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사랑’ 동국대학교병원 투병·간병 수기 공모전
[대상 수상작] 박완순 씨 ‘치유를 향한 긴 터널’ (上)


만성폐쇄성폐질환으로 응급실行
중환자실 입원 기나긴 병원생활
목에 기관 삽입, ‘콧줄’로 식사…
고통과 공포의 나날들 이어져

매주 월요일 어느 스님의 격려
“매일 핸드폰만 보던 일상에
새로운 안식처로 자리한 명상“

동국대학교의료원(원장 조성민)은 지난해 10월 ‘치유&사랑 동국대학교병원 투병·간병 수기 공모전’을 시행해 올해 1월 수상작을 발표했다. 수상작은 대상을 포함해 총 10편이며 투병 간병생활에서 겪었던 따뜻하고 감동적인 경험, 질병을 계기로 삶에 대한 관점이 변화하게 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본지는 힘든 병고를 극복해가고 있는 환우들을 격려하고 독자들에게 그들의 인생에 대한 성찰을 전하기 위해 수상작들을 매주 연재할 계획이다. 먼저 대상작인 박완순 씨의 ‘치유를 향한 긴 터널’을 상·하편으로 나눠 싣는다.

동국대학교의료원은 병고에 처한 환우들에게 희망을 선사하기 위해 투병·간병 수기 공모전을 열었다. 사진제공=동국대 의료원
동국대학교의료원은 병고에 처한 환우들에게 희망을 선사하기 위해 투병·간병 수기 공모전을 열었다. ⓒ동국대의료원

2017114. 나는 아팠다. 아주 많이.

10년 전부터 야금야금 나를 괴롭혀오던 만성폐쇄성폐질환. 그동안 몇 번의 입원이 있었고, 약은 꾸준히 복용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병에 익숙해져서 나의 상태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날은 갑작스럽게 온몸이 시려왔고, 아픔을 제일 먼저 알려주는 종아리시림도 컸다. 이빨은 사시나무 떨리듯 달그락달그락 부딪혔지만, 자고나면 조금 나아지겠지 하고 잠을 청했다. 무척 힘든 느낌에 깼는데, 생리현상도 조절하지 못할 만큼 숨은 더 가빠오고 힘들어졌다. 결국 119에 실려 집과 가까운 고려대구로병원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동국대일산병원에 입원했다. 그날이 긴 병원생활의 시작이었다.

먼저 중환자실 집중치료실에 배치됐다. 2년 전에 기관 삽관 후 너무나 힘들어 다시는 이것만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는데, 또 하게 됐다. 제일 힘든 건 삽입한 기관을 제거하는 날이다. 제거한 후 바이팹(인공호흡기의 일종)으로 바꾸고 마스크를 착용했다. 그때부터 마치 온몸에 가래가 박혀버린 듯 아무리 뱉어내려 해도 가래는 배출되지 않았다. 석션도 소용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1년 같은 하루를 보냈는데 주치의가 다시 기관 삽입을 해야 한다고 했다. 호흡이 너무 안 좋다는 이유에서다. ‘내가 이 하루를 어떻게 견뎠는데 다시 하라는 거야하는 생각이 들면서 죽는 것보다 싫었다. 내가 안한다고, 못하겠다고 하자 언니까지 와서 나에게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내 고집만 피울 수는 없었다. 그 때 교수님께서 기관 삽입 대신 바이팹으로 유지해 보자고 하셨다. 교수님의 그 말이 마치 퇴원판정 받은 것처럼 반갑게 들렸다.

그렇게 바이팹으로 유지했고, 간호사님도 완순님, 기관삽입 안하게 제가 가래 다 빼 드릴께요라고 하시며 밤에도 석션을 한 시간마다 해주실 정도로 나에게 신경을 많이 써주셨다. 다행히 많이 회복되어 한 달 만에 일반병동인 61병동으로 올라 갈 수 있었다. 여기는 통합병동이라 간병인이 따로 없고, 간호사님과 조무사님들이 모든 걸 도와주었다.

통합병동에도 호흡기는 차고 올라갔고, 콧줄로 식사를 하고 대소변도 기저귀로 해야 했다. 숨쉬기 연습하고, 다리 재활운동하고, 콧줄 낀 채로 식사연습도 하면서 나름 2~3주후면 퇴원을 할 것으로 생각했고 교수님도 그렇게 말씀을 해주셨다.

제일 중요한 것은 호흡기 떼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었다. 처음엔 2, 그 다음은 3, 그 다음은 5.

그런데 5분 이후로는 진전이 없었다. 땀이 많이 나고 힘이 들었다. ‘호흡기를 떼야 밥을 먹고 그래야 집에 가는데라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도 ‘5’라는 숫자는 좀처럼 바뀌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지만 입으로 마시는 연습을 해보았다. 먹는데 아주 힘들지는 않았지만 입으로 먹으니 폐 쪽으로 음식물이 넘어가서인지 폐렴이 자꾸 생겼다.

그 때문에 콧줄은 계속 유지해야 했고, 퇴원 꿈도 점점 멀어져갔다.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 같은 지루하고 힘겨운 날들이 계속 되었고, 나의 의욕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운동도 제대로 하지 않고 그냥 누운 채 핸드폰으로 하루를 보냈다.

그즈음이었다. 점심을 먹고 누워 핸드폰을 보는데, 딸 채영에게서 톡이 왔다. “엄마, 큰 이모가 연락이 안 된대” “어디 시장이라도 돌아다니시겠지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했다. 잠시 후 다시 전화를 걸어 온 채영이가 엄마 큰 이모 돌아가셨대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했다. ‘아니겠지, 아니겠지를 속으로 외치면서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상황에 머리가 멍했다.

꿈만 같았다. 호흡기를 억지로 떼고 말소리도 나지 않는 목소리로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 확인한 다음에야 진짜 실제 상황임을 느꼈다. 당뇨와 합병증으로 몇 년 전부터 투석까지 받아오던 큰언니. 아프면서도 나를 먼저 챙겨주고 애들도 끔찍하게 신경써주던 큰언니. 병원에 다니고 해서 이렇게 갑작스런 이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언니에 대한 미진한 오해가 있어 그동안 살갑게 하지도 못했는데.

가슴이 미어지고, 소리 내어 울고 싶었지만 호흡기는 그것마저 못하게 했다. 쫓아가서 언니 가는 모습도 보고 싶고, 편히 쉬라고 손이라도 잡고 싶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기도와 눈물 흘리는 것뿐이었다. 그냥 이대로 보낸다는 것이 너무 슬펐다.

큰언니의 발인이 있던 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한 스님이 나에게 다가왔다. 종교는 없었지만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 다녀서인지 불교는 나에게 어색했다. 다른 때였으면 그냥 가시라고 했을 테지만 그때의 나는 누구에게라도 한마디 해서 나의 터질듯 한 마음을 내뱉고 싶었다.

병원에서 기도 봉사를 해주시는 분이라고 했다. 나이는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나는 언니처럼 느껴지고 첫 만남에도 스스럼이 없었다. 내 얼굴이 안 좋아 보인다 하셔서 언니 일을 말씀드렸다. 내 손을 잡아주시고 기도를 해주셨는데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조금은 마음이 가라앉는 듯 했다. 언니에 대한 슬픔 속에서도 기도는 따뜻한 외투가 되어 나를 덮어주었다.

스님은 매주 월요일에 오셨는데, 어느새 월요일 1시를 나도 모르게 기다렸다. 핸드폰에 기도문도 적어 주시면서 명상하라고 말씀하셨다. 매일 핸드폰만 하던 나에게 명상은 새로운 안식처가 되었다. 내가 지금 말을 자유롭게 못하기 때문에 머릿속으로 항상 내가 걷는 것, 말하는 것 등을 생각하라고도 해주셨다.

하편에 계속
 

동국대학교일산병원 전경.
동국대학교일산병원 전경.

[불교신문3558호/2020년2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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