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스님께서 말씀하신 삼매가 이런 기분일까?

삽화=견동한
삽화=견동한

선혜부인

“아버지, 마립간께서는 왜 그리 일선에 자주 가시는 것인가요?”

“그거야 민심을 안정시키고…”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어려운 백성들에게 곡식을 하사하는 건 당연하죠. 마립간은 훌륭한 분이세요. 어려움도 많았지만 이제 왜군이 감히 신국을 함부로 침략하지 못하니 얼마나 좋은 일이에요.”

“그렇습니다. 일선은 왜군이 자주 노략질을 하던 곳이니 마립간께서도 신경을 쓰시는 것이지요.”

“그게 전부입니까?”

“무엇이 걱정이십니까?”

“여인의 본능입니다.”

둥글게 부푼 배를 쓰다듬는 선혜의 표정은 부드러웠으나 목소리는 냉랭했다.

“제가 사람을 시켜 조사하길 원하십니까?”

이벌찬 내숙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원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가져야 하는 딸 선혜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동안 잘 넘어갔다고 생각하며 안심했는데 오늘은 아무래도 대충 넘어가기 힘들 것 같았다. 내숙은 무거운 얼굴로 딸 선혜를 바라보았다.

“일선에는 마립간께서 스승으로 모시는 분이 계시옵니다.”

“스승으로 모시는 분들이요? 마립간께 그런 분이 계셨습니까? 왜 저는 알지 못했죠?”

“마립간께서 비밀로 하셨습니다. 저도 최근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마립간의 마음을 사로잡은 분은 도대체 어떤 분입니까?”

“부처님을 따르는 스님이십니다.”

“네?”

선혜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추더니 다시 물었다.

“일선에 스님이 계시다는 말씀입니까? 마립간께서 스님을 뵈러 일선에 가신다고요?”

내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소지마립간(비처)은 일선에 갈 때마다 아도화상과 그의 제자들을 만나곤 했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부처님의 말씀에 매료되었으나 공식적으로 불교를 인정하는 것은 망설였다. 귀족들과 백성들의 반발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선혜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재차 물었다.

“그게 전부입니까? 일선에 가는 것이 오직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입니까?”

내숙은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어머니 조생부인이 아버지 습보 갈문왕을 다그치던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선혜는 얼굴이며 분위기, 말투까지 할머니 조생부인을 쏙 빼닮았다. 내숙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눈을 질끈 감았다. 선혜의 추궁을 받는 것보다 차라리 군사를 훈련하고 산성을 쌓는 것을 감독하는 것이 훨씬 편한 거 같았다. 

“마립간께서는 일선에 가실 때마다 날이군에 들리십니다.”

“알아요. 날이군에는 마립간과 각별하신 섬신공이 계시죠.”

“섬신공의 아내도 계십니다. 그분도 마립간과 각별하신 분이십니다.”

“네?”

선혜의 눈이 커졌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섬신공의 아내는 미해 서불한의 하나뿐인 손녀입니다. 어미의 신분이 귀족이 아니고 구천공께서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분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몇 년 전 마립간께서 일선에 가시던 길에 우연히 알게 되신 것이지요.”

내숙은 한숨을 크게 두 번 내쉰 후 읊조리듯 말했다.

“마립간께서는 섬신공의 아내 벽아부인을 연모하고 계십니다.” 

배신감에 온몸이 떨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배가 찌르듯이 아팠다. 선혜는 배를 두 손으로 감싼 채 쓰러지고 말았다. 

승려 묘심

선혜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지 여러 날이 흘렀다. 처음에는 오랜 진통 때문에 탈진하여 잠시 혼절한 줄 알았으나 공주가 태어난 지 사흘이 지나도록 선혜는 눈을 뜨지 않았다.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식은땀을 흘리기도 하고 꿈을 꾸는 듯 알 수 없는 말을 외쳐대기도 했다. 선혜의 진통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비처는 어여쁜 공주의 탄생에 감동할 틈도 없이 시름에 잠겼다. 고민 끝에 비처는 일선으로 사람을 보냈다. 어머니 파호부인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렸을 때, 아도스님이 향을 켜고 목탁을 치며 염불을 외워 쾌유한 적이 있다고 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직 소식이 없느냐?”

비처가 초조한 목소리로 시녀들을 일곱 번째 다그쳤을 때, 방문이 열리더니 아직 수염도 나지 않은 어린 승려가 들어왔다. 일선군에서 본 적이 있던, 아도의 막내 시자였다.

“스승님께서 저에게 가보라 하셨습니다.”

비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을 하며 어린 스님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스님.”

“스승님께서는 수행 중이시라 저를 대신 보내셨습니다. 직접 오지 못하셨으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세히 일러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바로 시작하시면 됩니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지 오늘이 벌써 나흘째입니다. 의원들이 말하길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고, 남은 것은 선혜의 의지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스님, 제발 선혜가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스님은 선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 밑은 푹 꺼지고 안색은 창백했으나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일국의 왕비인 그녀가 도대체 어떤 마음의 고통을 겪고 있기에 정신을 차리는 것조차 거부하는 것인지 가슴이 아팠다. 

“부인을 잠시 일으켜주십시오.”

시녀들이 얼른 다가와 선혜를 앉혔다. 선혜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고 몸에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스님은 선혜의 머리에 손을 얹고 청아한 목소리로 진언을 외웠다. 진언은 마치 부드러운 바람처럼, 깨끗한 빗방울처럼 무거운 공기와 답답했던 마음을 씻어주었다.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비처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진언에 빠져들었다. ‘아도스님께서 말씀하신 삼매가 이런 기분일까?’ 비처는 아무것도 없이 환하게 빛나는 세상에 마치 자신과 진언만 남은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두렵기는커녕 이 순간이 사라지는 것이 아쉬웠다. 이윽고 진언 소리가 멈추고 침묵이 찾아왔다. 비처가 눈을 떠보니 선혜와 어린 스님이 마주 보고 있었다. 선혜부인이 의식을 찾은 것이었다. 

[불교신문3562호/2020년3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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