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의 미래도 저 달처럼 밝을 것이다”

479년 정월, 명활산성

정월을 맞은 자비는 태자 비처와 함께 명활산성으로 가서 군사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렸다. 질서정연하게 열을 맞춰 선 병사들의 얼굴은 늠름했고 갑옷을 입은 장군 덕지의 어깨는 넓고 다부졌다. 수차례 왜군의 침입을 막아내는 동안 군사들의 전투력은 점점 향상되었다. 병사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무기를 들었고, 왜군의 전략에 익숙해진 덕지 장군은 철저히 대비했고 역공으로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서라벌을 마치 자신들의 식량창고처럼 여겨온 왜군들은 지난 몇 년 동안 아무 소득도 얻지 못했다. 지난 초여름, 왜군은 작정한 듯 군대를 다섯으로 나눠 서라벌을 공략했으나 군사들은 침착하게 공격을 막아냈다. 명활산성 위로 환하게 빛나는 보름달을 바라보던 자비는 아버지 눌지가 고구려군의 용맹한 전투력을 부러워했던 것이 떠올라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달이 참 밝구나. 태자가 있으니 서라벌의 미래도 저 달처럼 밝을 것이다.” 

자비의 말에 비처는 쑥스러운 듯 수려한 눈썹을 만지작거리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파호부인을 닮은 비처의 눈이 반달처럼 접혔다. 어여쁜 아내를 생각하자 문득 가슴이 따뜻해졌다. 

“네 어머니가 어렸을 때, 큰 병을 앓은 적이 있었다. 의원들도 손 쓸 방법이 없다고 했지. 끝내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맨 지 며칠이 지났을 때, 갈문왕께서 한 아도화상이라는 스님을 궁으로 모셔왔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비처는 아버지를 보며 귀를 기울였다.

“눌지 마립간께서는 아도화상을 뵙자마자 파호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하셨지. 그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구나. 스님께서는 방문을 모두 열어 탁한 공기를 내보낸 후 청동 그릇에 향을 넣더니 불을 붙였다. 그릇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고 그윽한 향기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그저 향을 피웠을 뿐인데 귀신이 농간을 부린 것처럼 방안은 다른 공간이 된 것 같았다. 스님은 나무로 만든 물건을 꺼내 두드리며 노래도 아니고 기도도 아닌 이상한 주문 같은 소리를 외우고 또 외웠다. 무슨 말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듣고 있으니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져서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조차 맑게 들렸다. 나중에 여쭤보니 부처님이라는 분께서 남기신 좋은 가르침을 외운 것이라고 알려주셨지.”

“부처님이라면 고구려 군사들을 얌전하게 만든다는 그 조각상 말입니까?”

비처의 물음에 자비는 빙그레 웃으며 이야기를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 조각상을 부처님이라고 부르지. 그분은 오래전 천축국에서 태어난 왕자인데, 깨달음을 얻기 위해 왕위를 버리고 저자를 떠돌았다고 하는구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비처를 보며 자비는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도 네 어머니의 병이 나은 것은 부처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의원도 손을 쓸 수 없다고 했는데 스님께서 꼬박 하루 반나절 염불을 하신 후에 정신을 차리더니 천천히 눈을 떴단다. 나중에 네 어머니를 부인으로 맞아 태자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생각해보니 부처님 덕분이로구나.” 

자비는 비처의 손을 잡고 천천히 언덕을 내려오며 말했다.

“나는 그때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는 모르지만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중에 아들을 낳으면 ‘부처’라는 이름을 지어주겠다고 다짐했지. 그런데 막상 네가 태어나자 망설여지더구나. 그 이름을 갖게 되면 혹시라도 왕위를 버리고 저자를 떠돌겠다고 할까 봐 걱정이 된 거지. 그래서 부처님처럼 되지는 말고, 부처님 비슷한 그런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비처’라는 아명을 지어주었단다.”

태자 비처는 자신의 이름에 이렇게 긴 사연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비처의 의미를 알고 나자 부처님이란 분이 더 궁금해졌다. 
 

삽화=견동한
삽화=견동한

부처님 곁으로 

명활산성에서 돌아온 후 자비는 열이 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벼운 고뿔이라고 생각했으나 며칠이 지나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만큼 나빠졌고,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다. 의원은 무거운 표정으로 파호와 비처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예상은 했으나 막상 의원의 입에서 그 말을 듣자 파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부인이 고생이 많소. 난 괜찮으니 가서 좀 눈이라도 붙이시오.”

파호는 아픈 와중에도 자신을 걱정하는 자비의 손을 꼭 잡으며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금관으로 간 통리는 어찌 지내고 있는지 소식이 있소?”

“질지왕이 통리를 많이 아껴준다고 들었습니다. 다만…”

“다만?”

“혼인한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자식이 없어 백흔의 딸을 후궁으로 들였다 합니다.”

“백흔의 딸을? 조카를 질지의 첩실로 삼았단 말이오? 하하하”

자비는 굳었던 얼굴을 펴고 가슴이 들썩거리도록 웃었다. 예쁘고 어린 친정 조카를 남편에게 첩으로 주었으니 질지가 어떻게 통리를 아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과연 통리는 영특했다. 질지가 살아있는 금관의 왕비 자리는 통리의 것이었다. 게다가 통리와 조카, 둘 중 누가 아들을 낳더라도 결국은 신국의 혈통이 금관의 왕위에 오를 것이다. 

“신국과 금관은 한 가족이 될 날이 머지않은 것 같소. 통리가 참으로 큰일을 하고 있구려.” 

웃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던 자비가 갑자기 기침하기 시작했다. 비처는 재빨리 한 손으로 아버지의 등을 쓸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입가를 닦아주었다. 

“기억나시오? 부인께서 어려서 병이 났을 때 갈문왕께서 아도화상을 모셔왔던 것 말이오.”

기침이 잠잠해지자 자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아도화상께서는 천경림에 부처님을 모실 절을 세워 신국을 위해 복을 빌고 싶다고 하셨는데 아버님도, 나도 소원을 들어드리지 못하고 떠나게 되었구려.”

파호가 붉어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비는 비처를 향해 말했다.

“태자는 잘 기억하거라. 천경림은 부처님께 드리기로 약속된 곳이다. 비록 절을 세우는 일이 늦어지더라도 그곳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면 안 된다. 이는 부처님과의 약속이다.” 

“알겠사옵니다.”

비처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자 자비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백제는 한동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웅진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시간이 걸릴 테지. 통리가 잘 해주고 있으니 금관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비처를 바라보던 자비의 눈꺼풀이 점점 무겁게 내려오자 파호는 자비를 침상에 눕혔다. 익숙한 손길을 느낀 자비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파호를 보며 말했다.

“부인, 아도화상께서 부인을 위해 해주신 염불이 듣고 싶은데, 들을 수 없겠지. 이제 곧 부처님 곁에 가면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려.”

자비의 목소리가 작아지면서 느려지더니 천천히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479년 2월, 자비는 마치 단잠에 빠진 것 같이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닷새 후, 비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마립간에 올랐다. 

[불교신문3558호/2020년2월19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