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호의 한국의 불상] <3> 고구려 불상 ② 금동불삼존상의 출현
[배재호의 한국의 불상] <3> 고구려 불상 ② 금동불삼존상의 출현
  • 배재호 용인대학교 문화재학과 교수
  • 승인 2020.02.19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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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남경 출토 불상과 강원도 양양 불상이 닮았다?

하나의 광배에 삼존상 봉안
‘일광삼존불상’이라고 알려져
세개틀로 조성 주조공정 변화

산동성 출토된 6세기 불상과
계미명 금동불입상 비교하면
크기 제작방식 도상형식 닮아

남경서 산동성으로 전해져
6세기 후반 우리나라에도 영향

6세기 후반, 중국 산동성(山東省) 불상의 영향을 받아 금동불삼존상이 조성되었다. 하나의 커다란 광배 속에 불상과 협시보살상, 보살상과 협시제자상이 있어서 ‘일광삼존불상(一光三尊佛像)’으로 알려져 있다. 금동불삼존상은 불신(佛身), 협시상이 표현된 광배, 대좌를 따로 주조하고 금(金)을 입힌 후 결합하여 완성하였다.

하나의 틀로 만든 연가칠년명 금동불입상(고구려 539년)과는 달리 금동불삼존상은 세 개의 틀을 사용하여 조성된 것으로서 주조 공정의 새로운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광배 앞뒷면에 새겨진 협시상, 문양, 화불(化佛), 명문은 불상 조성의 도상학적 배경을 설명하기 위한 구체적인 표현들로서, 불상에 대한 교학적․신앙적인 이해가 깊어졌음을 추측하게 한다. 
 

간송미술관 소장 계미명(563년) 금동불삼존상. 높이 17.5cm.
간송미술관 소장 계미명(563년) 금동불삼존상. 높이 17.5cm.

대부분의 금동불삼존상은 광배 뒷면에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언제 누가 어떤 불상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느 나라 불상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불상이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장소도 공식적인 발굴을 통한 것이 아니라 구전된 것이기 때문에 국적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동불삼존상을 대표하는 계미명(癸未銘) 금동불삼존상(金銅佛三尊像, 563년)과 신묘명(辛卯銘) 금동불삼존상(571년)은 조형적인 특징을 통하여 고구려 불상으로 분류된다. 

계미명 금동불삼존상은 광배 뒷면의 명문을 통하여 보화(寶華)가 돌아가신 아버지 ‘조○인(趙○人)’을 위해 계미년(563)에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불상을 조성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당시의 분위기로 보아 무량수불상(無量壽佛像, 아미타불상)일 가능성이 높다. 금동불삼존상의 불신은 함께 주조된 역삼각형의 발 받침대를 대좌 윗면의 구멍에 꽂아서 세웠으며, 광배는 불상의 등 뒤에 있는 광배 촉에 끼워서 결합하였다. 

불상은 통견 방식으로 두꺼운 법의를 입고 있으며, 법의 주름은 ‘八’식으로 좌우대칭을 이루며 넓게 펼쳐져 있다. 오른손은 두려움을 없게 해 준다는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왼손은 원하는 바를 들어준다는 여원인(與願印)을 결하였다. 왼손의 약지와 소지는 구부린 상태이다. 불상은 동그란 육계, 타원형의 얼굴, 둥근 신체 조형을 갖추고 있다.

거대한 연꽃잎과 같은 광배 속에는 불상에 비해 훨씬 작은 보살상이 연화좌 위에 선 채 양옆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보살상들의 법의 자락도 불상과 같이 좌우로 펼쳐져 있다. 광배 중앙에는 두광과 신광이 구획되어 있으며, 두광 중앙에는 연화문이, 연화문의 가장자리에는 위에서 양옆으로 드리운 모습의 인동당초문이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신광에는 연주문이 음각되어 있다. 같은 기법의 연주문 장식은 대좌 위쪽을 덮고 흘러내린 세 겹의 연판문 테두리에서도 확인된다. 계미명 금동불삼존상은 정확한 출토지가 알려져 있지 않아 국적을 특정할 수는 없으나 법의 자락의 한쪽 끝이 왼손의 손목 위로 넘어가고 사선을 이루는 내의(內衣)의 착의 방식이 연가칠년명 금동불입상과 닮아서 고구려 불상으로 생각된다.

놀랍게도 이 불상에 보이는 제작 방식, 도상 구성, 대좌 형식은 중국 산동성 제성(諸城)에서 출토된 동위(東魏)시대 6세기 중반의 금동불삼존상(17cm)과 많이 닮았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신묘명(571년) 금동불삼존상은 광배 높이 15.5㎝이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신묘명(571년) 금동불삼존상은 광배 높이 15.5㎝이다.

1930년, 옛 고구려 영역이던 황해도 곡산군 화촌면 봉산리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신묘명 금동불삼존상은 신묘년(571)에 승려 도○(道○)가 선지식과 함께 만든 무량수불상(無量壽佛像)이다. 광배 뒷면에 새겨진 67자의 명문은 승려(비구) 도○가 선지식인 나루(那婁), 천노(賤奴), 아왕(阿王), 아거(阿倨)와 함께 무량수불 1존을 만들어 돌아가신 스승과 부모님이 내세에 다시 태어날 때마다 여러 붓다를 만나고, (이와는 별도로) 선지식 등은 (내세에도) 함께 태어나 미륵의 가르침을 받길 원한다는 내용이다.

불상 조성의 목적은 도○의 스승과 선지식들의 부모님이 내세에 태어나서도 다시 붓다를 만나고, 동시에 그들은 (지금의) 선관(禪觀) 수행을 통하여 내세에 미륵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나라의 사원에서 만들었는지에 대한 내용은 명문에서 확인되지 않아 불상의 국적을 특정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명문에 보이는 승려와 선지식들의 선관 수행은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 <선비요법경(禪秘要法經)> 등이 번역되고 유행한 중국 북조北朝 불교계에서 승려들이 수행했던 선관이 고구려에서도 행해지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승려들의 선관 수행은 5세기 전반의 뚝섬 출토 금동불좌상을 통하여 불교 전래 초기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으나 그들의 수행 목적이 미륵을 친견하는데 있다고 밝힌 것은 처음이다.

지난 글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승려들의 선관 수행의 대상으로서 만들어진 평천리 출토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도 이러한 분위기와 관련된다.

신묘명 금동불삼존상은 현재 대좌가 없지만, 불신, 광배, 대좌의 결합 방식은 계미명 금동불삼존상과 같다. 불상의 가슴 앞에는 주조 결함으로 인하여 패인 네모난 흔적이 남아 있다.

불상은 통견 방식의 착의법,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결한 수인, 역삼각형의 발 받침대 등이 계미명 금동불삼존상과 유사하지만, 몸에 비해 큰 머리와 손, 오각형의 커다란 육계, 장방형의 얼굴, 활달함이 줄어든 ‘八’자형 법의 자락, 입체감이 줄어든 법의 주름 등에서 조형적인 차이를 보인다. 연가칠년명 금동불입상과 계미명 금동불삼존상에 보이던 왼손 손목 위를 감고 밖으로 흘러내리던 법의 자락도 여기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광배 속에 표현된 보살상들도 불상과 같이 몸에 비해 머리가 큰 편으로, 각각 다른 형식의 보관을 착용하고 있다. 두광과 신광의 도드라진 구획선과 이 선의 안팎에 표현된 연화문, 인동당초문, 화염문 등은 계미명 금동불삼존상과 비슷하지만, 신광에는 음각의 연주문 장식이 아닌 초화문(草花文)이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있고, 가장자리의 화염문도 훨씬 형식화된 것을 엿볼 수 있다.

주목되는 것은 기존의 불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3존의 화불(化佛)로, 불상을 도상학적으로 설명하려는 표현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금동보살삼존상은 보살상을 본존으로 좌우에 제자상이 협시하고 있다. 6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가 8.8cm이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금동보살삼존상은 보살상을 본존으로 좌우에 제자상이 협시하고 있다. 6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가 8.8cm이다.

한편 보살상을 중심으로 제자상들이 협시하는 금동보살삼존상도 확인된다. 보살삼존상 임에도 불구하고 크기가 작아서인지 하나의 틀을 사용하여 주조되었다. 명문이 남아 있지 않아 어느 나라에서 어떤 목적으로 이 상을 만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대좌를 장식하는 끝이 날카롭고 길쭉한 연꽃잎이 고구려 고분 벽화의 연꽃과 닮았고, 보살상의 내의가 연가칠년명 금동불입상과는 반대 방향이긴 하지만 사선으로 표현된 점 등은 고구려 보살상일 가능성을 높여 준다. 광배 문양 중 세 갈래로 갈라진 화염문 꼬리는 삼국시대 6세기 후반에 보이는 조형적인 특징이다. 

6세기 후반, 금동불삼존상의 출현 배경으로 산동성 불상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계미명 금동불삼존상이 산동성 제성에서 출토된 금동불삼존상과 크기․제작 방식․도상 형식이 닮았기 때문이다. 산동성 제남(濟南)의 신통사(神通寺)에 고려상(高麗像, 고구려 불상)이 봉안되어 있었다는 <속고승전(續高僧傳)>의 기록은 고구려 불상이 역으로 산동성에 전래된 사실을 알려주고 있어서 양 지역 간의 불상 교류가 활발했음을 추측하게 한다. 

사실 산동성에서 출토된 6세기 중반의 금동불삼존상은 6세기 전반 양(梁)나라의 수도 건강(建康, 남경)에서 제작된 금동불삼존상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이다. 건강에서 제작된 금동불삼존상이 산동성에 영향을 주고, 이로 인해 만들어진 산동성 불상이 다시 우리나라에 영향을 주면서 6세기 후반에 금동불삼존상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이는 남경시 신가구(新街口)에서 출토된 대통(大通)원년명 금동불입상(527년, 11.6㎝)과 조형적․형식적으로 매우 닮은 금동보살삼존상이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陳田寺) 터에서 출토된 것을 봐서도 알 수 있다.

6세기 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진전사지 출토 금동보살삼존상이 우리나라 것인지 아니면 중국 양나라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하지만, 형식적으로 닮은 불상과 보살상이 남경과 양양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은 남경의 불상이 우리나라 불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을 알려 준다.

계미명과 신묘명 금동불삼존상도 남경에서 시작된 도상이 서주(徐州)를 경유하는 육로나 장강(長江)하구․소노(蘇魯)해안을 통한 해로로 산동성으로 전해졌고, 그것이 다시 6세기 후반에 우리나라로 전해져 조성되었던 것이다. 

[불교신문3558호/2020년2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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