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신국의 딸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삽화=견동한
삽화=견동한

474년 서라벌 금성

곱게 단장을 마친 통리를 본 파호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자비는 눈물을 감추느라 고개를 돌린 파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이모가 아닌 거 같아요. 선녀님 같아요.”

눈이 휘둥그레진 태자 비처의 표정에는 진심이 그대로 담겨있었다. 자비와 백흔은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통리도 발그레한 얼굴을 감춘 재 입술을 앙다물었다. 한바탕 웃음이 지나간 후 백흔이 파호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신이 함께 가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통리는 청아와 복호의 딸이었다. 늦둥이로 태어난 막내여서 왕실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통리가 태어났을 때 사촌 오라비 자비는 이미 마립간이었고, 언니들은 왕비의 신분이었기에 그녀는 공주처럼 자랐고 무엇보다 총명했다. 

“고맙다.”

파호가 울음을 참느라 잠긴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고맙다는 말에는 많은 뜻이 담겨있었다. 실직 성주의 일로 고구려와의 사이가 틀어져 버린 후 신국은 자립을 도모해야 했다. 자비는 몇 년 전부터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여 꾸준히 성을 쌓고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관계가 좋아지긴 했으나 백제는 내부 사정이 어지러워 믿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왜국에 손을 내밀 수도 없었다. 그때 가야 왕실에서 먼저 혼인을 청해왔다. 자비는 고심 끝에 혼인을 수락했다. 내물 마립간 시절, 가야가 왜국와 동맹을 맺고 신국을 괴롭힌 것을 생각하면 괘씸했으나 고구려가 언제 공격해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존심만 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왕족의 신분으로 아직 미혼에 혼인 적령기의 처녀는 통리 한 명뿐이었다. 질지와 파호가 통리에게 무거운 마음으로 혼인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 영리한 통리는 자신이 가겠다고 말했다. 그 후 국혼은 일사천리로 준비되었고 마침내 혼인 행렬이 신국을 출발하는 날이 된 것이다. 

“질지가 못살게 굴거든 언제든 말하거라. 이 오라비가 가서 혼내주마.”

장난기가 담긴 자비의 목소리에 통리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우리 막내딸은 어디 가서도 사랑받으면서 잘 살 거라고 어미는 믿는다. 어서 가거라.”

혼인 행렬이 출발하기 전, 청아가 통리와 백흔에게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통리는 청아와 눈을 맞췄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보는 어머니의 얼굴이라는 생각에 통리의 눈가가 붉어졌다. 

“금관으로 가더라도 저는 어머니의 딸이자 신국의 딸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통리는 혼잣말로 다짐하듯 말하며 천천히 가마의 휘장을 내렸다. 길고 긴 혼인 행렬이 월성을 빠져나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청아는 눈을 떼지 못했다. 품을 떠나보낸 자식은 통리가 처음이었다. 혼인 행렬이 사라지자 청아는 가슴 한구석이 뚫려버린 것 같았다. 

475년, 고구려 평양성

사기충천한 군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맞춰 군사훈련을 하고 있었다. 입김이 나올 만큼 추운 날씨였으나 훈련장에는 열기로 가득했다. 목검과 창이 부딪히는 소리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으나 장수왕은 마치 아름다운 춤이나 음악을 보고 듣는 것처럼 흐뭇한 표정으로 군사들을 바라보았다. 어깨가 딱 부러진 군관이 장수왕에게 달려갔다.

“지금 막 도착했다고 합니다.” “오! 드디어”

장수왕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만연했다. 급히 발걸음을 옮겨 안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삿갓을 쓴 승려 한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는 길이 힘들지는 않으셨습니까?”

장수왕의 목소리를 들은 승려가 삿갓을 벗자 얼굴이 드러났다. 백제 개로왕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 있는 도림이었다. 도림은 장수왕을 향해 합장하고 고개를 숙였다. 

“국경을 넘은 후에는 편히 올 수 있었습니다.”

“바둑으로 개로의 혼을 빼놓으셨다지요.”

도림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개로왕은 바둑에 미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둘 곳이 없는 지독히 외로운 사람이었다. 왕위에 오른 후에는 귀족들과 동맹국의 눈치를 보느라 전전긍긍했고, 야심은 컸으나 현실은 막막했다. 도림은 개로의 불안을 다독이고 위로하며 그의 마음을 얻었고, 마음을 얻은 후에는 개로가 마음 깊은 곳에 숨겨놓았던 야심을 부추겼다. 그리고 그의 눈과 귀를 막아 버렸다. 

“흙을 굽고 돌을 캔다는 소식을 듣고 혹 튼튼한 성곽이라도 쌓는가 싶었습니다.”

“네, 처음에는 그리 말했습니다. 적을 방비해야 한다고 말했죠.”

도림이 순순히 인정하자 장수왕의 눈이 커졌다. 

“헌데 귀족들이 반대했습니다. 백성이 힘들다, 날씨가 좋지 않다, 계절이 아니다, 온갖 말들로 왕을 설득하고 나중에는 협박까지 했습니다.”

백제의 귀족들은 왕실과 여러 가지 이해관계로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장수왕은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비웃듯 말했다.

“귀족들을 다스릴 능력조차 없으면서 고구려와 맞서다니! 한심하군.”

“평생 귀족들에게 시달려온 왕은 전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만한 귀족들을 굴복시키려면 왕의 위엄을 드높여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도림은 개로의 눈빛이 환하게 빛나던 순간을 떠올렸다. 감히 귀족들이 흉내 낼 수 없도록 화려한 궁궐을 짓고 왕릉을 웅장하게 조성하면 그들이 저절로 조복할 것이며 조상들도 복을 내릴 것이라고 말하자 개로는 도림의 손을 덥석 잡으며 기뻐했다. 

“지금 개로왕은 궁궐 공사와 왕릉 공사에 모든 정신이 팔려있고, 백성들은 왕을 원망하며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대군이 몰려오면 지금의 백제는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장수왕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도림을 향해 합장했다.

“과연, 부처님의 지혜는 참으로 무량합니다. 고구려가 스님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도림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도림의 마음이 무겁다는 것을 안 장수왕이 단정한 얼굴로 말했다. 

“전투는 속전속결로 치를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피해가 없지는 않겠으나 병사들에게 함부로 살생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릴 것입니다. 이번이 마지막 전쟁이 되어야 합니다.”

장수왕은 잠시 한숨을 내쉰 후 화를 참으며 말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은 처음부터 저들이 시작했습니다. 입으로는 형제의 나라라고 하면서 마음으로는 늘 원수로 여기니 겉과 속이 다른 형제는 적보다 무서운 법입니다. 나는 선왕처럼 아량을 베풀지 않을 것입니다. 아량을 베푼 결과가 어땠는지 분명히 보았습니다.”

장수왕의 살기 어린 얼굴에 도림은 염주를 돌리며 속으로 아미타불을 외웠다. 이미 도림은 용서받을 수 없는 커다란 업을 지었다. 부디 죄 없는 백성들이 덜 고통 받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그해 가을, 장수왕은 3만의 대군을 이끌고 백제로 향했다. 이미 규율이 무너진 지 오래된 백제의 군대는 고구려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백제의 마지막 보루였던 북궁은 7일 만에 함락되었고 포로가 된 개로왕은 아차산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백제는 아리수 지역을 모두 잃고 웅진으로 수도를 옮겼다.

[불교신문3556호/2020년2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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