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주
이봉주

내가 태어난 곳은 춘천 서면이다. 예전에는 시내를 가려면 나룻배를 삿대로 저어서 강을 건넜다. 그리고 하루에 1~2번 다니는 버스를 타야만 하는 작은 마을이다. 병원 가기가 힘들어서였을까, 아니면 당시 의술이 발달되지 않아서일까? 예전에는 태어나서 얼마 살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내가 두 돌 정도 되었을 무렵, 어머니는 흰 떡가래처럼 늘어진 나를 등에 업고 병원에 가셨단다. 의사는 나를 진찰하고 나서 “다 죽은 애를 뭣 하러 데리고 왔느냐”며 집에 가서 편히 죽게 해 주라고 했단다. 의사의 말에 등 떠밀려 어머니는 나를 다시 둘러업고 집으로 돌아왔다.

끊어지지 않은 목숨을 어찌할 수 없어 윗목에 홑이불로 덮어 놓은 어머니는 마을 밭 한가운데에 있는 석탑(강원도유형문화재16호) 앞에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수없이 부르며 나를 살려 달라고 밤새 애원하며 빌었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를 관세음보살님이 들으신 것일까?

점심 무렵 탁발 노스님이 집 앞에서 시주를 청했다. 어머니는 스님을 방에 들여 점심공양을 드렸는데 공양을 드시던 노스님이 “저기 이불로 덮어 놓은 것이 무엇이오” 하고 물었다. 어머니는 “아이가 병원에서도 고칠 수 없는 병으로 죽기만 기다리고 있다”고 대답했다. 노스님이 말없이 밥상을 미루어 놓고 나를 살피더니 콩알만 한 ‘환’을 은단 크기로 나눠서 숟가락에 물로 풀어 입을 벌리고 흘려 넣었다. 그리고 공양을 다 드신 후 가셨다.

노스님이 가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손바닥만 한 미역줄기 같은 변을 싼 후 점점 생기가 돌아 살아났다고 한다. 전설의 고향이나 설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처럼 살아난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 살아났고 늘 부처님의 가피로 살아가고 있다는 믿음을 잊은 적이 없다. 어머니는 나를 부처님이 죽은 목숨을 되살려줬다며 절에 가실 때 마다 꼭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그리고 나에게 다른 종교를 믿으면 안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지금 구십 살이 되신 어머니는 아직도 나에게 절에 다니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고 하루에 관세음보살을 다섯 번 이상 외라고 늘 당부를 하신다.

사실 나는 불경을 한 구절도 외는 것이 없다. 그렇지만 나는 탐욕이 생길 때, 분노가 치밀 때, 어리석어질 때, ‘관세음보살’을 수없이 되뇐다. 관세음보살 한 구절은 나에게는 팔만사천 번뇌를 다스려 주는 어머니의 경전이다. 

<열반경>에는 모든 중생은 본래부터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부처 이름을 읊는 깊은 마음 하나만으로도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나 성불을 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으며 살고 있다.

※ 이봉주 시인은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2014년 강원도문인협회 주최 전국신인작품상 공모 시 부문 장원을 수상했으며 2016년 경북일보 문학대전 대상을 받았다. 2020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됐다.

[불교신문3562호/2020년3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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