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왕생 인연 강조하여 정토사상 꽃피우다

석가여래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불과 아미타불 함께 그려
화면 하단에 창건설화 눈길

사적과 ‘안락국태자경’ 융합
광유성인이 와서 임정사 창건
기림사의 인연 서사적 구성

18세기 중창불사 이뤄지면서
사찰 정통성과 위상 높이고
정토사상 효과적 설파 목적

기림사 삼불회도와 창건설화도. 1788년. 삼세 부처님과 기림사 창건 연기를 한 화면에 구성한 유례없는 불화이다.
기림사 삼불회도와 창건설화도. 1788년. 삼세 부처님과 기림사 창건 연기를 한 화면에 구성한 유례없는 불화이다.

신라의 고도 경주에는 오악(五岳) 중 남악(南岳)에 해당하는 함월산(含月山)이 있다. 그곳에는 기타림(祈陀林) 숲속의 절, 즉 ‘기원정사’라는 의미의 기림사(祇林寺)가 자리한다. 기림사는 신라 때 창건된 명찰이다. 대적광전, 약사전, 관음전, 응진전 등 많은 법당과 그 장엄이 고색창연하다. 이곳에는 현재까지도 많은 유물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중에 흥미로운 불화가 한 폭 포함되어 있다. 

이 불화는 조선 1788년에 제작된 것으로, 화면의 크기가 세로 225.5cm, 가로 335.5cm에 이르는 비교적 큰 그림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한 폭에 두 가지 주제가 함께 구성되어 있다. 우선 전체의 4분의3 정도를 차지하는 화면에는 세 분의 부처님이 자리하고 있다.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그 좌·우측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가 그려져 있는 삼불회도(三佛會圖)이다. 사바세계의 주불인 석가모니, 동방 만월세계를 주관하는 약사유리광여래, 서방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이 함께 나투신 모습을 그렸다고 하여 일명 ‘삼세불화(三世佛畵)’라고도 불린다.

이 그림은 부처와 협시보살, 그리고 불제자 및 사천왕이 당당하면서도 위엄 있는 자세로 안정감 있게 배치되어 있다. 또한 채색은 붉은색, 녹청색, 군청색 등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필선과 문양은 섬세하면서도 단정하다. 불전 내 예배용 불화로서 격조가 충분히 갖춰진 조선 후기 불화 명작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창건설화도 부분. 사라수왕과 원앙부인이 임정사로 떠나는 장면
1. 창건설화도 부분. 사라수왕과 원앙부인이 임정사로 떠나는 장면

화면의 아래쪽에는 전혀 다른 방식의 그림이 한 점 있다. 언뜻 보기에는 산수화처럼 보일 정도로 산과 구름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조금만 더 자세히 보면 전각과 인물들도 눈에 들어온다. 이 그림은 기림사의 ‘창건설화도’이다. 그림을 둘러보기에 앞서 기림사에 전승되어 오고 있는 창건 연기를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기림사의 창건과 그 인연 설화는 사중에 전하는 각종 기록에서 확인된다. 우선 1705년에 혜총스님이 쓴 <기림사중창기>에 비교적 상세히 전한다. 이 기록을 보면, “범마라국(梵摩羅國)의 광유성인(光有聖人)이 서역에서 이 산으로 와 ‘임정사(林井寺)’라는 절을 세우니, ‘임정(林井)’이라는 말은 ‘대범가(大梵家)’라는 뜻이다.

절에 우담화를 심고, 또한 다섯 종류의 물이 흐르며, 꽃과 대나무가 서로 밝게 빛나니 안락계(安樂界)가 바로 이곳이다. 서천축국(西天竺國)의 사라대왕(紗羅大王)도 왕위를 버리고, 가족과 함께 이곳으로 왔다”고 언급되어 있다. 기림사를 일명 ‘임정성지’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에 기인한 것이다. 

1718년에는 불혜스님이 <신라함월산기림사사적>을 찬술하고 1740년에 목판본으로까지 간행했다. 불혜스님은 혜총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중창기의 내용을 보완하면서 광유성인과 관련된 설화를 <월인석보>의 ‘안락국태자경’에서 인용해 상세히 수록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창건설화도 부분. 사라수왕과 태자 안락국의 상봉 장면
2. 창건설화도 부분. 사라수왕과 태자 안락국의 상봉 장면

“범마라국(梵摩羅國)에 임정사(林淨寺)가 있다. 절에는 우담화가 있고 다섯 종류의 물이 흐르며 꽃과 대나무가 서로 밝게 빛나니 안락계(安樂界)가 바로 이곳이다. 이곳에서 광유성인은 오백제자를 이끌고 설법하며 무량한 중생들을 제도하고 있었다.

당시 서천축국(西天竺國)에는 사라수왕(紗羅樹王)이 정법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광유성인이 제자인 승열비구를 왕에게 보내 찻물 기를 채녀(采女)를 구해 오게 하니 왕이 여덟 명의 여인을 보냈다. 광유성인은 채녀들에게 전단정 우물의 물을 길어오게 했는데 이는 무상의 도리를 수행함과 같은 것이었다. 

이후 광유성인은 승열비구를 다시 왕에게 보냈다. 왕을 ‘급수(汲水) 유나(維那)’로 삼고자 함이었는데, 이를 전해들은 사라수왕은 기뻐하며 왕위를 버리고 임정사로 향했다. 왕비 원앙부인도 함께 길을 나섰으나 다리가 아파서 장자에게 남게 되고 왕과 헤어지며 왕생게(往生偈)를 들려주고 항상 외울 것을 당부했다. 왕은 임정사에 도착해 찻물 길어오는 일의 책임을 맡아 수행 정진했다. 그 사이 원앙부인은 태중의 아이를 출산했고 왕과 헤어지기 전에 지어놓은 대로 이름을 안락국(安樂國)이라 지었다.

안락국은 일곱 살이 되어 부친에 대해 알게 되었고 고난 끝에 임정사 인근에 이르러 부자 상봉하게 된다. 안락국은 부왕의 가르침에 따라 다시 모친에게로 돌아오나 그사이 장자가 모친을 죽인 것을 알게 된다. 안락국은 모친의 시신 앞에 울며 미타 왕생게를 외워 바친다. 그러자 극락에서 용선(龍船)을 타고 보살들이 내려와 왕비의 극락 정각을 알려주었고 이후 안락국도 용선을 타고 극락에 올라 왕생하였다. 

광유성인은 바로 석가모니이시며 사라수왕은 아미타불이시고 원앙부인은 관음보살, 안락국은 대세지보살, 승열비구는 문수보살, 오백제자는 오백아라한이었다 한다.”

그림으로 돌아와 내용과 표현을 자세히 살펴보면, 안료의 박락 등 손상이 좀 있긴 하지만, 방제와 더불어 대략 11장면이 확인된다. 방제 중에는 ‘婆羅門乞人彩女而相別大王’, ‘竹林村自賢…’, ‘大王與夫人仰○○夜相別悲泣’, ‘安樂國初逢父王’, ‘安樂國痛哭母花’, ‘極樂往生西方淨土’ 등의 문구가 포함되어 있다. 문구만으로도 이 그림이 기림사 창건설화와 연관이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그림도 사적의 내용, 특히 <신라함월산기림사사적>(1740)과 잘 부합한다. 

제일 먼저 보이는 장면은 승열바라문이 대왕께 석가세존을 위해 꽃밭수레를 청하니 대왕이 문무백관과 상의하여 팔채녀를 보내기로 결정하는 장면과 팔채녀가 이별을 하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그 옆에는 팔채녀가 전단의 우물물을 길어 오색연화의 꽃이 더욱 씩씩하고 황홀하게 되니, 그 공으로 성도하게 되는 장면, 승열비구를 따라 왕과 왕비가 임정사로 떠나는 장면, 부인이 발병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 왕생게를 염송한 후 이별하게 되는 장면이 있다. 또 안락국이 부왕과 상봉하게 되는 장면, 안락국이 떠난 후 자현장자에게 무참히 살해된 어머니의 주검 앞에서 안락국이 슬피 울며 꽃을 바치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극락에서 용선이 내려오는 장면이 순차적으로 그려져 있다.
 

창건설화도 부분. 극락세계 반야용선의 하강 장면
3. 창건설화도 부분. 극락세계 반야용선의 하강 장면

그렇다면 기림사에서는 왜 18세기 후반에 ‘삼불회도’와 ‘창건설화도’를 한 폭에 제작, 봉안한 것일까. 기림사는 임란 후 불사를 매우 활발히 진행했다. 특히 18세기에는 창건 연기까지 수록한 각종 사적을 간행한 것은 물론 대적광전, 오백나한전, 진남루 등의 중수를 진행했으며 각종 불화를 제작, 봉안했다.

그 과정에서 그림을 통해 창건설화까지 시각화함으로써 사찰의 정통성과 위상을 공고히 하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창건설화도를 통해 극락왕생과 그 인연을 좀 더 강조함으로써 대중들에게 정토사상을 좀 더 효과적으로 설파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불회도와 창건설화도를 한 폭에 함께 구성한 의도 역시 기림사사적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그 말미에는 창건 연기를 이끌어 온 인물들을 열거하며, 광유성인은 석가모니불이고, 사라수대왕은 아미타불이며, 원앙부인은 관음보살, 안락국은 대세지보살이라 언급했다. 이러한 인식을 그림에도 반영해 상부의 석가·약사·아미타의 도상인 삼불회도와 하부의 창건설화도를 유기적으로 융합시켰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사찰이 고유의 창건설화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기림사의 경우처럼 그림으로 그려 불전에 봉안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이러한 점에서 기림사 창건설화도는 의미가 있다. 또한 삼세 부처님과 기림사 창건 연기를 한 화폭에 유기적으로 구성한 유례없는 불화라는 점도 가치가 크다.

이 그림은 1980년대까지는 기림사 대적광전 내에 있었으나 이후 보전과 안전한 관리를 위해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박물관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원 봉안처인 기림사 대적광전에는 현재 원본을 충실하게 잘 모사해 그린 불화가 서벽에 모셔져 있다.

[불교신문3560호/2020년2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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