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伽藍과 뫼] ⑥ 모악산 금산사와 암자
[伽藍과 뫼] ⑥ 모악산 금산사와 암자
  • 박부영 주필
  • 승인 2020.02.19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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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창간 60주년 특별기획’
차별 없이 따뜻하게 품어주는 어머니산, 넉넉한 가람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으며, 가장 넓은 평야를 지닌, 하늘과 땅이 맞닿은 김제에서 홀로 우뚝 솟은 모악산(母岳山)은 미륵성지다. 교구본사 금산사를 중심으로 모악산에는 한 때 50여개의 암자가 있었다. 지금도 그 흔적이 산 곳곳에 남아있다. 수많은 전쟁을 거치며 암자와 사찰이 불타 폐허가 되고, 혹은 전통종교의 성지가 되었다. 모악산 서쪽 금산사에는 현재 심원암 청룡사 청련암 등 부속 암자가 있고 동쪽 전주 쪽 산에는 대원사와 금선암이 있다. 그리고 금산사 뒤 모악산 자락에 귀신사가 있다. 

모악산에서 김제평야를 내려다본 모습. 왼쪽 계곡이 금산사다.
모악산에서 김제평야를 내려다본 모습. 왼쪽 계곡이 금산사다.

 

모악산은 큰 산을 뜻하는 고어 엄뫼, 큼뫼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한자로 표기하다 보니 엄뫼가 어머니를 뜻하는 모악(母岳)이 되었다. 큼은 발음이 비슷한 금(金)으로, 뫼는 산(山)으로 적었다. 그래서 모악산 금산사다. 큰 산이라는 이름을 지닌 금산사에서 유래해 금산이었다는 설도 있다.

지평선이 보이는 평야에서 높이 795.2m의 산은 태산처럼 크고 웅장하다. 넓게 뚫린 평야는 평화로울 때는 장점이지만 위기 시에는 치명적 약점이 된다. 반대로 높은 산은 평시에는 땔감과 휴식을 제공하고 위기 때는 피난처 역할을 한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내주고 보듬는 어머니와 같으니 모악산이라는 이름에 걸맞다. 

눈을 들어 정상을 보는데 탑이 가린다. 흉물스럽다. 좁은 정상 보다 그 아래 세워도 사방이 트여서 전파 송신에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 같은데 굳이 정상을 차지한 심사를 모르겠다. 중계탑과 군부대가 보안시설이라는 이유로 정상 출입을 막았었다. 김제 전주 어디서나 산보다 중계탑이 먼저 보이니 가장 피해를 입은 것은 지역민들이다. 가까이 다가서자 기계음이 시끄럽게 울린다. 전선이 어지럽게 사방으로 뻗어가니 모악산이 몸살을 앓을 만하다. 

대원사로 내려섰다. 금산사를 가려면 다시 정상으로 올라와야하지만 어쩔 수 없다. 서로 반대 방향에 놓여 있어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야한다.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계단이 끝없이 놓여 있었다. 이 곳 역시 간밤에 내린 눈이 얼어 길이 몹시 미끄러웠다. 금선사 계곡과 달리 등산객들이 제법 많았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산을 즐기려는 전주시민들이다.
 

모악산 정상.
모악산 정상.

◇ 보덕화상 진묵대사 발자취 서려 

내려가는 길에 수왕사(水王寺)를 만났다. 원래 이름은 ‘무량(無量)이 절’이다. 한자로 이름을 표기하면서 수왕사가 되었다. 무량수(無量壽), 즉 아미타불을 모신 절이 엉뚱하게 물(水)로 바뀌어 결국 수왕사가 된 것이다. 680년(신라문무왕 20년) 보덕화상이 창건했다. 고려 때 원명국사가 중창하고 정유재란 때 소실 된 것을 1604년(선조 37) 진묵대사가 중건했다. 다시 6·25 당시 공비 토벌작전으로 소실 된 것을 천석진(千錫振)스님이 다시 지었다. 

보덕화상은 우리나라 열반종 시조이며 고구려가 도교를 숭상하자 이를 비판하고 제자들과 백제로 망명해 모악산을 중심으로 수도하며 열반종을 열었다. 임진왜란 당시 수행으로 도탄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고 여러 이적을 보여 지금도 이 지역민들의 절대적 추앙을 받고, 부처님의 화신으로 불리는 진묵대사 역시 모악산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모악산에서 두 고승의 자취가 많이 서린 곳이 대원사다. 대원사(大院寺)는 행정구역이 완주군 구이면이다. 공원 입구에서 멀지 않아 전주시민들이 즐겨 찾는다. 삼국통일 직전 660년(백제 의자왕 20)에 대원(大原)·일승(一乘)·심정(心正) 등 보덕화상 제자들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스승으로부터 열반종 교리를 익힌 뒤 스승이 계시는 이곳에 절을 창건했다. 당시 절 이름은 대원사(大原寺)였다. <삼국유사> ‘보장봉로 보덕이암(寶欌奉老 普德移唵)’조에 나오는 내용이다.

고려시대인 1130년(인종 8)에 원명국사(圓明國師) 징엄(澄儼, 1090~1141)스님이 대대적으로 중창하고 공민왕 23년에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이 중창했다.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진묵스님이 대규모 중창했다. 열반종 보덕화상에 이어 징엄화상 그리고 진묵대사 이렇게 3번에 걸쳐 대원사는 변화를 거듭한 것이다. 조선시대 말에는 증산교(甑山敎)를 개창한 강일순(姜一淳, 1871~1909)이 이곳에 머무르며 도를 깨우쳤다고 한다. 
 

대원사 전경.
대원사 전경.
대원사 화전 축제에서 어린이들이 그린 그림.
대원사 화전 축제에서 어린이들이 그린 그림.

◇ 전주시민들 문화 가람 대원사

근대에 들어서도 수차례 중창이 이루어졌다가 전쟁으로 인해 불탔던 것을 현대에 다시 세웠다. 오늘날은 전주시민의 문화 가람으로 명성을 떨친다. 해마다 봄에는 진달래를 이용한 화전축제가 유명하다. 축제일에는 서화전을 여는데 전주와 그 인근 어린이들이 대거 참여해 재주를 뽐내고 봄을 즐긴다. 대웅전·명부전·산신각 등 조선후기 건축물이 남아있어 옛 정취가 물씬 난다. 대웅전 뒤로 돌아가니 고려시대 5층 석탑이 뽐낸다. 

어느새 해가 넘어간다. 정상에 올랐던 사람들은 서둘러 내려가는데 올라오는 사람은 더 이상 없다. 서둘러 다시 정상으로 향했다. 미끄러운 길을 내려오는 것 보다 훨씬 수월했다. 다시 정상에 서니 이제 해가 산 아래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내려가는 길에 심원암을 들리려 했는데 옆 길로 잘못 들었다. 그러는 바람에 계곡으로 내려섰다. 잔설이 남은 계곡은 얼어 붙었다. 모악산은 곳곳에 물이 흘러 넘친다. 그 물이 사방으로 흘러 넓은 평야를 적신다. 우리나라 최초의 관개시설 벽골제의 물도 모악산이 원천이다.

서쪽으로 흐르는 물은 금산사 방면 계곡을 지나 금평 저수지를 이루고 김제 만경평야를 적신다, 서쪽으로 대원사계곡을 지나 구이저수지, 남으로 안덕저수지, 북으로도 흐르니 모두 모악산에서 발원했다. 물은 곧 생명이니 생명을 잉태하고 기르는 어머니의 산이다. 
 

심원암 탑.
심원암 탑.

◇ 호남유일 수도 도량 심원암

금산사 부도전을 지나자 어둠에 잠겼다. 하루 종일 모악산을 누비고 다닌 지친 몸은 금산사 템플스테이관의 아늑하고 따뜻한 방에서 금방 풀렸다. 다음날 금산사를 다시 만났다. 처영기념관에는 태공월주스님의 지구촌 자비행을 담은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부도전을 거쳐 심원암(深源庵)을 찾았다. 금산사에서 2km 가량 북쪽에 자리한 심원암은 신라 36대 혜공왕 당시 진표율사가 금산사를 중건하면서 선객들 수도 도량으로 건립했다. 많은 선객들이 도를 이룬 호남 유일의 선도량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금산사를 복원할 때 수문선사가 복원했으며, 철종 원년 1847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 보물 제29호인 북강 삼층석탑이 있다. 이 탑을 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조선조 때에는 서민들과 사대부집 부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요사채를 건립했는데 그 터가 남아있다. 

모악산 중턱에 자리한 탑에서 바라보니 금산사 바로 위다. 심원암을 처음 이곳에 세운 연유를 알 수 있었다. 다시 금산사로 내려가 부도전에서 모악산으로 2km 가량 가면 청룡사가 나온다. 가파른 길이 꼬불꼬불하게 놓인 끝에 성벽처럼 높고 큰 벽이 우뚝 서 있다. 계곡을 막아서 넓은 공간을 조성하고 그 위에 절을 만들었다.

원래는 작은 암자였지만 현 주지 월정스님이 반세기에 걸쳐 조금씩 흙을 다지고 건물을 세워 지금의 가람을 일궜다. 금산사에서 만난 한 스님은 “불사를 하려면 청룡사를 가보면 된다”고 말했다. 월정스님의 불사가 최고라는 찬사다. 목조 건물이 한치 틈도 없이 꼼꼼하면서 반듯하게 서있다. 절 위에 서니 금산사가 한 눈에 들어온다.

혜덕 왕사가 금산사를 크게 중창할 때 모악산 내에 세운 40여 암자 중 하나였다. 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임씨대법화 보살이 1956년 토굴을 만들어 용천대라 불렀다. 1963년 월정스님이 토굴과 요사채를 건립하여 용천암으로 개명하고 계속해서 진입로를 내고 관음전을 복원하였으며 1983년 청룡사로 개명하고 선방 요사채를 지었다. 전통사찰 제103호이며,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보물 1883호다.
 

청룡사 모습.
청룡사 모습.
청련암 샘물, 절대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청련암 샘물. 절대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 임씨대법화 보살 이야기 전하는 청룡사 청련암

청룡사에서 다시 금산사로 갔다가 템플스테이관을 지나 모악산 방향으로 2km 가량 올라가면 청련암이 나온다. 주변 산이 여러 겹으로 겹친 것이 연꽃과 닮았다 하여 청련암이다. 이곳 역시 작은 암자였던 것을 최근 극락전 삼성각을 짓고 탑을 세워 어엿한 암자가 됐다. 

청룡사와 청련암은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무대는 제주도다. 제주 4,3 항쟁은 제주도를 초토화 시키고 사람들을 지옥으로 내몰았다.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충격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 때 한 보살이 오랜 수행을 통해 종교 지도자로 세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도인으로 추앙을 받았던 보살은 전쟁이 끝난 뒤 십승지(十勝地)를 찾아 육지로 향했다. 제주에서 작은 나룻배를 타고 도착한 뒤 청련암으로 갔다. 청룡사와 청련암에서 토굴을 짓고 수행한 대법화 보살이 그 주인공이다.

20대의 월주스님은 금산사를 정화하고 진표율사의 미륵십선(十善)을 실천하는 정법(正法)도량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본 절은 대처승들이 차지하고 모악산은 미륵을 표방하며 혹세무민하는 사교(邪敎)가 넘쳤다. 청련암의 대법화 보살은 월주스님의 정신을 이해하고 지지했다. 그리하여 청련암은 금산사 정화의 본부가 되었다.

이후 제주에서 건너온 이들 중 총명하고 신심이 깊었던 청년 몇 명이 월주스님의 상좌가 되었다. 그 중 한명이 도법스님이다. 월주스님의 원력에 의해 금산사는 정법이 살아 숨 쉬는 수행가풍을 회복하고 그 힘이 전북불교에 미쳤으니 이는 조계종이 성공적으로 안착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대법화 보살은 떠나고 그 손자가 청련암을 지킨다. 
 

귀신사 대적광전 소조불상.
귀신사 대적광전 소조불상.

◇ 거대한 소조불상 반기는 귀신사

청련암에는 모악산 물이 다 말라도 절대 마르지 않는 샘이 있다. 모악산의 모든 기운이 이 곳 청련암에 모이듯 작은 샘이지만 그 원천이 예사롭지 않다. 그 힘이 금산사를 정법 도량으로 복원했는 지 모른다. 

청룡암을 내려오다 만난 마을은 평화롭고 아늑하다. 제주에서 건너온 신도들이 정착한 마을이다. 첫 세대는 대부분 세상을 떠나고 그 후손들은 객지로 나가 남은 가구 수가 많지 않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귀신사(歸信寺)다. 전주로 가는 도로가 맥을 끊어서 멀리 느껴지지만 금산사 바로 뒤편 모악산 줄기에 자리했다. 

676년(문무왕 16) 의상 대사가 국신사(國信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삼국통일 후 각 지방을 교화하기 위해 접경지에 세웠던 화엄십찰 중 하나였다. 금산사도 귀신사 말사였으며, 고려말 왜구가 쳐들어와 300여명이 주둔할 정도였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 사찰 흔적이 발견된다. 청도리 일원이 귀신사였음을 보여준다. 대적광전 안 부처님이 어마어마하다. 고개를 높이 쳐들고 우러러 보아야만 볼 수 있다. 소조불이어서 더 눈길이 간다.

◇ “천지는 한 뿌리에서 나온 한 몸” 

암자는 몇 안 되지만 걸어서 이틀이 부족할 정도로 돌아보아야할 곳도, 들을 이야기도 많은 모악산이며 금산사다. 그 핵심은 미륵십선이며 화엄이다. 화엄은 특별하지도 요란하지도 복잡하지도 않다.

동남아 몽골 아프리카 등 어려운 이웃을 찾아 생명을 살리고 학교를 지어 미래를 대비하는 자비보살행을 펼치는 금산사 회주 월주스님의 가르침에 담겨 있다. “천지가 나와 같은 뿌리이고 만물이 나와 한 몸” ‘천지여아동근(天地與我同根) 만물여야일체(萬物與我一體)’ 정신이 바로 화엄이 가르치는 세상이다. 모악산의 넉넉한 품이 바로 대승보살도 화엄 정신이다.
 

눈 내린 금선암.
눈 내린 금선암.

◇ 금선암과 국수 인연 연분암

입춘(立春)을 하루 지난 2월5일 올 겨울 가장 강력한 추위가 찾아왔다. 아침 전주역에는 찬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바이러스에다 추위까지 겹쳐 도심인데도 거리를 걷는 사람을 보기 힘들었다. 1시간 쯤 갔을까? 시내를 벗어나자 모악산이 뚜렷이 들어온다. 평지 가운데 우뚝 솟아 더 우람하고 장엄하다. 

보통은 대원사 방향으로 모악산을 오른다. 넓은 주차장과 미술관 등 볼거리가 많은데다 정상 까지 바로 갈수 있어서다. 그래서 전주 시내에서 오는 차편도 많다. 그러나 금선암을 먼저 들르기로 했다. 정상으로 가면서 산 능선에서 바라보는 멋진 경치를 놓칠 수 없었다. 금선암에서 정상으로 향하는 등산 코스도 인기다. 올라가는 동안 주변 경치를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금선암(金仙庵)까지 포장길이 놓여 있다. 그 아래 마을 중인동이 흥미롭다. 밀양박씨 집성촌이다. 수많은 비석과 조선시대 관직 명이 적힌 무덤이 예사롭지 않은 집안 임을 말해준다. 2km 못 미쳐 모악산 기슭 계곡 위에 아담하게 자리한 금선암은 보는 것만으로도 포근하다. 창건 연대와 역사는 알려지지 않았다.

옛 절터에 1940년 금화 초안 스님이 복원하면서 역사가 다시 열렸는데 1950년 한국전쟁으로 소실됐다. 초안스님이 1960년대 말 용맹정진 기도 끝에 금빛 찬란한 부처님을 현몽하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곳에 다시 절을 중건했다. 이 때 절 이름을 금선암 이라 했다.

1969년 법당을 지어 아미타 삼존불상을 봉안하고 요사를 세웠으며 1985년 종각을 새로 짓고 무게 100근의 범종을 조성했다. 1992년부터 초안 스님의 주도로 본격적인 중창 불사가 이루어져 예전 종각을 지금 위치에 다시 지어 무게 300근의 범종을 새로 조성했으며, 삼성각을 짓고 이듬해 1993년 극락보전을 건립하여 중창 불사를 마무리 했다. 1995년부터 초안 스님의 뒤를 이어 덕산(德山) 스님이 주지로 주석하며 요사채 무구당(無垢堂), 신도들 정진 공간 염불당을 세웠다.

밤새 내린 눈으로 길이 미끄러운데다 강추위가 몰려와 절 마당과 도로가 얼어붙었다. 조심스럽게 모악산으로 올랐다. 정상으로 향하는 능선이 아닌 매봉쪽으로 향했다. 모악산 능선을 걸으며 사방을 조망하고 싶어서였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데 승복을 입은 노보살님이 등에 배낭을 매고 손에는 봉지를 들고 천천히 올랐다. 정상 아래 절에 가는 모양이다. 짐을 대신 매려고 다가가는데 위에서 내려오는 일행과 반갑게 인사하고 멈춰서 이야기를 나눴다. 아마 같은 절 신도인가 보다. 

편백나무 숲이 우거진 길을 한참을 오르자 개가 먼저 알아보고 짖는다. 양철 지붕을 얹은 작은 집이 나타났다. 눈 까지 털이 덮인 강아지가 와서 신기한 듯 쳐다본다. 산 속 작은 절을 지키는 강아지도 외로움을 타는지 좀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작은 비석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국수 면발 보다 더 긴 인연인 걸, 무진스님! 염불암의 바람으로 머무소서”라고 쓰여있다.

나중에 금산사에서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이 절의 젊은 주지스님이 등산객들에게 국수를 무료로 보시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 그 부인이 대신 절을 맡아 운영한다. 비석은 그 때 국수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난 주지스님을 잊지 못해 세웠다. 이름이 예쁘다. 연분암, 공식적으로는 염불암이라고 하는데 종단 소속이 아니다. 

‘왜 벌써 가느냐’는 듯 쳐다보는 강아지를 뒤로 하고 매봉으로 올랐다. 능선에 올라서자 사방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서쪽으로 눈을 돌리면 금산사와 김제평야가, 동쪽으로 아파트가 즐비한 전주 시내가 환히 보인다. 
 

금산사 전경.
금산사 전경.

◼ 모악산 중심도량 금산사

과거 현재 미래 공존 화엄세계
지구촌 이웃 돕는 자비 정법도량

금산사는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고 선과 교가 하나 되고 모든 수행 가르침이 하나를 지향하는 화엄세상이다. 청정한 불국토는 자기수행과 중생구제의 원을 세워 끊임없이 정진하는 보살도 실천을 통해 이뤄진다는 화엄사상을 가람을 통해 구현하고 스님들이 몸소 실천하며 신도들이 따르는 자비도량이다.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금강문과 나한전을 남북으로 잇는 중심축과 미륵전과 대장전을 동서로 잇는 중심축이 교차하는 도량배치는 부처님의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서 어느 하나의 사상이나 종파에 치우침이 없이, 선과 교가 공존하며 모든 사상과 내용을 포용하고 있는 대승불교의 신앙체계를 모두 갖춘 종합사찰 임을 보여준다.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가 금산사를 중창하고 미륵전을 건립하여 미륵신앙의 중심으로 삼았다. 미륵신앙의 핵심은 수행과 자비다. 미륵은 구세주가 아니며 세상을 개벽하는 사회변혁가도 아니다. 미륵을 자처하는 자는 어지러운 시대에 혹세무민하여 그를 통해 이익을 꾀하려는 마구니일 뿐이다. 열 가지 선한행위(十善道)를 열심히 닦아 죄업을 참회하고 수행하고 자비로 주변을 베푸는 가르침이 미륵신앙의 핵심이다. 미륵부처님의 세상은 모든 중생이 자비심을 가지고 십선을 행하는 대자대비한 세계다. 

금산사는 고려 문종 때에는 혜덕왕사가 86동 43개 암자를 거느린 대가람으로 중수했으며, 임진왜란 때 금산사 주지 뇌묵처영대사는 승병 훈련소를 설치하여 왜군들에 맞서 나라를 수호했다. 그 보복으로 왜군에 의해 모두 불탔지만 인조 때 수문대사가 35년간 대대적 중창불사를 해 대적광전을 세워 과거 현재 미래불을 모두 모시고 연화장 세계를 구현했다. 

금산사의 유구한 역사와 정신은 1960년대 월주스님에 의한 미륵정심회로 이어져 제자인 도영 도법 평상 원행스님 등과 함께 십선행 운동으로 승화했다. 월주스님이 이끄는 지구촌공생회, 총무원장 원행스님이 맡아 운영했던 나눔의 집, 수많은 제자들이 펼치는 복지 활동과 금산사를 중심으로 전주와 전북에서 활발한 신도교육, 불교대학, 복지가 모두 미륵십선행에서 유래한 자기완성과 이웃구제의 보살도에 기반한다.
 

금산사 역사를 보여주는 부도전.
금산사 역사를 보여주는 부도전.
청룡사에서 바라본 금산사.
청룡사에서 바라본 금산사.

모악산=박부영 주필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3558호/2020년2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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