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60주년 특별기획’
불교신문은 나의 도반 - 조용연 여주신문 주필


인터넷 불교신문 펼치는 순간
진정한 불자가 되고 싶어지며
정화의 발을 씻는 기분 들어

뛰어난 필력으로 佛法 전하는
스님들의 ‘인터넷 백고좌’
우러러볼수록 나도 맑아져

➲ 망해암에서 만난 불교신문

<불교신문>이 창간 60주년을 맞았다. “불교신문이 너의 도반이냐”고 물어온다면 사실 나는 손조차 내밀지도 못했다고 해야 맞다. 나의 불교는 어머니 치마꼬리 붙잡고 문경 산중에 있던 절에 따라가 ‘그래야만 하는 줄 알고’ 어쩐지 무서운 부처님 앞에 절만 따라 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국대학교를 나왔지만 교양필수 과목인 <불교학 개론>을 들어도 따분하고, 이사장으로 계신 큰스님이 참석하는 행사마다 함께 독송하는 ‘삼귀의’나 ‘사홍서원’의 순서조차 헷갈리는 수준이었다. 아직 <반야심경>을 다 외우지 못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나오면 “아, 중간쯤 지나가는구나” 아는 정도니 내 불교 수준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고 나는 이력서든 신상을 묻는 종교란에 어김없이 ‘불교’라고 적으면서도 괜히 혼자 쑥스러워 그냥 ‘친불교성향’쯤이라 우물쭈물해야 속이 편해진다. 

그러니 불교신문을 제대로 보았을 리가 없다. 10여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 위패를 안양 망해암에 모셨다. 기제사가 끝나고 나면 봉지 봉지 떡과 음식을 싸주는 공양주 보살 방문 앞에 신문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지나간 불교신문을 무슨 생각이 들었었는지 날짜별로 챙겨 예닐곱 부를 집으로 갖고 와 꼼꼼히 읽었다. ‘참 쓸모있는 신문이구나’ 생각한 것이 나와 불교신문의 첫 인연이다. 세월을 거슬러 내가 불교와 가진 인연을 좀 더 꺼내 본다.

➲ 동국사상연구회와 홍사성…

1972년에 동국대학교에 입학했으니 근 50년이 다 된 이야기다. 경찰행정학과 신입생인 내가 왜 햇볕도 들지 않는 학생회관 지하의 ‘동국사상연구회’에 가입하게 되었는지는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사상연구’라는 단어의 겉멋에 스스로 취한 게 아니었나 싶다. 이때 3학년이었던 선배들 가운데 유달리 불교학과 재학생이던 홍사성(현 불교평론 주간), 여익구 선배가 나를 아껴주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써클 회원이었지만 불교에도, 동국사상에도 이렇다 할 배움도 없이 ‘10월 유신’과 ‘대학가 위수령’의 공포 속에 군대로 자리를 피했다. 제대하고 돌아와 보니 동국사상연구회는 ‘불온써클’이란 ‘요시찰’ 딱지가 붙어 없어진 지 오래였고, 여익구 선배는 무슨 반국가적 범죄를 지은 죄목으로 사형인지 무기징역인지 선고받았다고 했다.
 

불교신문과의 인연은 어디에서 시작됐을까? 어릴 적 어머니와의 추억일수도 있고, 대학시절 수업이나 그 때 만났던 스님, 직장생활 중에 만나 늘 도반이 되어주었던 스님들일수도 있다. 사진 속의 스님은 늘 마음의 쉼터를 제공해주던 대둔산 태고사 정안스님이다.
불교신문과의 인연은 어디에서 시작됐을까? 어릴 적 어머니와의 추억일수도 있고, 대학시절 수업이나 그 때 만났던 스님, 직장생활 중에 만나 늘 도반이 되어주었던 스님들일수도 있다. 사진 속의 스님은 늘 마음의 쉼터를 제공해주던 대둔산 태고사 정안스님이다.

➲ 같은 반 스님의 컨닝을 돕다

이런 발칙한 제목을 쓰는 저를 용서하시라. 1972년은 동국대학에 ‘승가학과’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학인 스님들은 먹물 옷을 입고 교복 입은 우리와 교양 영어 시간에 함께 강의를 들었다. 중간고사 때가 되자, 한 스님이 제안을 해왔다. “사실 종비 유학생인 우리는 B학점 이상을 받지 못하면 문중에서 주는 장학금이 끊긴다. 다른 과목은 괜찮은데 영어가 문제다. 좀 도와달라.” 난감한 부탁이었지만 딱하기도 했다.

예상문제를 해석해 여러 장 넘겨주었는데 시험 당일 스님은 장삼 소맷자락에 넣고 온, 깨알같이 쓴 소위 ‘페이퍼’를 열심히 참조하면서 시험을 치렀다. 효과를 보았는지 스님이 “고맙다”며 사준 점심을 먹으면서도 꽤나 뿌듯했던 기억이 남아있는 건 죄책감이 전혀 없었다는 뜻이겠다. 부처님도 부처의 법을 배우다 일어난 일이니 오래전 용서하셨으리라.

➲ 경찰대 불교학생회와 정무스님

이후 경찰관이 되어 경찰대학 지도교관으로 발령받아 부가적으로 맡은 임무가 ‘경찰대학불교학생회’ 담당 교관이었다. 대학 측에서도 내 성향에 맞는 업무라고 판단한듯했다. 대불련 소속 ‘경찰대학’과 ‘세무대학’ 불교학생회 지도법사는 여주 신륵사 주지로 있던 정무스님이었다. 성정이 맑고 곧아 학생들이 무척 좋아하는 스님이라 어느 날 여쭈었다.

“스님은 왜 유독 경찰대학과 세무대학 불교학생회에 공을 들이시나요?” “경찰과 세리(세무공무원)는 일반 대중의 생활에 직접 영향을 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지. 일반 재가 불자 100명을 만드는 것보다 제대로 된 경찰과 세리를 1명이라도 만들면 그게 세상에 소금이 되기 때문이요.” 너무나 명쾌한 답변이었다. 그러던 중 신륵사에서 열린 불교학생회 여름수련회에 참가한 학생 한 명이 남한강에 그리 깊지도 않은 물에 빠져 죽었다.

희한하게도 그는 기독교 신자였다. 그가 왜 불교수련회에 참가해 죽었는지는 인연이라 말해야 할지, 팔자라 해야 할지 지금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뜻밖의 사고에 날벼락을 맞은 학생의 부모님을 간신히 위로했고, 모인 조의금은 장례비를 빼곤 전액 불교학생회에 기증되어 경찰대학 구내에 불상 봉안으로 태어났다. 그 기구한 사연을 복장(腹藏)에 적어 넣었으니 지금도 살아 있을 것이다.

➲ 상인스님과 나 그리고 야학

1982년 가을, 김포경찰서 경비과장이던 시절, 강화행 버스 맨 뒷자리에 탄 청년 스님과 인사를 나눴다. 휴전선 너머가 보이는 김포 문수사의 재무로 있던 상인스님과의 인연 시작이다. 나의 도반이라면 승가에서는 상인스님이다. 상인스님은 ‘스님입네’ 하지 않아서 좋았다.

상인스님이 김포에서 신부님, 목사님과 지역활동가 두어 분과 함께 야학을 꾸리자 나도 가담했다. 그다지 ‘공부방’ 활동이 길지는 못했으나, 경찰이 불온시하여 샛눈 뜨고 보는 야학에 경찰 간부가 끼이는 것도 별난 일이었다.

그해 크리스마스가 돌아오자 스님은 교회강단에 올라섰다. 아기 예수의 탄신을 축하하며 성령의 축복을 기원하는 짧은 설법을 목탁으로 마무리를 했다. 지금은 그런 일이 흔하지만 40년 전만 해도 이런 성직자의 도량은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이후, 월출산 도갑사를 비롯해 스님이 절을 옮겨갈 적마다 충성고객처럼 찾아다녔고, 휴가철에는 아예 며칠을 요사채에 박혀 빈둥거리기도 했다. 한 번도 새벽예불이나 도량석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이 불성실한 나를 세속의 도반으로 믿어주어 음성 가섭사 주지로 있는 스님과 지금도 가까이 지낸다.

경찰의 종교활동은 특히 경승과 경목 활동에서 두드러진다. 호국불교의 전통은 호국경찰과 맥을 같이 한다. 33년 동안 여러 경찰관서를 다니면서 많은 경승 스님들을 만나 정신적인 위로와 도움을 받았다.

경찰관은 물론, 전·의경들로 하여금 불법(佛法)에 눈뜨게 하고, 부대 위문까지 알뜰하게 챙겼다. 시국에 대한 따끔한 질책도 마다않던 수덕사 옹산스님과 50년을 한 절만 지켜온 태고사 정안스님이 하룻밤 관음전 옆 요사채에서 불법의 큰 기운 받으라던 격려는 오래 기억된다.
 

음성 가섭사 산사음악회 하던 날 상인스님과 필자 조용연.
음성 가섭사 산사음악회 하던 날 상인스님과 필자 조용연.

➲ <한국의 강마을> 여행 6년, 그건 스스로에게로 가는 수행

이 산하 골골에는 산이 주름져 강이 되고 부처의 가르침이 흐르고, 강마을엔 부처가 살고 있다. 경찰을 퇴직하고 자전거로 국토를 돌아보기로 하였다. ‘한국의 강둑길’이란 제목으로 매월 국가하천 발원지에서 바다에 안기는 종점까지 자전거를 타고 강마을의 풍경, 역사, 문화, 전설, 사람, 그리고 옴닥거리며 사는 이야기를 <자전거생활>이란 잡지에 6년간 연재했다.

역사에도, 사람에도 불교가 녹아 있고 처처에 불성(佛性)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나니 나도 어언 지하철 공짜 거사가 되었다. 이제라도 재가불자로서 ‘처사’ 소리라도 듣고 살면 그래도 밥값은 하는 셈이 되겠지만 글쎄다. 

➲ 어깨너머로 본 불교 

내가 생각해도 ‘아쉬움, 바람’이라고 말하자니 ‘친불교성향’ 주제에 좀 주제넘다. 그래도 ‘운악산 봉선사’라는 순 한글 일주문 현액과 주련을 보면 그다지 넓지 않지만 크낙한 품에 안기고 싶고, ‘큰법당’이라고 쓴 대웅전 부처님은 주절주절 못난 내 사설도 다 들어주실 것만 같다.

스님들이 가장 좋아하는 대중가요이자 산사음악회의 단골 메뉴 중 하나인 ‘천년바위’의 작사가 장경수가 산사에 백일을 틀어박혀 익숙한 트로트 가락에 맞춰서 경전을 게송하기 쉽게 다시 풀어 쓴 노랫말 CD도 유용한 포교의 수단이 되리라.

설·추석 명절이 되면 조상 차례로 절을 찾는 발길이 늘어나는 게 눈에 보인다. 불교 포교의 기회다. 의식을 진행하는 스님은 몇 페이지 어느 경전을 읽고 있는지를 중간 중간 좀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다. 스님 예불을 따라가다 놓쳐 우물쭈물하는 ‘예비 불자’에겐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래도 인터넷으로 불교신문을 펼치는 순간만큼은 나도 정화의 발을 씻는 기분이 든다. 뛰어난 필력으로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스님들의 인터넷 백고좌는 우러러볼수록 내가 맑아진다. 회갑을 맞은 불교신문에 어찌 감히 ‘나의 도반’이라고 말을 걸 수 있으랴. ‘속가 천리 속가 만리’ 외쳐 봐도 따라오는 죄업같은 인연에 대해 잠시 산문에 기대어, ‘도반의 눈’으로 해법이 있는지 알려 달라 조를 뿐이다.
 

조용연
1954년 경북 문경 출생. 동국대 경찰행정과를 졸업하고 서울광진경찰서장, 여주경찰서장, 주중한국대사관 참사관(베이징), 울산·충남지방경찰청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여주신문> 주필로 일하면서 여행작가, 국제펜한국본부 회원, 중앙경찰학교 외래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에 자전적 다큐에세이 <빽없는 그대에게>, <반나절 주말여행>(공저)이 있고, 월간 <자전거생활>에 ‘한국의 강둑길’, ‘대중가요의 골목길’을 연재하고 있다.

[불교신문3563호/2020년3월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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