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지안스님 ‘부처님의 축원’

조계종 고시위원장 지안스님(영축총림 통도사 반야암)은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모두가 불안해하는 이 시대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타인을 제도하기 위해 자신의 성불 미룬 지장보살의 ‘대비천제’ 정신이라며 부처님께서 비야리성 사람들을 위해 설한 ‘축원 송(頌)’으로 시작하는 법문을 2월27일 불교신문에 보내왔다. 

조계종 고시위원장 지안스님(영축총림 통도사 반야암 주석). 불교신문
조계종 고시위원장 지안스님(영축총림 통도사 반야암 주석). ⓒ불교신문

“두 발 가진 사람도 안온을 얻고 네 발 가진 짐승도 또한 그러하며 길을 가는 이에게도 축복이 있고 길을 오는 이에게도 축복이 있어지이다. 밤이나 낮이나 안온을 얻고 모든 괴로움이 없어지이다.”

부처님이 나열성(羅閱城: Rajagraha) 가란타죽원(迦蘭陀竹園)에 계실 때 이웃 비야리성(毘耶離城: Vaisali)에 전염병이 돌았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비야리성 사람들이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래께서는 자비로 중생을 가엾이 여기신다. 일체중생을 버리지 않기를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시듯 한다. 부처님을 이곳으로 오시게 하면 역병(疫病)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최대(最大)라는 장자가 부처님을 찾아가 비야리성으로 와 주시기를 청했다. 그때 부처님은 이미 아사세왕과 나열성에서 90일 안거(安居)를 하기로 약속을 하였음에도 비야리성 사람들의 청을 외면할 수 없어 아사세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구들을 거느리고 비야리성으로 가신다. 성문(城門)에 도착한 부처님이 비야리성 사람들을 위하여 축원의 송(頌)을 읊었다.

모든 중생에게 안온한 안락이 누려지기를 기원하는 간절한 축원이었다. <증일아함경> ‘역품’ 중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매우 감동스러운 장면이다.

나라 안이 온통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때문에 불안에 휩싸여 있다. 연일 증가하는 감염확진자 수가 방송으로 보도되고 있고 전염을 막기 위해 거의 모든 모임이 중단되고 있는 판국이다. 전국의 몇몇 사찰은 산문을 폐쇄하기도 했다.

방역이 잘 되어 피해가 줄어들도록 정부와 의료계에서 힘쓰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감염자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평생을 기도하며 사는 우리 같은 사문들은 조석으로 불전에 나가 국태민안을 빌며 어서 이 어려운 국면이 해소되기를 기원하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찍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세계를 생(生)ㆍ노(老)ㆍ병(病)ㆍ 사(死)의 세계라 하였다. 이 4가지가 인생의 근본 문제요, 중생이 의지해 사는 세계마저도 성(成) · 주(住) · 괴(壞) · 공(空)의 4가지 모습으로 끊임없이 순환한다고 하였다. 이 말을 통해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두 언제나 무상(無常)의 현장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운명(運命)이라는 구속을 스스로 받고 태어나므로 태어난 후에 부딪히는 문제는 늙어가고 병 옮는 문제다. 천천히 잘 늙어 오래 살고 건강을 유지하여 신체적 활동에 장애를 받지 않고자 하는 것이 사람 사는 생활의 일차적인 목표가 되었다.

예로부터 세속에서 추구하는 5가지 복을 말할 때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라 하여 장수와 건강 부귀를 3대 복(福)으로 취급해 왔다. 이는 곧 현실에서 바라는 3대 소원이기도 하다.

누구나 추구하는 인간의 행복이란 쉽게 말하면 삶의 만족도에 따라 결정된다. 사람들은 자기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서 불만을 느끼며 이것을 불행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인간이 해야 하는 일은 나와 남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일이다.

뜻밖의 재난이 일어나면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어 공포와 불행의 그늘이 드리워진다. 생활이 정상적으로 되지 않고 몸과 마음의 안녕이 파괴되고 만다. 모든 중생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평화와 자유이다. 불교 용어로 말하면 열반과 해탈인데 이것이 위협받는 세상을 예토(穢土)라 하고 악세(惡世)라 한다.

불교의 역사에서 보면 중생을 교화 제도하기 위한 큰 전환점이 있었다. 그것은 소위 말하는 대승불교가 태동되어 새로운 수행가풍을 세워 진작시킨 것이다. 흔히 말하는 소승과 대승의 본질적인 차이를 알아야 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소승은 해탈 지상주의였다. 번뇌와 세속적인 욕망을 끊고 자기 일신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이를 두고 독선적인 자리(自利)에 치우친 수행이라 하였다.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들의 수행이 그러했다. 이들의 지상과제는 번뇌를 끊고 해탈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불법(佛法)의 최후 완성된 경지를 알지 못했다. <법화경>에서 일승(一乘)의 진리를 내세우며 이 일승법은 성문이나 연각들이 알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화엄경>에서는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지혜제일이었던 사리불이 화엄의 진리를 알아듣지 못해 귀머거리가 되었다고 하였다. 물론 이는 대승을 강조하기 위한 방편설이라고 볼 수 있지만 어떻든 대승의 본질을 천명하기 위하여 소승을 평가절하한 말들이다.

대승이 어째서 탁월한가? 그것은 대승은 해탈 지상주의에서 벗어나 구세 대비주의로 전환하여 이타(利他)에 중점을 둔 수행관을 새롭게 내세웠기 때문이다. 대승에 새롭게 등장한 수행자 상이 보살(菩薩)이었다. 이들은 “내가 제도를 받지 못하더라도 남을 먼저 제도한다(自未得度先度他)”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그리하여 대비천제(大悲闡提)라는 지장보살 같은 비(悲)의 윤리를 실천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남을 제도하려는 대비심을 먼저 앞세우기 때문에 자신이 성불할 겨를이 없어 성불이 포기된 이를 대비천제라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성불을 포기한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라 하겠지만 말 뒤에 숨어 있는 뜻을 찾아내야 한다. 오늘날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지장보살과 같은 구세대비의 보살정신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대승의 마음이 함양되지 못하고 어리석고 그릇된 집착으로 인간애가 상실되고 인간성이 유린되는 현상들이 빈번히 나타난다.

현대문명 사회에서 곧잘 지적되는 것이 개인주의 발달에 대한 비판이다. 남의 일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하고 혼자만의 편안함만 누리려 하며 혼자만의 공간을 좋아한다. 혼밥, 혼술이라는 신조어가 생긴 지 오래되었다. 사회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하여 결혼도 사양하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경향도 나타난다.

물론 사회 풍조이기는 하지만 불교적으로 말하면 일종의 소승으로의 회귀이다. 명분은 대승적 차원을 말하면서도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이기적 생각을 앞세우는 소승적 자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전염병이 불안한 것은 남이 걸린 병이 내게도 옮아올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코로나19 때문에 그 말만 들어도 전전긍긍하게 되는 작금의 사태가 무엇을 말하는가. 경전의 이론으로 말하면 겁탁(劫濁)의 후유증이다. 이번 사태를 평면적으로 놓고 보면 또한 말세 후유증이라고도 하겠다.

대승 경전에 오탁(五濁)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오탁악세(五濁惡世)라 하여 다섯 가지 험악한 것이 만연해 있어 좋지 못한 세상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다만 인간의 업(業)을 전제로 해서 하는 말이다. 맨 먼저 설명하는 겁탁은 겁이 탁하다는 말이다. 겁(劫)은 긴 시간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원래는 햇수를 계산할 수 없는 시간 단위인데 일설에는 4억3200만년이라고도 한다. 겁이 긴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기는 하지만 겁도 찰나의 시간 단위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마치 초(秒)가 없으면 분(分)이 없고 분이 없으면 시(時)가 없는 것처럼 가장 짧은 시간의 단위인 찰나(刹那)를 번역하면 염(念)이다. 한 생각이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최초를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겁이라는 것이 사람의 생각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각이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겁탁은 생각이 탁하다는 말이다. 생각이 탁하니까 사람에게 우환(憂患)이 되는 좋지 않는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겁탁의 구체적인 사례를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부족해지고 질병이 퍼져 병에 걸리는 사람이 많아지며 전쟁이 일어나고 천재지변 등 재앙이 일어나는 것을 겁탁이라 하였다. 이렇게 사람이 사는 데 불우한 환경이 조성되어 이로써 고통을 당하니 이것을 고고(苦苦)라고도 설명한다.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주위환경으로부터 오는 고통을 말한다.

현대사회의 속성이 오탁에 매몰되어 있다. 번뇌탁(煩惱濁)은 보고 듣는 시청각의 경계가 많아서 그런지 인간의 두뇌에 점점 번뇌의 양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견탁(見濁)은 정견(正見)이 아닌 사견(邪見)이 난무하는 것을 말한다. 시대 따라 곳에 따라 새로운 사상이 등장하고 어지러운 견해들이 서로 충돌을 한다. 때로는 문명과 문화까지도 서로 충돌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이념적 성향으로 끌고 가려한다. 중생탁(衆生濁)은 인간의 지능이 발달함에 따라 몸으로 입으로 생각으로 하는 행위가 거칠어지고 탁해지는 것이다. 명탁(命濁)은 사고를 당하던지 범죄에 희생이 되어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오탁이 모두 중생의 나쁜 업에서 야기된다고 경전은 설명한다. 그래서 불교는 이 세상을 괴로운 세상으로 보라고 가르치기도 한다. 고해(苦海)라는 말을 자주 쓴다. 모든 중생이 괴로움의 바다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불교의 기본 수행관은 인간이 겪게 되는 괴로움을 직시하는 데서 세워진다. 불교에 있어서 괴로움의 문제를 도외시하는 수행은 없다. 개인의 괴로움뿐만 아니라 남의 괴로움도 직시해야 한다. 나아가 사회, 국가, 세계가 가지고 있는 고통의 문제도 직시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고통을 야기하는 문제들이 너무나 많다. 그 원인을 찾아내어 없애가야 한다.

부처님은 사성제(四聖諦) 법문에서 인간 세상을 원인과 결과로써 분석하여 괴로움의 해결법을 제시하였다. 왜 괴로운가? 그 원이 무엇인가? 원인을 제거하면 결과는 없는 것. 그렇게 되려면 인생의 바른길을 가야 한다고 하였다. 올바른 생각으로 세상을 바로 보아 남에게 괴로움의 원인을 제공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잘사는 길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인간으로서 인간다운 인간애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작금의 코로나19 확산 사태에서 경종을 울리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잘못되거나 한 집단이 잘못되면 그 여파가 엄청나게 커져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절감케 하는 점이다. 우리 사회는 나쁜 병균이 전염되지 않아야 하듯이 나쁜 생각이나 그릇된 습관 따위도 전염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개인의 이기주의만 나쁜 것이 아니라 자칫 집단적 이기주의가 사회에 엄청난 나쁜 영향을 준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종교계 쪽에서 한 번 반성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종교가 인간성의 향상을 위한 수양이나 수행을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지 어리석은 미혹을 조장하여 인간성을 유린 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자칫 군중을 모아 피플파워(people power)를 과시하는 이상한 집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겸손하게 처신하면서 인간애를 나누며 사람이 서로 도와가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비(悲)의 윤리가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청되는 시대다.

연일 좋지 않는 소식을 접하고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어 부처님의 동체대비(同體大悲)를 그리워하며, 비야리 성문 앞에서 축원의 송을 읊던 부처님의 가피가 내려 이 난국이 해소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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