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보살은 어디서 오셨는가’
무한한 자비심이 불교의 핵심


보살, 우리 불교의 지향점
생활에서 보살행 실천하면
불교 중흥하고 불국토 건설

혜총스님
혜총스님

<비화경> ‘대시품(大施品)’에 여래의 갖가지 신통변화를 본 적의(寂意)보살이 부처님께서 좋은 국토를 다 놔두고 하필이면 왜 이 고통으로 점철된 사바에 오셨는지 그 연유를 여쭈는 장면이 나온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무슨 인연으로 이 더럽고 추악하고 부정한 세계인 명탁(命濁)·겁탁(劫濁)·중생탁(衆生濁)·견탁(見濁)·번뇌탁(煩惱濁)의 다섯 가지 흐리고 나쁜 오탁악세(五濁惡世)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시고, 사중(四衆)에게 삼승법(三乘法)을 설하시게 되었으며, 무슨 인연으로 청정한 세계를 취하지 않고 오탁악세를 여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적의보살께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은 본원(本願) 때문에 청정하고 미묘한 나라를 취하기도 하지만, 본원 때문에 짐짓 청정하지 않은 국토를 취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선남자여, 보살마하살이 대비(大悲)를 성취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부정토(不淨土)를 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도 본원으로써 이 청정하지 않고 더러운 세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룬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에서 보듯이 보살마하살은 정토에 날 수도 있지만 본원 때문에 스스로 원해서 오탁악세의 부정토에 오셨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부정토에 나는 것은 대비(大悲)를 성취하였기 때문이다. 대비심이 보살을 사바세계로 이끄신 것이다. 대비심을 성취한 보살은 결코 중생을 외면할 수 없다. 

중생이 끝이 없으면 보살의 출현도 끝이 없는 것이다. 보살은 고통의 바다에서 괴로움에 신음하는 중생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다. 그곳이 불속이든 물속이든 폭풍우 속이든 고통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스스로 득달같이 달려간다. 그것이 보살의 마음이고, 보살행이다. 

소납은 이 ‘보살’이 바로 우리 불교가 지향해야 할 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불교중흥은 보살도의 구현에 있다. 교단이 보살도 구현을 위해 애쓰고 불자 각인이 생활 현장에서 보살도를 구현해갈 때 불교는 중흥하고 불국토는 건설된다. 세계가 하나 되는 연꽃이 핀다. 이것이 청정한 정토를 두고 오탁악세에 오신 석가모니부처님에 대한 올바른 예경이요, 공양이요, 부처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한 천만분의 일에도 못 미칠 작은 보답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소납은 항상 “이 땅에 수많은 보살들이 끝없이 샘솟게 하소서!” 하고 염원한다. 

무한한 자비심이 불보살을 이 땅에 오시게 했고, 무한한 자비심이 곧 불교의 핵심이다. 자비심과 보살이 없으면 불교라는 종교도 없다. 불교는 보살과 보살이 구현하는 대비심을 통해 종교로서의 사명을 다하며 인간사회의 귀의처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불자는 보살도를 구현하는 대비의 수행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해야 한다. 그것이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세우신 서원이면서 이 땅에서 대각을 이루신 수행법이요, 우리에게 전하신 절절한 당부말씀이기도 하다.

불교는 보살로 시작해 보살로 마치는 종교이다. 우리가 보살행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닦지 않으면 불자로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으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불교신문3557호/2020년2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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