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사흘 뒤 부처님오신날, 시민군과 떡 나누고…”
“5·18 사흘 뒤 부처님오신날, 시민군과 떡 나누고…”
  • 현중순 전 조선대 · 광주대 교수
  • 승인 2020.02.19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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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40년 전…1980년 5월18일 그 아픈 기억
현중순
현중순

1980년 5월18일은 부처님오신날을 사흘 앞둔 날이다. 내 나이 서른셋, 내 아들의 나이 다섯 살 되던 해의 일이다. 칠십을 넘긴 나이에 그때의 가슴 아팠던 광주의 눈물을 일부나마 더듬어 적는다. 

매년 찾아오는 음력 사월은 부처님오신날이 들어있는 달이다. 부처님오신날을 기다리며 들뜬 마음을 가다듬고 정성을 모으는 달이다. 참으로 성스러운 달이다. 그러나 1980년 음력 사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이 순간에도 더 이상 그해 그때의 참혹한 참상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은 계엄군이 1980년 5월, 광주에서 인간이 해서는 안 될 끔찍한 살생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민주화를 외치는 선량한 광주시민의 생명을 앗아갔다. 

불교의 핵심계율은 ‘불살생’ 

불교의 계율 중에 가장 핵심 되는 계율은 불살생이다. 중생을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날아다니고 기어다니는 것까지도, 생명이 있는 것은 남을 시켜 죽여서도 안 되고 죽이는 것까지도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개미 한 마리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말을 어려서부터 부모님에게 듣고 살았다. 

1980년 5월은 음력 4월이었다. 이 해도 여느 해 여느 때처럼 산속 절에서부터 도심으로 이어지는 형형색색의 연등이 평화롭고 아름답게 춤추고 있던 때다. 이런 광주의 5‧18전날인 5월17일이 떠오른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초저녁.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보기 위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런대 웬일인지 화면이 먹통이 되고 ‘속보’라는 글자만 고정돼 있다. 사방이 어두워지고 인적이 끊겨 조용한데 조선대 정문 앞에 다다른 군트럭들이 쏟아내는 불빛이 집 창문을 비추니 방안이 온통 대낮같은 불야성을 이뤘다. 

숨을 죽이고 창틈으로 밖을 내다보니, 군트럭에 성냥개비처럼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계엄군이 어깨에 총을 메고 있었고 총 끝은 매우 날카롭게 번쩍이고 있었다. 겁에 질린 나는 순간 “북한 공산당이 쳐들어 왔다”고 소리쳤다. 방안 어디로도 숨을 곳은 단 한곳이 없었다. 1980년 당시 우리 가족은 조선대 정문 앞 대로변에 위치한 3층 건물에서 살고 있었다. 

조선대학교에 진을 친 계엄군들은 대학과 대학정문을 지키며 학생들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휴교령이 내린 때이지만 학교로 들어서는 학생은 물론이고 학교 앞을 지나는 시민들까지 끌고 가는 때라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저씨들까지도 통행을 저지받고 밤사이 부러진 곤봉, 벗겨진 모자, 이런 것들을 보니 분노가 치밀었다. 교문 앞에서는 계엄군에게 대드는 학생도 있었다. 

“왜 죄없는 학생을 때리느냐”고 1층에서 소리내고 3층으로 올라갈 때는 정문 앞의 계엄군이 쫓아올라올 것만 같았다. 선량한 시민들이 숨을 죽여야 했다. 사람들의 왕래라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눈에 띄지 않아야 살아남는다는 외출금지다. 방안에 앉아 있다가도 총알이 날아 들어올까 싶은 심정이었다. 두부 한모 계란 한줄 사러나갈 수 없다. 아예 두부도 계란도 구할 수 없다. 그런 와중에도 누가 어떻게 가져다 놓았는지 대문 앞 사거리쯤에 따뜻한 우유통이 놓여 있다. 옆에는 긴 손잡이가 달린 컵도 놓여 있었다. 인정과 동료애가 전달되는 퍼포먼스 같은 일이다. 

한편 시내 중심이나 외곽 어느 곳에서 누가 누구의 손에 의해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지 두렵기만 할 뿐이었다. 외출한 가족이 귀가하지 않아도 누구에게 묻고 답해 줄 사람이 없으니 발만 동동 구르는 수밖에 없었다. 태극기에 싸여있는 시신이 전남도청 앞 무도관에 즐비하다고 들었다. 태극기로 덮여있는 시체를 낱낱이 들춰보러 간 부모형제들이 있었으니 가족을 찾기 위해서였다. 

내 시부모님은 솜이불로 방문을 막았다고 했다. 총알은 솜을 뚫지 못한다는 지혜로운 말을 그때 들었다. MBC광주방송국이 불에 타고 불붙은 버스 한 대가 조선대로 돌진하다가 내 집 앞 하숙집 화장실을 밀어버렸다. 하숙하던 선생님 한 분이 화장실에 있다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고 하숙집 할머니가 울상이었다. 후에 알고 보니 군병원에 있었다고 들었다. 시민군으로 오인된 것이다. 

내 집 1층에는 중화요리집이 있었다. 부하 3명을 거느리고 식당에 온 중사는 상관이었다. 조선대 안에서 주둔한 부대원들이 식당에 와서 음식을 시킨 것인데 식당 아저씨가 손이 떨리고 겁이 나서 음식을 만들 수가 없었다고 했다. 마침 계엄군들이 식당에 들어간 것을 안 우리가족이 용기를 내서 그들 앞에 나섰다. 

“북한 공산당도 아니고 우리민족끼리 뭐하는 짓이냐, 우리들의 부모형제요. 당신들의 가족과 같은 시민들을 살생하는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느냐”라고 말했을 때, 상관이 부하들에게 말했다. “남녀노소 없이 원 샷 시켜.” 안간힘을 써 남편의 등을 떠밀고 나왔다. 
 

1980년 5월과 관련한 수많은 상흔 속에서도 국가무형문화재 영산재 보유자와 스님들을 모시고 봉행한 2010년 5·18희생자 천도재는 불심을 키워주는 좋은 계기였다. 사진은 5ㆍ18 민주화운동 39주년을 맞아 광주전남포교사단이 2019년 5월19일 국립5ㆍ18묘역에서 위령제를 갖고 희생영령들의 묘역을 돌며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모습. 불교신문
1980년 5월과 관련한 수많은 상흔 속에서도 국가무형문화재 영산재 보유자와 스님들을 모시고 봉행한 2010년 5·18희생자 천도재는 불심을 키워주는 좋은 계기였다. 사진은 5ㆍ18 민주화운동 39주년을 맞아 광주전남포교사단이 2019년 5월19일 국립5ㆍ18묘역에서 위령제를 갖고 희생영령들의 묘역을 돌며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모습. 불교신문

부처님오신날 

1980년 5월21일(음력 4월8일)은 부처님오신날이었다. 무등산 초입의 버스종점을 증심사 종점이라고 부른다. 무등산 밑에는 초입에 버스종점이 있고 ‘광륵사’라는 절이 있다. 지금은 타계한 동국대학교 고익진 박사의 모친이 창건한 절이다.

고익진 박사의 모친은 절을 지어 부처님을 모시는 수행자였고, 내 친정어머님은 평생 불자로 지내며 전국 곳곳의 많은 사찰을 순례하셨다. 익히 그곳 스님들의 법명은 다 외우지 못해도 사찰들의 이름은 손꼽아가며 알려주셨다. 4남2녀 자식들을 일찍부터 불자로 통일시켰다. 방생과 개금불사, 가사불사, 점안식, 영산재 등을 그때부터 익혀 알 수 있었다. 

1980년 부처님오신날 당일. 왕래하는 사람하나 없고, 참으로 삼엄한 분위기의 경계를 뚫고 이른 아침부터 걸어서 어머니와 함께 절에 갔다. 법당에 들러 부처님 전에 절하고 돌아오는 길은 갈 때 마음 졸이던 것보다 더 겁이 났다. 낮게 뜬 비행기가 계속 우리 모녀의 머리위에서 맴돌며 따라오고 있었다. 그때 그 비행기가 어떤 비행기인지는 모른다. 무서워 죽을 것만 같았다. 겁 없이 나타난 모녀에게 경고하는 것 같았다. 

양림동 친정집으로 피난 왔었기에 나는 어머니와 함께 부처님오신날 절에서 나누어 먹던 절편을 젊은 시민군들에게 건넸다. 그들은 피흘리는 환자를 손수레에 싣고 광주 기독병원을 찾아가고 있었다. 지금도 그때의 광경이 눈에 선하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주먹밥을 만들어 날랐고 방앗간에서는 떡을 만들고 상점 주인들은 달리는 시민군 차량에 무엇이든 아깝지 않게 내놓았다. 훈훈한 인심을 느낄 수 있었다. 

5‧18희생자 천도재 봉행 

5‧18희생자 천도재 봉행은 불심을 키워주는 좋은 계기였다. 5‧18을 떠올리면 빼놓을 수 없는 일기장 한페이지의 일을 잊을 수 없다. 

5‧18민주화운동 30주년 기념일을 사흘 앞둔 5월15일에 ‘5‧18광주 국립묘지 역사의 문’에서 광주 민주화운동 희생자 621명의 천도재를 추진해 봉행하는데 중심에 섰던 일과 5‧18민주화운동 34주년을 맞아 광주 금남로 근린공원에서 제2차 희생자 천도재를 봉행하는 데 중심에 서서 임했던 일이다. 

5‧18 민주화 운동 30주년을 앞두고 있는 어느 날, 명승희 대한무궁화중앙회 총재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서울 이 자리에 한화갑 국회의원, 서울 남산 월명사 주지 스님과 세 분이 함께 하고 있는데 광주를 이야기 하면서 “5월 영령을 위로하는 천도재를 봉행하면 좋겠다”는 의견이 모아져 5‧18광주국립묘지 관리사무소에 문의했는데 묘역에서 천도재를 하기가 어렵다는 답변을 듣고 광주에 살고 있는 나를 통해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는 내용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전화를 받은 나는 5‧18희생자 천도재를 5‧18국립묘지에서 봉행할 수 있도록 성사시키고 싶어 곧바로 5‧18국립묘지 관리사무소를 찾아가 천도재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고 5ㆍ18 30주년 기념일이 얼마 남지 않은 5월15일을 천도재 봉행일로 정하고 월명스님에게 전했다. 스님의 집전 하에 열린 천도재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 작법 보유자 인간문화재 구해스님을 비롯해 10여명의 스님들이 바라춤과 승무를 펼치며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하면서 여법하게 봉행됐다.

[불교신문3558호/2020년2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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