화>를 쓰고 이렇게 말했다. “향로에 향 피우고/ 먹을 함빡 갈아서/ 기이한 새 이야기 두루 적고 적노라.(‘제금오신화(題金鰲新話)’)”라고 했다. ‘기이한 새 이야기’라 표현한 ‘풍류기화(風流奇話)’란 도대체 무엇인가? 근대 학문을 일구어온 학자들은 그 ‘풍류기화’에 매료되어 지류(支流)를 보고 대양(大洋)의 김시습과 <금오신화>를 온갖 형태로 난도질해 온 것은 아닐까? (그래봐야 칼 물을 베기니 바다는 멀쩡하겠지만.)

이자(李耔)가 <매월당집서>(1521)를 쓰고, 윤춘년(尹春年)이 <매월당선생전>(1551)을 쓰고도 한 30년이 지날 무렵 율곡 이이는 <김시습전>(1582)을 쓴다.

이때 그는 “유교의 큰 뜻을 잃지 아니하였다. 선가와 도가에 대해서도 또한 대의를 알았고, 깊이 병이 되는 근원을 깊이 연구하여 즐겨 선어(禪語)로 글을 지어 현묘하고 은미한 뜻을 밝혀내었는데, 남들이 따를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롭고 훤해서 막히는 것이 없었다.…마음으로는 유교를 숭상하고 행적은 불교를 따르다 보니 시대에 의심받게 되어 일부러 미친 척하여 사실을 감추려 하였다”라고 하여 ‘심유적불(心儒跡佛)’ 논란에 불을 댕긴다.

윤춘년이 쓴 전기에서 3일이나 부처 앞에 꿇어앉아 선정에 들었다는 표현을 내던져버리고, 불교와 도교가 지닌 병통의 근원을 파악하려 했다거나 감히 승려들이 대항하지 못했다는 서술을 가함으로써 김시습이 확고한 유자였음을 밝혔던 것이다.

게다가 성종 12년(1481)에 김시습이 환속해 제사를 지내며 불효를 뉘우쳤다 함으로써 심유적불의 인간이었음을 확고히 했다. 윤춘년이, 김시습이 제문을 지어 제사지냈다는 서술 다음에 그런 제문을 덧붙였던 것인데, 이런 제문은 <매월당집>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 글이었다.

율곡은 왜 김시습을 유자로 만드는 데 온 힘을 쏟은 것일까? 율곡은 소년 시절 부친의 첩에게 시달림을 당하여 승려로 불교에 의탁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동인이나 남인들에게 이단에 빠졌다는 이유로 사상공세를 당하곤 했다. 정적들은 “혹자는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던 적이 있다고 하며, 그가 읊은 시에 ‘전신은 바로 김시습이었는데 금세는 가도(賈島)가 되었구나’라고 하였다.”(<숙종실록>)

율곡은 20년 가까운 관직 생활에서 문제화된 자신의 전적을 합리화하기 위해 김시습이라는 인물을 빌려온 것은 아닐까? 이전 문집이나 전기에도 존재하지 않던 글들을 끌어들여 자신의 불교적 자취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율곡의 ‘심유적불’이라는 논리는 그때로 끝나지 않는다. 율곡의 논리를 따르는 근대 학자들은 김시습이 성리학을 근간으로 해 불교를 포섭했다는 입장을 편다. <금오신화>를 유교 이념에 입각해 불교를 체득하여 썼다는 입장(정병욱, 1958)에서부터, 기일원론(氣一元論)을 기저로 한 현실주의적 세계관을 보여준다는 입장(임형택, 1971), 일원론적 주기론(一元論的 主氣論)이며 자아와 세계의 상호우위에 입각한 대결로서 소설을 탄생시켰다는 입장(조동일, 1975)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논의는 주로 서울대 출신들에 의해 이어지는데, 이는 국문학계의 주류를 형성한다.

이후 김시습의 불교 사상에 대한 논의가 심화되면서, 그에 대한 논의를 저버릴 수 없어 기일원론적 주장을 기반으로 불교 텍스트들에 대해 언급하지만 매우 안이한 해석에 머무르고 만다.

예컨대 “불법은 세간에 있는 것이니 세간을 떠나서는 깨달음이 있을 수 없다. 세간을 떠나서 보리를 구하려는 것은 토끼에게서 뿔을 찾는 것이다.”(임형택, 1984)라는 혜능의 말을 인용하면서 김시습이 현실주의 정신으로 불교사상을 받아들였다고 보는 따위다.

김시습은 “외양간이나 마구간, 술집이나 기생방, 지옥 등이 한 곳도 화장세계가 아님이 없다.”(<대화엄일승법계도주병서>)라고 하면서 현실을 긍정해야 함을 화엄과 선사상에 기반을 두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들의 논의는 김시습이 지은 불교 텍스트들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나 이해도 없이 기일원론에 간당간당 매달려 있었다.
 

설잠스님(김시습) 진영.

[불교신문3564호/2020년3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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