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글고 부드러운 백제불상 특징 7세기 무렵 형성

백제불교 동진과 외교로 시작
호승 마라난타스님 불교 전래

초기에는 석가모니불상 중심
6세기 후 불보살상 다양해져

관음보살입상 독존 조성 활발
살짝 내민 한쪽 무릎 비튼 몸
굴곡 따라 흐르는 옷 주름 등
신체비례와 자세 자연스러워져

백제 불상은 남아 있는 수가 적고 불상에 대한 기록도 빈약하여 구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불교 전래 다음 해인 385년(침류왕 2)부터 성왕(聖王)이 양(梁) 무제(武帝)를 위하여 웅진(熊津, 공주)에 대통사(大通寺)를 세운 527년(성왕 5)까지 불교 관련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불상 조성을 짐작하게 하는 기록들은 사비(泗沘, 부여)로 천도한 538년 이후에나 나타난다. 성왕, 위덕왕, 혜왕, 법왕 등 불교식 시호(諡號)가 사용되고, 왕실 발원 사원에 대한 기록이 보이기 시작한다.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384년(침류왕 원년)에 동진(東晋)의 마라난타(摩羅難陀)에 의해서이다. 호승(胡僧)이라 기록된 그는 동진 스님이 아니라 동진에 불교를 전하러 왔던 인도나 중앙아시아 출신의 전법승(傳法僧)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그가 전한 불교는 당시 동진의 격의불교(格義佛敎, 난해한 이론을 중국 사람에게 익숙했던 유교나 도교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불교)라기보다 인도 불교에 가까운 것이었다.
 

사진 왼쪽부터 국립공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공주 의당 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7세기 초 조성, 높이 25cm)과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부여 규암면 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7세기 중반 조성, 높이 21.1cm)을 비교하면 후반으로 갈수록 늘씬한 신체 비례와 자연스런 자세를 갖추게 됨을 알 수 있다.
사진 왼쪽부터 국립공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공주 의당 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7세기 초 조성, 높이 25cm)과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부여 규암면 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7세기 중반 조성, 높이 21.1cm)을 비교하면 후반으로 갈수록 늘씬한 신체 비례와 자연스런 자세를 갖추게 됨을 알 수 있다.

백제 불교는 마라난타의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양국 간의 외교 관계 속에서 시작되었으며, 침류왕이 385년에 한산(漢山, 서울)에 절을 짓고 10명을 출가시키는 등 국가적인 후원 속에서 발전하였다. 백제 최초의 사원인 이곳에 봉안했던 불상은 마라난타가 가져왔을 법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부여의 신리(新里) 절터에서 출토된 6세기의 금동불좌상과 별반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금동불좌상은 부여에서 출토되었지만 조성 시기로 보아 웅진시대 불상(475-538)으로 추정된다. 불상은 통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있으며 선정인을 결한 채 가부좌하고 있다. 불상은 안 틀과 바깥 틀을 이용하여 주조함으로서 속이 비어 있으며, 별도로 만든 좌대 위에 끼웠던 것으로 보인다. 

한성시대와 웅진시대의 백제 불상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백제 불상은 고구려와 같이 불교 전래 초기에는 석가모니불상이 조성되다가 6세기 이후 다양한 불상과 보살상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왕이 538년에 태자상(太子像)과 관불반(灌佛盤)을 왜(倭, 일본)에 보낸 기록은 금동탄생불입상의 조성과 석가(싯다르타 태자)탄신일에 태자상을 목욕시키는 관불 의식이 6세기 초에 백제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552년에 금동아미타불삼존상을 일본에 보낸 기록은 6세기 중반에 아미타불의 정토신앙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7세기 이후에는 독존 형식의 관음보살입상이 조성될 만큼 관음보살신앙이 유행하였고, 639년경에 완성된 익산 미륵사(彌勒寺)에서는 미륵하생신앙(彌勒下生信仰)을 가람 속에 구현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부여 관북리(官北里)에서는 654년에 사택지적(砂宅智積)이 자신의 원찰을 조성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사택지적비가 출토되었는데, 여기서는 백제 귀족의 법화신앙을 엿볼 수 있다. 

6세기 이후, 백제 불교와 불상은 양나라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양 무제가 새로 “대통(大通)”이라는 연호를 발표하자 백제 성왕은 527년에 웅진에 대통사를 건립하였고, 541년(성왕 19)에 성왕이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열반경(涅槃經)> 등의 경전을 요청한 사실이 그것이다. 특히 541년, 불경과 함께 온 양나라 공장(工匠, 왕실 장인)과 화사(畵師)들은 백제 불상에 새로운 조형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일본서기(日本書紀)> 등 일본 측 기록을 통해서도 백제 불상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다. 성왕이 538년에 금동탄생불입상을, 552년에 금동아미타불삼존상을 왜에 보냈다는 기록 외에 562년에 일본의 화약사주(和藥使主)가 불상을, 584년에 녹심신(鹿深臣)이 미륵석상을, 좌백련(佐伯連)이 불상 1존을 각각 가져갔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들 기록은 6세기 백제에서 석가모니불상, 미륵불상, 아미타불상 등 다양한 불상이 조성되었음을 알려 준다. 

백제가 부여로 천도할 때 왕경 계획 속에 포함된 대표적인 사원으로 정림사(定林寺)가 있다. 정림사는 중국 남경(南京, 남조의 수도)의 종산(鍾山) 정림사(5세기 후반 6세기 전반), 일본 아스카(飛鳥)의 정림사(7세기)와 이름이 같은 국제적인 성격을 지닌 사원이다.

<일본서기>에는 정림사의 금당(법당)에 모든 중생들의 깨달음을 위하여 545년(성왕 23)에 만든 장육존상(丈六尊像)이 봉안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선정지림(禪定之林)”에서 따온 정림사의 이름에서 6세기 중반 백제 스님들의 선관(禪觀) 수행을 상상할 수 있다. 이곳에서 멀지 않는 부여 군수리(軍守里) 절터에서는 스님의 선관 수행의 대상으로 조성되었던 석조불좌상이 출토되었다. 

1935년, 군수리 절터의 목탑 심초석에서 발견된 이 불상은 통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방형 대좌 위에서 선정인을 결한 채 가부좌하고 있다. 살짝 뜬 눈, 턱을 앞으로 내민 채 약간 숙인 얼굴, 곧은 자세의 상체에서 명상하는 석가모니 붓다의 모습이 연상된다.

몸에 비해 큰 머리와 손, 좌우대칭을 이룬 법의 주름 등에서는 초기 불상의 특징이 보인다. 법의 자락은 가슴 앞에서 U자를 그리며 흘러 내려 대좌의 윗부분을 덮고 있는데, 충청남도 청양 출토의 소조대좌와 같이 활달하게 표현되었다. 불상은 고구려와 신라 불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무른 재질의 곱돌(활석, 납석)로 만들어졌다.

부여의 부소산성(扶蘇山城)에서 출토된 석조보살반가사유상과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면 읍리의 절터에서 출토된 석조불보살병립상(石造佛菩薩竝立像)도 같은 재질이다. 불상 뒷면이 밋밋하게 처리되어 있고 방형 대좌의 아래쪽을 어딘가에 끼우기 위해 나모나게 깎은 것을 통하여 원래는 광배와 좌대가 함께 조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에 관한 어떠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으나, 당시의 분위기로 보아 석가모니불상일 가능성이 높다. 

현존하는 백제 불상은 대부분 위덕왕(554-598)과 무왕(600-641) 때인 6세기 후반과 7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이다. 위덕왕은 567년경에 부여 능산리에 아버지 성왕을 위하여 능사(陵寺)를, 577년에는 먼저 죽은 아들들을 위하여 백마강변에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였다.

능사와 왕흥사에 봉안된 불상들은 남아 있지 않으나 왕경 부여의 다른 절터에서는 이 때 조성된 불상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군수리 출토 석조불좌상과 금동보살입상, 신리 출토 금동보살입상, 부소산성 송월대(送月臺)에서 발견되었다는 정지원명(鄭智遠銘) 금동불입상, 가탑리 출토 금동불입상, 부소산성 출토 석조보살반가사유상, 부여 규암면 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 등이 그것이다. 
 

백제가 부여로 천도할 때 왕경계획에 포함돼 창건한 정림사는 백제 스님들의 선관(禪觀) 수행을 떠올리게 한다. 정림사 인근인 군수리에서는 선관 수행의 대상으로 조성되었던 석조불좌상이 출토됐다. 6세기에 조성된 이 불상은 높이 13.5cm이다.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백제가 부여로 천도할 때 왕경계획에 포함돼 창건한 정림사는 백제 스님들의 선관(禪觀) 수행을 떠올리게 한다. 정림사 인근인 군수리에서는 선관 수행의 대상으로 조성되었던 석조불좌상이 출토됐다. 6세기에 조성된 이 불상은 높이 13.5cm이다.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정지원명(鄭智遠銘) 금동불입상은 국적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백제의 왕성인 부소산성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부소산성 출토 석조보살반가사유상은 상체가 없으나 반가사유상이 분명하여 스님의 선관 수행의 대상으로 조성된 미륵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가탑리 출토 금동불입상의 둥글고 부드러운 조형은 7세기 초를 기점으로 백제 불상의 조형적인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한편 7세기가 되면 관음보살신앙이 유행하면서 관음보살입상이 독존 형식으로 조성된다. 이는 548년에 이미 관음보살입상이 주존으로 조성되던 양나라 등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다. 발정(發正) 등 스님들이 남조에서 <묘법연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을 공부하고 귀국하면서 관음보살의 영험이 6세기 후반부터 백제에서 유행하였고 7세기에 들어와서는 관음보살입상이 독존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공주 의당면 송정리 절터에서 출토된 금동관음보살입상과 부여의 규암면 절터에서 출토된 2존의 금동관음보살입상은 대표적인 예이다. 의당 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은 전체적인 비례, 조형적인 특징, 바깥 틀만 사용한 주조 방식에서 7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보관 중앙에는 관음보살임을 알려주는 불좌상(화불, 化佛)이 표현되어 있다.

7세기 중반이 되면, 규암면 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6세기 금동보살입상의 특징인 정면관 중심의 조형과 경직된 분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나 늘씬한 신체 비례와 자연스런 자세를 갖추게 된다. 즉 살짝 내민 한쪽 무릎과 비튼 몸, 몸의 굴곡을 따라 유기적으로 처리된 법의 주름에서 이러한 변화가 감지되며, 얼굴에서는 양감을, 몸에서는 입체감을, 몸에서 떨어진 팔에서는 공간감을 느낄 수가 있다.

[불교신문3562호/2020년3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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