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내린 눈들이 봄 햇살에
제 존재쯤은 녹아 사라져도 두렵지 않다는 듯

냉정하고도 묵묵한 표정으로 밭고랑을 기어서 건너고 있다 양달의
할머니 무덤가 진달래 뿌릴 붉게 적셔주려고

- 이봉환 시 ‘3월의 눈’에서
 



밤새 눈이 쌓였고, 아침에는 봄의 햇살이 따사로워 적설(積雪)이 조금씩 녹고 있다. 눈은 녹아서 땅 아래로 내려가 뿌리들을 적신다. 어젯밤 내린 눈은 할머니의 무덤가 진달래 뿌리를 적신다. 봄이 오면 진달래 붉게 피어나라고 뿌리를 살포시 적신다. 적설과 무덤가 진달래 뿌리와의 상호 작용과 이타적 관계를 보는 시선이 정답고 포근하다.

이봉환 시인은 시 ‘말의 저편’에서 “전화해서 엄마가 첫마디로 ‘밥 묵었니야?’ 하시는 건// 보고 싶다는 뜻이다”라고 썼는데, 무뚝뚝하게 들리는 겉말을 깊은 속뜻에 연결시켜 짐작하고 또 넓게 이해하는 것도 아름다운 마음의 호응일 것이다. 

한 두 차례 추위가 더 있겠지만 이제 봄이 멀지 않다.

[불교신문3559호/2020년2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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