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오신 부처님] <44> 금성에 봄이 오니 꽃이 만개하네-소지 마립간②
[사랑으로 오신 부처님] <44> 금성에 봄이 오니 꽃이 만개하네-소지 마립간②
  • 조민기
  • 승인 2020.02.29 16: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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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의 모례가 마립간을 뵙습니다”
삽화=견동한
삽화=견동한

날이군에서 만난 소녀 

일선군으로 곡식을 담은 수레들을 가지고 가던 비처는 소리 없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마립간에 오른 후 비처는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했다. 말갈의 공격은 금관과 백제의 도움으로 간신히 막아냈으나 왜군이 민가를 노략질하는 것은 막지 못했다. 수시로 국고를 열어 백성들을 위로했으나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연이은 가뭄과 홍수로 흉년이 거듭되자 백성들은 먹고 살길을 찾아 고향을 버리고 떠돌았다.

“하아, 일선의 백성들을 보기가 두렵구나.”

마음이 무거울수록 비처는 허리와 어깨를 곧게 세웠다. 힘에 부칠 때마다 마립간의 위엄을 굳게 세워야 신국의 백성들이 당당해진다던 아버지의 말을 되새겼다. 박씨와 석씨 일족을 비롯해 서라벌의 귀족들은 비처가 그들의 도움을 청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 비처가 도와 달라 손을 내밀면 그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립간의 권위를 빼앗아 갈 것이 분명했다. 언젠가 신국도 고구려처럼 강성한 나라가 되려면 아무리 버거워도 귀족들을 다스려야 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하던 그때, 저 멀리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아, 섬신이 오는구나. 금관에서 곧장 오는 모양이로군.”

말과 한 몸이 된 것처럼 전력으로 질주하던 섬신은 눈 깜짝할 사이에 비처 앞에 도착했다. 말에서 내린 섬신이 예를 올렸다.

“마립간을 뵙습니다.”

“일어나게. 금관에서 오는 길인가?”

“그렇습니다. 마립간께 좋은 소식을 알려드리고자 쉬지 않고 말을 타고 달렸습니다.”

“좋은 소식이라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구나. 어서 말하라.”

“통리왕후께서 아들을 낳으셨습니다.”

비처는 눈을 크게 뜨고 섬신을 바라보다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통리가? 오호, 금관과 신국의 복이로구나. 하하하”

금관의 질지왕과 혼인한 통리는 비처의 사촌 여동생이기도 했다. 신국의 혈통이 금관의 왕위를 잇게 되었으니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참을 웃던 비처가 문득 섬신을 보며 말했다. 

“그대의 여동생 하희가 먼저 아들을 낳을 줄 알았건만…” 

통리는 혼인하고 수년이 지나도 자식이 없자 조카 하희를 질지의 후궁으로 삼았다. 금관의 왕위를 반드시 신국의 혈통으로 잇게 하기 위해서였다. 남편을 다른 여인과 나누는 아픔을 기꺼이 감당하며 금관에 신국의 혈통이 뿌리를 내리게 하려던 간절한 마음을 하늘이 아셨는지, 하희가 후궁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통리가 마침내 회임을 하더니 아들을 낳은 것이었다.

“하희는 고모님의 배려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섬신이 사심 없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비처는 자신의 곁에 섬신과 통리 같은 친족이 있다는 것에 갑자기 가슴이 뭉클했다. 통리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쉴 새 없이 말을 달려온 섬신의 이마에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잔뜩 붙어있었다. 비처는 짐짓 좌우를 둘러보며 말했다. 

“험한 길을 오느라 모두 힘들었을 텐데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도록 하자.”

비처의 말에 수레를 끌던 군사들이 일제히 허리를 폈다. 행렬이 쉬어간다는 소식에 날이군의 지주들은 서둘러 음식과 술을 내왔다. 

“거친 음식이지만 받아주시옵소서.”

촌로의 옆에 있던 소녀가 붉은빛이 도는 잘 익은 사과를 비처에게 올렸다. 향긋한 사과를 받은 비처가 소녀를 바라보았다. 수줍은 듯 발그레한 볼과 가늘고 긴 눈매, 하얀 얼굴과 붉은 입술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너의 어미와 아비도 이곳에 있느냐?”

비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소녀는 어쩔 줄 몰랐다. 소녀가 대답이 없자 촌로가 나섰다.

“저 아이의 이름은 벽아라고 하옵니다. 몇 년 전 어미와 함께 이곳에 왔는데 아비는 오래전 죽었다더군요. 아이의 어머 역시 지난봄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제가 데리고 있게 되었습니다.”

비처는 안타까운 눈으로 천애 고아가 된 벽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볼수록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비처와 같은 마음인지 섬신의 시선도 소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서불한이 생각나는구나. 아, 그러고 보니 구천과도 많이 닮았구나.”

비처의 입에서 ‘구천’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섬신과 소녀는 깜짝 놀랐다. 구천은 미해와 청아의 아들이었으나 혼인도 하기 전, 세상을 떠났다. 그러고 보니 청아의 모습도 닮은 것 같았다. 그때 소녀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소녀의 아비가 바로 구천이옵니다. 아버지께서 어릴 적 몰래 궁을 나와 소녀의 어미를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벽아의 말에 비처와 섬신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소녀의 말이 맞다면 벽아는 구천 숙부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일선군의 모례장자

비처는 섬신을 날이군에 남겨두고 일선군으로 향했다. 섬신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벽아를 잘 돌보아주라고 당부했다. 존재도 몰랐던 사촌 여동생을 날이군에서 만나다니, 묘한 인연이었다. 어쩌면 일선군으로 곡식을 베풀러 가게 된 것은 벽아의 존재를 그에게 알려주기 위한 구천 숙부의 뜻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처의 기억 속에 있는 구천은 여인처럼 가느다란 허리를 지닌 미남자였다. 구천이 한 번 웃으면 월성에 봄이 온 것 같았다. 궁녀들은 구천의 고운 얼굴을 닮고 싶어 하얀 분을 바르고 입술을 붉게 물들였으나 구천이 나타나면 모두 빛을 잃었다. 하지만 구천은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고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서 겨울이면 궁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았다. 어머니 파호부인은 큰 오라버니는 햇빛을 너무 안 봐서 피부가 그렇게 하얀 것 같다고 말하곤 했다. 

구천은 스무 살이 채 되기도 전, 그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인 늦봄에 눈을 감았다. 숨이 빠져나간 구천의 몸은 나비처럼 가벼워 보였다. 구천은 그의 바람처럼 생전에 손수 가꾸던 꽃밭에 묻혔다. 벽아의 어머니는 아마도 구천이 가꾸던 꽃밭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백성의 딸이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벽아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다시 떠올리는 동안, 비처의 행렬이 일선군에 도착했다. 

“마립간께서 일선군에 오신 것을 알고 지주와 촌로들이 인사를 나온 모양입니다.”

신하의 목소리를 들은 비처는 그때야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맨 앞에서 지팡이를 짚고 서 있던 머리카락과 수염이 하얀 촌로가 허리를 굽히며 자신을 소개했다. 

“일선의 모례가 마립간을 뵙습니다.”

비처는 ‘모례’라는 이름에 귀가 번쩍했다. 아버지 자비 마립간으로부터 모례장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파호부인을 치료했던 아도스님을 만나고 싶거든 일선군의 모례장자를 찾아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비처의 시선을 느꼈는지 모례장자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불교신문3560호/2020년2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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