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불교서지학계 권위자
‘직지심체요절’보다 앞선
금속활자본 발견 연구서

“최이의 서문 오역하면서
비롯된 오해 바로잡아야”

남명천화상송증도가

박상국 지음 / 김영사
박상국 지음 / 김영사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중국 당나라 현각스님이 선종의 6조인 혜능스님을 친견한 후 크게 깨달은 심정을 서술한 <증도가>에, 송나라 남명선사 법천스님이 게송을 붙여 내용을 알기 쉽게 밝힌 책이다.

현존하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모두 10여 종으로 그중 4책이 동일 본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출판박물관에 소장 중인 삼성본(보물 제758-1호), 공인박물관에 소장 중인 공인본(보물 제758-2호), 대구 스님 소장본(문화재 신청 중), 개인 소장본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가운데 박상국 한국전적문화재연구소 소장이 “보물 제758-2호로 지정된 공인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1239년(고종 26) 조계산 수선사(현 송광사)에서 제작된 세계 최초이자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라는 주장을 담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출간해 주목된다.

“동일 본으로 알려진 4책을 검토해 본 결과 공인본은 금속활자본이고 다른 책은 목판본각본으로 각기 다른 판본”이라는 박 소장의 주장대로라면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으로 알려진 <직지심체요절> 보다 138년 앞선 금속활자본이 존재하는 것이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보물로 지정돼 있는 공인본은 고려 고종 26년(1239)에 최이(崔怡)가 이미 간행한 금속활자본을 견본으로 삼아 다시 새긴 번간본 중 하나가 전해진 것이다. 기존에 학계에서 1984년 처음 등장한 삼성본 권말에 붙은 최이의 지문 가운데 ‘於是募工 重彫鑄字本(어시모공 중조주자본)’이라는 문구에서 ‘중조주자본’을 “금속활자본을 다시 목판에 새기다”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기서부터 오해가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나라 최고 한문학자 이정섭 교수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의견을 수집해 “주자(금속활자)본으로 다시 주조하여”, “거듭 주조하여”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엇보다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최이가 굳이 번각본에 지문을 쓸 명분이 없다고 지적했다.
 

박상국 한국전적문화재연구소 소장이 공인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이 세계최초 금속활자본이라는 주장을 담은 연구서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최근 출간했다. 사진은 근거로 책에 제시한 공인본(사진 왼쪽)과 삼성본에 수록돼 있는 최이의 서문으로 광곽 크기는 같은데 글자 크기가 눈에 띄게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박상국 한국전적문화재연구소 소장이 공인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이 세계최초 금속활자본이라는 주장을 담은 연구서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최근 출간했다. 사진은 근거로 책에 제시한 공인본(사진 왼쪽)과 삼성본에 수록돼 있는 최이의 서문으로 광곽 크기는 같은데 글자 크기가 눈에 띄게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금속활자본인 공인본과 목판본인 삼성본을 비교·분석해서 공인본이 금속활자본임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먼저 1장에서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가 어떤 책인지, 현재 남아 있는 판본이 얼마나 있는지를 모두 조사해 분석했다.

2장에서는 그동안 <남명천화상송증도가>가 왜 금속활자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목판본으로 판명됐는지 그 과정과 이유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특히 가장 논란이 된 ‘최이의 지문’과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회의록’에 대한 재검토 과정도 모두 담겨 있어 눈길을 끈다.

이어 3장에서는 공인본과 삼성본이 동일한 판본으로 보물로 지정됐지만, 공인본은 동일한 목판본이 아니라 금속활자본임을 밝혔다. 저자는 “공인본에는 금속활자본의 특징을 많이 지니고 있었다”면서 “그것도 초창기의 금속활자본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너덜이, 획의 탈락, 광곽, 보사(補寫), 활자의 움직임, 뒤집힌 글자, 활자의 높낮이에 의한 농담의 차이 등이 금속활자본으로서는 처음으로 많이 나타나고 있었다”고 말한다.

마지막 4장에서는 공인본의 역사적 위치가 제대로 밝혀지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기 위해 우리나라 인쇄술의 역사를 개괄해 보여준다. 저자에 따르면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걸쳐 영국, 프랑스, 일본, 독일, 미국 등 외국학자들에 의해 한국의 금속활자가 연구되면서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국가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됐고, 그로 인해 우수한 문화민족으로 자존감도 갖게 됐다.

그러나 해방 이후 자기 역사와 문화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외국인들에 의해 형성된 성과에 의해 금속활자 종주국이라는 칭찬에만 성급했다고 지적했다. 저자는 “고려가 금속활자를 발명했지만 지방의 사찰이 중심이 돼 간헐적으로 몇 차례 서적을 간행했을 뿐이며, 그마저도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어서 다시 목판 인쇄로 회귀했다”고 안타까워했다.

문화재관리국 전문위원을 시작으로 문화관광부 심의위원(전통 사찰), 국립문화재연구소 예능민속연구실장, 프랑스 외규장각도서 환수 자문위원회 위원,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한 저자는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위원 등을 맡고 있는 불교서지학계의 권위자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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