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이라는 이 헐벗은 땅덩이 안에서 자비하신 당신의 가르침은 이미 먼 나라로 망명해 버린 지 오래이고, 빈 절간만 남아 있다는 말이 떠돕니다. 그리고 이른바 당신의 제자라는 이들은 마치 투쟁견고시대(鬪爭堅固時代)의 표목(標木) 같은 군상들로 채워져 있다고도 합니다.”

1964년 10월11일자 불교신문에 실린 법정스님의 글 ‘부처님 전상서(前上書)’ 중 일부분이다. 법정스님은 비구였다. 부처님 가르침 대로 궁핍을 자처하고, 스스로에 엄격하며 종단과 중생을 걱정하며 부처님 가르침을 말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려 했던 비구였다. ‘비구 법정’의 눈에 비친 당시 종단은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과 많이 달랐다.

“구도자로서의 자질과 미래상이란 전혀 찾아볼 수도 없는 우매한 고집들이 수도장(修道場)을 경영하는” 형국이었다. ‘운수(雲水)를 벗하여 홀홀 단신수도(單身修道)에만 전념하는’ 납자(衲子)가 아니라, ‘점을 치고 부적을 팔며, 불사라는 이름으로 신도들에게 돈을 구걸하고 산문을 걸어 잠그고 중생은 외면하며 사찰만 살찌우며, 대중처소는 독살이로 변질하며 화합 대신 독선과 아집이 횡행했다. 

모두 침묵할 때 스님은 불교신문을 통해 종단의 현실과 수행자들의 잘못된 태도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비판의 잣대는 단 하나, 부처님 가르침이었다. ‘당신의 가사와 발우를 가진 제자’인 비구가 비구답게 사고하고 행동하며 삶을 살아야 한다고 법정스님은 늘 설파했다. 

법정스님이 입적한 지 10년이 지났다. 2월19일에는 법정스님과 인연 있는 사찰과 신도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스님을 기린다. 10년 세월이 지났지만 갈수록 스님을 그리워하는 얼굴이 늘어난다. 스님처럼 비구로 살아가는 부처님 제자를 보기 드물기 때문이다.

법정스님이 불교신문에 글을 올린 지 50년이 돼가지만 달라졌다고 감히 자신하지 못한다. 현실적 이유를 들어 세속 논리가 정법(正法)의 탈을 쓰고 여전히 종단을 배회하며, 독살이는 더 강화됐으며, 산문의 대문도 더 올라갔다. 

스님은 “부처님! 당신의 가사와 발우를 가진 제자들은 오늘날 이 겨레로부터 불신(不信)을 받고 있습니다”라고 통탄했다. 법정스님의 통탄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백가쟁명식 방안이 나오지만 해결책은 단 하나다. 법정스님처럼 비구로 살면 된다. 재가자나 일반국민들이 법정스님 10주기를 추모하고 스님을 그리워할 때 스님들은 법정스님이 올린 ‘부처님 전상서’를 다시 읽어야 한다.

“‘큰스님’의 체중이 법력이니 도덕의 비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돈 많은 신도들을 얼마만큼 확보하고 있느냐에 달렸다”는 평에서 자유로운지, “당신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귀의한 순백(純白)한 신앙인들을 마치 하나의 재원(財源)으로 착각하고” 있지 않은지, “사원이란 오직 수도자가 도업(道業)을 이루기 위해, 한데 모여 서로 탁마해 가면서 정진해야 할 청정한 도량임”을 실천하고 ‘수도에 전념하는 의젓한 구도자’인지 살펴야 한다. 

법정스님 10주기를 맞아 스님의 삶과 가르침을 되새기는 분위기가 더 살아나기를 바란다.

[불교신문3557호/2020년2월15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